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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1~3 세트 - 전3권 (무선)
류츠신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7월
평점 :
과학 팟캐스트 <과학하고 앉아있네> 에서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된 <삼체>는 한동안 내 기억에서 잊혀졌다. 우연히 넷플릭스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삼체>에 나오는 삼체 문제에 대해 설명해주는 성균관대 통계물리학 김범준 교수의 영상을 보게 됐다. 그러나 드라마가 크게 각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강경 원작파인 나는 그렇게 <삼체>를 읽기 시작했다.
<삼체>는 초반부터 흡입력 있게 나를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모래 사막의 바늘을 찾는 것 같은 불친절한 전개는 솔직히 내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답답하던 앞부분을 지나 말도 안되는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들에게 자연스럽게 몰입하기 시작했다. <삼체>에서 보여준 작가 류츠신의 치밀한 구상과 과학적 상상력은 경이로웠다.
1부: 삼체문제
삼체문제는 여전히 그게 얼마나 어려운 지 이해할 수 없지만 거기서부터 뻗어져 나온 작가의 압도적인 상상력은 나를 1부 전체에서 몰아붙였다. 가상 현실 게임이라는 소재를 사용한 것도 정말 좋은 전개였으며, 작가가 만들어낸 개연성 넘치는 소설 구성은 우주적인 위기를 겪는 인류와 소설 속 비현실적인 상황을 독특하면서도 납득가게 만들어 놓아 너무나 흥미진진했다.
특히 소설의 서사가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얽혀 있는 점은 충격이었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문화대혁명에 대해 따로 알아보게 될 정도였는데, '중국 작가가 이 사건을 이만큼 건드려도 괜찮은 건가?'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그 시기에 대해 비판하는 통렬함에 깜짝 놀랐던 첫 중국 SF였다. 덕분에 1부의 주요 인물인 '예원제'의 삶과 선택이 충분히 이해됐다.
2부: 암흑의 숲
2부 암흑의 숲은 세계관이 태양계로 확장되면서 인류의 모순과 이기심이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면벽 프로젝트를 둘러싼 정치적인 계산과 인간의 불합리한 모습들은 정말이지 인류가 이렇게 이기적인가 싶어 불편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묘사였다. 처음에는 면벽 프로젝트의 시작 시기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그 시기가 소설 내에서는 정치적으로 적합한 선택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2부의 주인공인 '뤄지'라는 인물에게 처음에는 정말이지 많이 분노했다. 만약 내가 삼체 세계의 인류였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내가 추구하던 가치관이 삼체 소설 속 세계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알게 됐다. 여기서 완벽하게 무너진 나는 뤄지의 비합리적인 선택이 얼마나 옳은 지 깨달았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뤄지의 사랑 얘기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면벽 프로젝트를 이용해 이상형의 여자를 찾아내고, 삶을 일방적으로 통제했다. 그 여자, 좡옌의 시점은 소설 속에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고, 뤄지가 좡옌의 선택이나 의사를 완벽하게 존중했다고는 절대 볼 수 없다. 그는 좡옌을 처음부터 진실되게 대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누군가를 대상으로 삼았다. 소설은 이를 사랑으로 미화하고 정당화했다. 그건 결코 낭만이 아니며, 타인의 선택을 강제로 제한하는 행위였기에 큰 불편함으로 남았다.
3부: 사신의 영생
3부 사신의 영생은 스케일이 폭발적으로 확장되어 우주 전체가 된다. 우주는 낯설고 냉혹해졌으며, 인류는 무력했다. 그나마 중심 인물인 '청신'이 그 흐름 속에 계속 있어주었기에 그를 따라가면서 혼란스러운 이야기를 놓치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이 버텨냄인지 도피였는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도피'였다고 생각한다.
3부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청신은 사실 나와 결이 정말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우주의 냉혹한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극히 '인간다운' 선택을 반복하며 인류를 비극으로 이끈다. 작가는 청신의 첫 선택부터 그 이후의 선택들을 계속해서 '모성애'로 비유하며 포장했고, 나는 여기가 특히 불편했다. 3부 초반부에 뜬금없이 나왔던 헬레나 이야기는 어쩌면 청신의 삶을 은유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이야기는 헬레나라는 마법사가 '자신은 마법을 쓸 줄 아니 내가 당신을 도와주면 나를 성녀가 되게 해달라'며 황제를 찾아와 그의 요청대로 마법을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죽음을 맞이하고,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된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여기에는 여러 은유가 있겠지만 헬레나가 굳이 '성녀'가 되고 싶어했다는 점에서 내게는 작가의 의도가 느껴졌다.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청신에게 말하고 싶었다. "진짜로 네가 엄마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청신의 이러한 부분을 작가가 의도하고 설정한 캐릭터라면 정말이지 대단하다고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동물조차 새끼의 생존 가능성이 없으면 냉정한 선택을 하는데, 인간의 모성을 단순히 비이성적 헌신으로만 해석하는 건 정말이지 구시대적이다. 청신이 보여주는 건 희생적 본능보다는 현실 감각을 상실한 인간의 나약함에 가까워 보였다. 게다가 청신에게서는 실제 여성이 느낄 법한 감정선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작가의 한계가 느껴졌다.
<삼체> 3부의 초반부에 청신에게 익명의 누군가가 엄청나게 고액의 선물(명품 가방, 옷 뭐 이런 수준이 아니다. 진짜 우주급 선물이다. 누군가는 평생을 바쳐도 살 수 없는!)을 줬다. 청신은 그걸 받고 꺼림직해 하기는 커녕 낭만적이라고 생각한다. 맙소사. 작가가 여성이 갖고 있는 '안전'에 대한 욕구를 아예 상상하지 못하기에 이런 서술이 나온 게 아닐까? 내 개인정보(이름, 주소 등)가 없으면 선물할 수 없는, 말도 안되는 가격의 말도 안되는 선물인데 이걸 그냥 낭만적인 선물이라고만 생각한다고? 아무리 인류 멸망의 위기가 찾아왔다지만 말이 안된단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현실 감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여성이라면 대체 누가 이런 선물을 줬는지 불안해 하며, (물론 어쩌면 청신 같은 누군가는 설렐 수도 있다. 인간은 다양하므로.) 알아내려 할텐데 청신은 그저 낭만적이라고만 말하고 넘어간다. 거기서부터 나는 작가가 청신을 의도적으로 '성녀' 포지션에 놓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청신이 ‘전사’로 거듭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나는 엄마의 모성이 ‘본능’이 아닌 자식과 자신의 생존을 위한 싸움을 거듭하며 ‘성장’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청신의 선택들은 내내 도망치고 싶은 나약한 인간임을 자처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본능’이며, ‘모성’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느끼기에 그건 ‘모성’이 아니라 청신의 선택이 보여준 청신 스스로의 나약함 그 자체였다. 다만 마지막 그의 선택에는 여러 반론의 여지가 있다. 그래서 말을 아끼겠다.
<삼체>는 인류 멸망이라는 위기 앞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려는 인류의 이기심을 또렷히 보여주면서도 그 안에서 도덕과 윤리를 찾으려는 인물들, 그리고 그것이 거대한 우주의 법칙 안에서 올바른 선택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며, 여러 생각을 하게끔 한다.
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인간됨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여겼고, 3부까지 모두 보고 난 뒤에도 역시 그 가치관이 틀리지 않았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됨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하는 건 큰 범위에서 볼 때 여전히 같은 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쪽이든 나의 선택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것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구분해야 한다. <삼체>를 통해 인간이 인간됨을 포기하지 않는 게 반드시 도덕이나 윤리와 일치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됐다. 개인의 도덕과 윤리는 전체의 도덕과 윤리와 맞지 않을 때도 있다.
모든 인물들의 선택이 그 인물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었기에, 비록 나와 맞지 않을 때는 수없이 왜 그런 선택을 했냐고 화를 냈지만 결국 그 인물들의 선택은 그 인물들이 그 인물인 이유였다. 내가 <삼체>의 인물이었다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 대답은 <삼체> 안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안의 누구도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존 앞에서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하게 될까? 앞으로의 삶 속에서 나는 계속 이 질문을 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