미키7 미키7
에드워드 애슈턴 지음, 배지혜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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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키7은 오랜만에 읽는 SF소설이었다. 봉준호 감독이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미키17이라는 제목의 장편 영화를 제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서 알게 된 책이었지만 그 이외에는 별다른 정보를 모르는 채 읽었고, 결과적으로는 좋았다.



미키7의 저자인 에드워드 애슈턴은 미국 작가인데 한국에 따로 알려진 특별한 장편 소설은 없는 것 같다. 검색해보아도 미키7이 워낙 유명해진 건지 이 책 밖에 나오질 않았고, 단편은 주로 발표한 것 같다.




미키7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껏 죽어 본 중에 가장 멍청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 같다.


책을 끝까지 보고 난 입장에서 이 문장을 다시 보니 이후의 전개를 함축해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 주의 !

이 아래로는 책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감상을 정리했기에 스포일러에 주의가 필요하다.





치명적인 방사능에 노출되어야 하는 임무를 비롯한 여러 작업은 기계보다 인간의 몸이 훨씬 더 오랫동안 견딜 수 있었고, 기계로는 할 수 없는 의학 실험과 관련된 임무도 있었다. 게다가 상륙거점에서는 익스펜더블이 기계보다 교체하기 훨씬 쉬웠다.


반면 나를 하나 더 만드는 데 필요한 원료는 농산물 생산 라인이 돌아가기만 하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다.



미키7의 가장 주요한 키워드를 말하라면 '익스펜더블'일 것이다. 익스펜더블은 이 소설에서 '위험한 임무를 할 때 소모품처럼 쓰이는 복제 인간' 같은 의미로 쓰인다.


이 키워드를 통해 인간이 소모품으로 다뤄지기 시작할 때, 얼마나 그 가치를 추락시킬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로 인간을 인간답게 여기려는 원칙을 도덕이나 윤리로서 고수하지만, 인간을 소모품으로서 다루기 시작한다면 얼마나 소모적으로 이를 대할 수 있는가.


기계보다 교체하기 쉬운 게 인간이라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하고 우스운 일이다. 인간을 복제하는 게 기계를 다시 만드는 것보다 쉽다는 건 생명 경시적인데도 소모품으로 여겨지는 익스펜더블을, 인간은 다시 자신들과 구분하는 방식으로서 인간에서 분리한다. 인간은 항상 누군가를 분리하고 구분하는 식으로 자신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기적이다. 그런 인간이 생명을 얘기하려는 게 때론 가식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당연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광산, 군대에 가는 사람 도 없었다. 내게 주어지는 생활비는 먹고 살기에 충분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문득 내가 발코니 밖으로 몸을 던진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을 텐데.



노동이 없는 삶을 살게 되면 인간은 정말로 무료함을 느끼며, 기본적 삶에 대한 의미를 고민할까? 죽음과 삶에 아무 차이가 없다고 생각할까?



하지만 지금 상황과 이제까지의 죽음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는 불확실성이 아니다. 이전까지는 내 기술자들이 떠들던 불멸을 적어도 반은 믿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였다. 미키3가 죽고 나면 몇 시간 후 미키4가 재생 탱크에서 나올 것이고, 눈을 감았다 뜬 것처럼 두 버전 모두 나라고 생각했다.



기술의 입장에서 육체가 동일하다면 동일성은 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전의 기억과 지금의 ‘나’라고 여겨지는 것이 선명히 구분된다면 거기서부터 이미 단절은 발생한 것 같다. 연속이라 볼 수 없다.



나샤는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는 좀 힘들어. 그리고 네가 죽을 때마다 매번 더 힘들어져. 지난밤에는 정말 괴로웠어. (중략) 하지만 지금 네가 여기에 있고, 네 이야기처럼 내가 만약 어젯밤에 너를 구했다면 지금의 너는 여기 없을 거야······. 그래서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어."



소중한 이의 죽음을 겪는 슬픔 또한 반복되면 무뎌질까? 아니면 미키 또는 나샤처럼 그 순간마다 별개처럼 느끼며 매번 감정을 새로이 갱신할까. 그리 생각하면 감정이란 정말 무뎌지는 것일까? 늘 같은 양의 감정을 느낀다면 우리는 왜 그걸 무뎌진단 표현을 할까? SNS에서 봤던 글처럼 과거의 크기가 그대로여도 우리가 성장하기 때문일까? 감정도 같은 것일까?



"내가 화가 난 이유는 내 삶이 엉망진창이기 때문이야. 숙취에 시달리는 느낌으로 보존액이 덕지덕지 붙은 채로 잠에서 깰 때마다, 나한테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건 아는데,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 그 일이 다시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기억이 안 나. (하략)”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알지 못한 채 다시 눈을 뜨면 삶이 이어지고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이쯤 되고 보니, 그다지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은 베르토와 내가 애초에 어떻게 친해졌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은 덕분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듯 완벽한 친구란 있을 수 없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다양한 단점들을 이유로 사람들을 내친다면 그들이 가져다줄 기쁨과 행복 역시 누릴 수 없게 된다.


베르토와도 마찬가지다. 다만 베르토는 밥값 때문에 치사하게 구는 대신 가끔 내가 구덩이에 빠져도 얼어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두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거짓말을 할 뿐이다. 베르토는 그런 사람이다. 받아들이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 모든 일이 한결 쉬워진다.



미키는 관용적인 사람인 것 같다. 자신에게도 까다롭지 않으니 타인에게도 그런 걸 수도 있겠다. 어쩌면 자신에게 대해 희박한 관심을 가지는 만큼 타인과의 관계에도 큰 관심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본인이 본인의 삶에 대해 집착하지 않기에, 상대의 단점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리 크게 느끼지 않는 걸 수도 있다. 미키는 벤과 제 지갑을 저울질했다고 했지만 결국 벤에게서 미키가 얻는 장점은 묘사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베르토에 대해서도 그랬다. 미키가 누군가에게서 얻는 장점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임무를 맡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이에요. 당신이 바로 테세우스의 배라고요. 사실 우리 모두 그렇죠. 지금 내 몸을 이루는 세포 중에서 10년 전에도 존재했거나 몸의 일부였던 세포는 없어요. 당신도 마찬가지죠.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 지어져요. 한 번에 한 부분씩 수리되는 셈이죠. 당신이 이 임무를 맡게 된다면 당신은 한꺼번에 새로 지어지는 셈이에요. 하지만 결국 똑같지 않나요? 익스펜더블이 재생 탱크에서 나오는 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천천히 진행될 일을 한 번에 처리하는 셈이에요.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진짜 죽은 게 아니에요. 비정상적으로 빠른 리모델링을 할 뿐이죠."



이 이야기는 이론적으로 보면 언뜻 논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시간’이 빠져 있다. 세포가 조금씩 바뀌어 나갈 때에도, 배가 수리되는 과정에서도 ‘시간’이 존재한다. 그것을 압축시키는 순간 이미 달라진다.




그 몇 마디 말에 따져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일단 나는 죽기 전까지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 또는 업로드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죽는 문제에 더 관심이 있었고, 아무도 내 의사를 묻지 않았으면서 으레 내가 이 임무를 맡으리라고 가정하는 것도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사실은 그녀 말이 맞았다. 나는 이 일을 해야만 했다. 젬마는 필드 생성기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세히 이야기했고, 망가진 부분을 교체하지 않으면 이 우주선이 얼마나 큰 위험에 처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미키의 상충적인 부분이 잘 드러나는 문단이라 생각한다. 미키는 자신이 죽은 거란 걸 인지만 하고, 실감하지 못하고 있지만 자신이 죽음으로 가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죽을지도 모른단 사실에는 또 신경 쓰고 있다. 그는 죽음이 두렵지만 실감은 안 나고 한편 제 자신의 죽음보다 타인의 죽음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도 어? 설마? 진짜? 하고 실감을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죽음을 예감하는 건 자연스러운 걸까? 아니면 수많은 인간이 그러하듯 갑작스레 맞이하는 죽음이 더 자연스러운 걸까? 죽음이 당연하다면 우리가 맞이하는 죽음의 형태나 순간은 왜 늘 다른 것일까? 죽음 그 자체는 평등하면서 왜 방식에서 차이를 가는 것일까?


생명도 죽음도 공평하지 않다. 생명과 죽음 그 자체가 동일하다 해서 그 이후와 둘러싼 것들이 다르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걸 만들어낸 것도 인간 또는 생명체 그들이라 말한다면 할 말이 없기는 하다. 우리는 왜 비참한 삶이나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있는 채 존재하는가.


삶이나 죽음에는 왜 고통이 있어야 할까? 고통은 삶에도 죽음에도 불멸에도 모두 존재한다. 그 이유는 뭘까? 벗어날 방법은 정녕 부처가 말하듯 해탈 뿐일까?


내 친구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은 고통에의 초월이고, 안락사와 같은 죽음은 고통에서의 도피라고 그랬다. 그리고 죽기까지의 고통이 있는 이유는 고통에는 역치가 없고, 이는 고통이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고, 이를 통해 생존을 도모하라는 생명체의 진화의 산물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면 안락사는? 그건 약물이다. 약물은 고통의 역치를 반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지기 위한 것이니까 그렇다고 그랬다. 그렇다면 왜 고통이 심해질수록 도파민이 나오나? 그건 쇼크사를 방지하기 위한 게 아닐까? 그것 또한 죽음이기 때문에 그렇게 죽는 것보다는 고통을 경감하는 도파민이 나오라고 뇌가 으악 나 죽어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가장 이상적인 원재료는 당연히 살아 있는 인간이다.



인간을 만들기 위해 인간이 필요하다는 건 오래 픽션의 소재이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건데 기괴하게 느껴지는 게 이제는 좀 더 이상하게 느껴진다. 인간의 탄생이 인간 없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인간을 희생해서 인간을 만든다는 걸 무서워하는 건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느껴진다. 자연계에서 어떤 곤충들은 다음 세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에게도 종종 일어나지만 흔하지는 않다. 뭔가 생존에 대한 욕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는 존재의 부재를 더 두려워한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인간은 왜 유독 그런 게 심한 걸까?




매니코바는 자신에게 잘 대해 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바이오 프린터에 던져 넣어 그의 분신으로 만든 다음 무기를 쥐여 주고 가장 가까운 이웃 공동체를 습격했다. 살아남은 공동체들이 힘을 모아 그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의견을 모으기까지 거의 1년이 걸렸다. 그때 이미 매니코바는 행성에서 절대다수가 되어 있었다.



매니코바는 자아가 비대한 인물이었을까? 그가 자신의 복제를 계속해서 만들어 행성을 차지하려 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자신같은 인간만 세상에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사람이 살 만한 행성은 그리 많지 않다. 그중 하나를 잿더미로 만든다면 유니언에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르는 셈이다.


하지만 누구도 파홈을 비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매니코바를 비난했고, 그 후 유니언 대부분 지역에서 중복된 익스펜더블은 아동 납치범이나 잔혹한 연쇄살인범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



파괴는 참 쉬운 해결책이다. 왜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넌 네가 불멸이라고 생각해?"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뭐라고?"


“이런 이야기를 내가 왜 하냐면, 네가 미키 반스가 맞는지, 아니면 그의 껍데기를 쓴 다른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그래.”

“말했잖아, 모르겠다고. (중략) 즉, 나로서는 확실히 알아낼 방법이 전혀 없다는 뜻이지. 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고.”

“그래도 네가 미드가르드의 미키 반스가 아니라고 인식하는 건 아니지?”

“응, 모르겠어.”

캣은 답이 없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정적 속에 앉아 있었다.




캣의 등장과 이야기 내에서의 부상은 내겐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별 생각없던 캐릭터였다. 어느새 그는 세븐의 옆자리를 파고들었고,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의 비밀도 알아챘다. 그가 불멸에 관심을 크게 갖게 된 것도 물론 세븐과 함께 살아남으면서 동료를 잃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캣은 젬마가 말하던 불멸을 믿었다. 미키가 불멸에 대해 어중간한 답을 했을 때 테세우스의 배에 대해 다시 언급하며 설명을 잘 못한다 언급한 것이 그 증거이다. 미키의 대답보다는 자신이 믿는 걸 믿는다. 그는 죽음의 공포로 맛본 이후 죽음을 받아들이기 너무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세븐이 뭐든 받아들이는 성격인 탓에 지금까지 살아온 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캣의 욕망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미키의 중복 문제를 덮어주려한 것은 세븐에 대한 일말의 애정 탓이었을리라 예상되는데, 세븐이 캣에게 제멋대로 했던 기대가 무너져 자포자기 삼아 에잇과 나샤를 받아들인 걸 들켰을 때, 캣은 이 또한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




"(상략) 지금 우리를 봐. 내 삶은 지난 6주에 불과하고, 네 삶은 지난 며칠에 불과해. (중략) 나인은 내가 아니니까. 나인은 그냥 내 침대에서 자고 내 배급 카드를 사용해 배를 채우고 내 물건들을 사용하는 다른 사람일 뿐이야."


에잇은 고개를 저었다. “(상략) 그가 나라고 생각하는 이상, 사람들이 그를 나라고 생각하는 이상, 그는 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고, 그럼 그는 나야. 네가 지금 하는 생각, 바로 그 생각 때문에 익스펜더블이 중복되는 걸 허용하지 않는 거야."


나는 눈을 굴리며 대꾸했다. “익스펜더블 중복을 허락하지 않는건 앨런 매니코바가 우주를 정복하려고 했기 때문이야."

"그렇게 생각하시든지."



세븐의 말에 납득을 하면서도 에잇의 말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존재는 둘일 수 없다. 그저 이름을 공유하는 다른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두 사람이 동일한 사람이라 생각하더라도 다른 지점이 생긴다면 거기서 이미 고유한 지점은 망가진 것이라 본다. 이미 이전에 말했듯 ‘시간’에 차이가 존재하면 고유성은 망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미키7의 엔딩은 초반부부터 촘촘하게 깔아뒀던 복선 회수를 하면서 끝이 난다. 세븐이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 여러 죽음들, 그리고 세븐과 에잇의 결말까지.


내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과 가장 어울리는 인용 부분은 아마 여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긴장 풀어, 미키. 잠이나 좀 자.”




무언가를 유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죽음이든 삶이든 이어가기 어렵다. 나샤와 미키를 보면서 강렬하게 그 생각이 들었다. 미키는 무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창 밖으로 뛰어내리지 않고, 나샤는 연인의 죽음에 매번 슬퍼하면서도 그것을 마주하는 의외로 강한 인물들이다. 그건 생각없거나 나태하다 느껴지기도 하지만 상황이나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기 위한 태도나 삶의 방식으로도 느껴진다. 어쩌면 그게 개척지민으로서 더 어울리는 낙관적 삶의 태도, 방식일 수도 있겠다. 그곳은 안정적인 곳이 아니니 말이다.


우리는 때때로 미키처럼 세계를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작정 그래서는 안된다. 그것이 익스펜더블의 중복이 허용되지 않게 된 사건과 무관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븐도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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