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대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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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 누나 가슴에 삼천 원쯤은 있는 거예요,라고 회자되는 명대사가 있었다. 원래는 누구나 가슴에 상처 하나쯤은 있는 거예요,라는 대사였다. 배우의 발음 때문에 왠지 우스워져 버렸지만 본질적으론 인간의 마음에 위안을 주는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저지대는 낮고 축축한 습지다. 1940년대 어느 나라나 그랬듯이 당시 인도 역시 격변의 시기였다.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다 총살 당한 동생, 그의 혈육을 잉태한 아내, 동생의 아내와 그 혈육을 구하려는 형. 오랜 시간이 흘러 저지대는 메워지고 그 위로 건물이 올라가지만 저마다의 마음속 저지대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누구나 상처 하나쯤 가지고 살아가듯이 말이다. 읽고 있으면 이 가족들 왜 이렇게 사나,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마음이 든다.

 

치유될 수 없는 상처 때문에 영원히 불화하는 사람들, 분명 그런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 소설은 조금 더 깊게 읽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는 이 마음속 '저지대'가 과연 온전히 시대에 의해 입은 상처인가 하고 묻는다. 이야기 후반엔 극적인 반전까진 아니더라도 중요한 윤리적 쟁점이 나온다. 경찰의 총에 맞아죽은 우다얀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 듯 보였지만, 이야기 후반 가우리의 회고 속에서 진실이 드러난다. 혁명의 실천이라는 미명하에 죄 없는 경찰을 죽이는 데 가담한 것이다. 남들이 모르는 우다얀의 죄를 가우리는 안다. 우다얀은 억울하게 희생 당한 것이 아니라 보복으로 죽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처벌로 인하여 우다얀의 죄는 잊히게 된다. 지젝이 말했듯 복수와 처벌은 역설적으로 '진정으로 용서하면서 동시에 망각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죽음 자체가 가지는 해방의 성격도 있다. 어쨌거나 이제 우다얀을 비난할 사람도 없고 본인도 죄로부터 영원히 해방됐다.

 

가우리의 경우는 조금 복잡하다. 가우리는 경찰이 죽음을 당하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경찰의 행동 정보를 감시하여 우다얀에게 넘긴다. 가우리는 우다얀에게 이용당했지만 역시 공범이다. 우다얀은 범죄(Crime)를 저질렀고 보복 당해 그 범죄가 소멸되었지만, 가우리의 죄(Sin)는 그녀 자신만 알기에 누구도 거기서 구해주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적어도 그녀의 저지대는 타자가 또는 시대가 입힌 상처가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죄와 영원히 구제될 수 없는 죄의식이다.

 

범죄(Crime)를 저지르지 않고 사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죄(Sin)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난 결코 고백하지 못할 여러 죄를 짓고 살았다고 느낀다. 비겁하지만 스스로 용서하거나 잊고 사는 수밖에 없다. 둘 다 하지 못한 가우리는 자신과 가족의 인생을 일정 부분 망가트렸고, 결국 수바시와 벨라에게 끝까지 용서받지 못했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무거운 죄에서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 자신이 할 수 없다면 타인의 관용으로 구원될 수 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자신의 죄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진실함이 있을 때 구원의 계기가 생기지 않을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죄 앞에서 진실하기가 가장 어렵다. 그렇기에 구원 없이 스스로 삶을 뭉개는 사람은 여전히 많을 것이다.

미래는 뇌리를 떠나지 않고 불안감을 안겨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를 살아 있게 했다. 미래는 자양분이면서 동시에 약탈자였다. 매번 새해는 새 일기장과 함께 시작했다. 일기장은 인쇄되고 제본된 형태의 시계라 할 수 있었다. 가우리는 일기장에 자신의 기분이나 느낌을 기록하지 않았다. 대신 작문의 초고를 쓰거나 금전출납부 용도로 사용했다. 어렸을 때조차도 일기장의 아직 펼치지 않은 각 페이지에는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운, 아직 경험하지 않은 사건들이 들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계단을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12월이 다시 온다는 증거가 어디 있어? 같은 의문이 일기도 했다. 2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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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탄생 - 대한민국의 심장 도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한종수.강희용 지음 / 미지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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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이 예전엔 허허 벌판이었다고 한다. 1970년 이전까진 강북 사대문 안이 서울의 중심이었고 그 밖은 논밭에 소달구지나 지나다녔다고. 당시의 인구수나 산업 구조, 전쟁 후 상황 같은 걸 따져보면 머리론 이해되지만 눈으로 지금 강남대로를 보면 전혀 상상되지 않기도 한다. 책은 강남이 어떤 필요에 의해, 어떻게 발전됐는지를 신빙성 있는 사료부터 야사(野史)까지 넘나들며 설명한다. 서울 라이프 십 년도 안 됐지만 그동안 다녔던 동네들을 떠올리며 역사와 합쳐 읽으니 아주 재미난다.

 

책에 소개된 강남 개발의 이유. "1) 안보 문제 해결을 위한 도심 기능의 분산, 2) 엄청난 개발 가능 면적, 3) 개발을 통한 정치자금 조성, 4) 서울 도심과의 인접성, 5) 자동차 시대의 도래 같은 여러 요인과 조건이 맞물려 시작되었다 (23)" 그럼 어떤 방식으로 개발이 이뤄졌나. 사실 이게 핵심인데 다 말할 수는 없고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초법적 권력을 가졌던 정부가 법을 넘나들며 개발한 것이다. 그러니까 강남 발전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 발전의 형식과 그대로 맞닿아 있다. 땅투기도 하고, 판자촌 살던 사람 쫓아내기도 하고, 불도저식 속도전으로 화끈하게 공사하고, 권력자들 치적 홍보용 건물도 짓는 그런 방식. 그래서 성수대교와 삼풍 백화점이 무너지고, 미적 감각이 결여된 치적 건물들이 세워지고, 시민들을 위한 공간은 부족하고. 당연히 "서울 시민들은 편의성과 속도를 얻었지만 대신 서정성과 추억을 잃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134)"

 

강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모임 장소로도 싫어한다. 그러나 경기도까지 커버하는 대중교통 집결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몇몇 모임은 강남에서 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서울에 사는 게 아닌데 강남에서 모이면 늦은 밤 어떻게든 경기도민들이 집에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강남(역부터 논현, 역삼, 선릉...)이란 동네가 와보면 얼치기 맛집밖에 없고, 가격은 비싸고 그렇다. 남자들끼리 선릉이나 역삼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하면 여자친구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거기 왜 가는데! 조용한 이자카야 가려고 그랬는데. 아, 자기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괜히 설명을 더 해야 한다 (왜 역삼, 선릉이 그런 동네가 되어버렸는지도 책에 나온다 ㅎㅎ).

 

여자 만나기에도 별로다. 10년 전쯤엔 소개팅 나와서 강남역 커피빈이나 지오다노 앞에서 쭈뼜거린 적도 있었지만 ㅋㅋ 그건 소개팅이니 그렇고, 연인들 데이트 장소로는 영 꽝이다. 강남에서 밥 먹고 커피 마시고 뭘 해야 하나. 영화 시간까지 붕 뜨면 DVD방이나 가야 하나. 와우. 미슐랭 식당들이 포진해 있는 청담 같은 델 가면 좋겠지만 그런 부르주아는 되지 못한 관계로 강남은 좋아할 방법이 없다.

 

하여간 이런저런 이유로 도로만 넓고 왠지 정 없는 강남보단 강북의 아기자기한 동네를 더 좋아할 수밖에 없다. 굳이 요즘 뜨는 연남동이니 망원동이니 하지 않아도 그냥 강북은 사람과 함께 발전한 냄새가 폴폴 나서 정겹다. 이를테면 충정로의 오래된 성요셉 아파트 같은 건물. 지나가다 우연히 보기만 해도 재밌다. 이런 데 커피숍도 있구나! 하며. 차 있으면 밤에 삼청동, 성북동 드라이브하며 보이는 카페 아무 데나 들어가면 분위기 평타 이상이다. 술모임도 종각이나 종로통, 한강 이남이라면 하다못해 영등포 같은 동네가 조금 지저분해도 사람 냄새나고 맛도 있고 그렇다 (여담이지만 영등포 청도 양꼬치 가지 튀김 진짜 맛있으니 기회 되면 한 번 가보시길 ㅋ).

 

말은 이렇게 하지만 강남 라이프가 부럽긴 하다. 깨끗하고 여유있고. 그저 내가 여유가 안 되고 B급 정서를 사랑하는 인간이라 깨끗한 강남보다 구도심을 좋아하는 것일 뿐이다 ㅎㅎ. 서평은 안 쓰고 잡담만 많이 했네. 여하튼 책은 "앞으로 국가의 권력과 자본의 힘이 아닌 시민들의 힘으로 강남이 보다 '사람 사는 곳'으로 바뀔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하며 마무리된다. 나 또한 그런 마음이다. 강남역에서도 재밌는 데이트를 할 수 있고, 역삼이나 선릉에서도 의심의 눈초리 받지 않고 남자들끼리 만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길 바란다.

 


 

1970~1971년, 영동 지구에서 체비지는 10만 평에 달했다. 그러나 당시 ‘영동‘은 아무런 기반 시설이 없는 허허벌판이어서 여러 특혜에도 불구하고 체비지가 잘 팔리지 않았다. 이를 팔아서 자금을 조달하여 고속도로 건설에 쓸 계획이었는데 투자 가치가 워낙 낮으니 그런 자금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고속도로 건설에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도입된 제도가 바로 그린벨트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단적인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린벨트 제도가 도입되면서 개발이 제한된 지역이 생겨났고 그쪽으로 갈 만한 자본이 체비지 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마침 1970년대 중반 중동 붐이 겹치면서 이 체비지들은 모두 팔리게 된다. 이후 그린벨트 제도는 가장 위력적인 환경보호 제도의 하나로 여겨지며 박정희 대통령의 주요 업적으로 언급되곤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고속도로 건설을 떠받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선의로 시작한 정책이 나쁜 결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린벨트의 경우에는 정반대였다고 해야 할까? 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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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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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국도 경제 때문에 우울했던 적 있는데,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저금리 시절 너도 나도 주택 담보 대출받아서 집 샀는데, 금리가 슬금슬금 계속 올라서 결국 원리금 못 갚는 소시민들이 떨어져 나간 것. 그때 주인 잃은 빈집들이 속출했는데, 소설은 그 빈집을 몰래 무단 점거하여 살아가는 네 명 젊은이의 이야기다. 폴 오스터는 누가 봐도 뻥 같지만 강렬한 이야기가 매혹적이었는데, 이 소설은 아무래도 배경이 실존하던 최근의 경제 위기다 보니 이전처럼 알면서 속아주는 느낌은 덜하다. 현실적 우울함이다.

 

소설은 네 명의 젊은이 이야기 말고도 주인공의 부모와 부모 친구까지, 모두의 내면을 한 번씩 훑고 지나간다. 모두가 각자의 죄의식 속에서 살고 있다. 다만 말을 못 할 뿐이다. 경제 위기는 배경일 뿐 진정 우울한 것은 용서를 구할 수도 없고,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는 내면의 수렁이다.

 

주인공 마일즈 헬러는 피가 섞이지 않은 형과 말다툼하던 중 화를 참지 못하고 그를 차도로 밀친다. 그런데 그 순간 코너를 돌아 나온 차가 형을 친다. 형은 죽는다. 이 과실치사 상황에서 마일즈 헬러가 궁금한 건 단 하나뿐이다. 과연 나는 차가 오는 소리를 듣고 형을 민 것인가? 자신을 믿을 수 없는 그는 스스로를 처벌하듯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간다. 부모님은 애타게 그를 찾는다. 7년 만에 아버지를 만난 마일즈 헬러는 자신이 형을 밀쳤다고 아버지에게 고백한다. 자, 우리가 부모라면 마일즈 헬러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형을 밀쳐버린 마일즈 헬러를 평생 미워하며 살 것인가. 마일즈 헬러가 법으로 처벌받지 않았다면 이전처럼 평생 스스로를 처벌하듯 살아야 하는가.

 

죄는 물론 처벌받아야 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던, 예측하지 못 했던 일에 대한 가해자의 죄책감과 피해자의 원한이 영원하다면 모두의 삶은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필립 로스 <네메시스>에선 소아마비 전염에 대한 죄책감에 스스로의 삶을 폐기시킨 남자가 나온다. 장강명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는 죗값을 치르고 조용히 살아가는 남자에게 끝까지 복수하는 아주머니가 나온다. 영원한 죄책감과 원한의 끝은 비극이다.

 

불행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일일 때, 용서와 망각은 아주 어렵다. 그렇기에 용서와 망각의 논리는 절대적으로 피해자 편에서 나와야 한다. 가해자가 스스로 말하는 용서와 망각은 자신만 편하자는 비겁한 논리일 때가 많다. "저는 신에게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같은 말들처럼. 그러므로 용서의 시작은 가해자 스스로 "일어서서 자기 행동에 책임(326)"을 지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때 우리는 아프지만 겨우 합의할 수 있다. 이제 다신 들추지 않고 살아가자고. 소설의 아버지는 말한다. "더 중요한 것은 <용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이다.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용서받아야 한다." 잊는 건 여전히 어렵고 완전히 잊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을 유지시켜줄 때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고통과 슬픔이 누적되어 더 많은 고통과 슬픔을 견디는 능력이 약화된다. 그러나 고통과 슬픔은 피할 수 없기에, 말년에는 아무리 사소한 실수라도 젊은 시절의 큰 비극에 맞먹는 힘으로 울릴 수도 있다. <낙타 등을 부러뜨리는 것은 마지막으로 올린 지푸라기 한 가닥이다.> 다른 여자의 질 속에 들어간 멍청한 페니스가 그 예다. 2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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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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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소설에 수차례 반복되는 문장이다. 1960년대 공산주의 체코에서 주인공은 35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한다. 인류의 정신과 지혜가 축적된 책이 압축되어야 하는 세계는 너무나 비인간적이다. 주인공은 책을 압축할 때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책을 한 권씩 구출해낸다. 소설은 그런 주인공을 통해 진정 인간적인 것에 대해 묻는다.

 

도대체 인간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여러 명이 죽어나가지만 끝내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것?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출하다가 자신도 죽는 것? 교장에 떨어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모두를 살리고 자신이 죽는 것? 분명 숭고한 희생이다. 이건 인간만이,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찌 생각하면 무언가를, 심지어 자신까지 초월한 인류애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나는 그런 결정적 순간에 자신을 내던질 용기가 없다.

 

소설은 거창하지 않은 인간적인 것들을 말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주인공의 젊은 시절 애인은 두 번이나 똥 때문에 (...) 수치를 겪는다. 주인공은 똥 좀 옷에 묻혔다고 애인을 떠나지 않는다. 그건 "인간적인, 지나치게 인간적인 일(44)"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인이 수치심을 못 이기고 주인공을 떠난다. 수치심 또한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니 떠나는 그녀를 어찌 잡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소설 밖 우리도 우습고 별것 아닌, 그래서 몹시 인간적인 이유로 헤어지곤 했다.

 

독백 내내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는 주인공이지만, 우리는 그의 삶이 고통에 휩싸여 있었다는 걸 안다. 그는 왜 사랑했던 집시 여인의 이름을 잊었을까. 그토록 비인간적인 것을 싫어했던 그가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불행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스스로 용서조차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삶을 어떻게 밀고 나갈 수 있을까. 잊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을 때가 있다. 타인에게 베푸는 용서만큼이나 불가항력의 불행에 대한 망각도 인간적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선 고통과 고독 속에서 평생을 살았던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삶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 순간 무언가가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비인간적 세상의 너무나 인간적인 장면이다. 고통 그 자체가 몹시도 인간적이기에 그걸 목도하는 우리는 같이 눈물지을 수밖에. 때때로 고통만이 삶을 증명하는 걸 우리는 안다.

침대에 등을 대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아주 작은 생쥐 한 마리가 내 가슴팍 위로 떨어져 미끄러지듯 달아나 몸을 숨겼다. 내 가방이나 외투 호주머니에 두세 마리가 딸려온 게 틀림없었다. 마당에 변기 냄새가 가득 퍼져 있는 것을 보니 곧 비가 퍼붓겠다 싶었다. 술과 노동으로 멍해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틀 동안 내 지하실을 청소하며 생쥐들을 희생시킨 참이었다. 그저 책이나 갉아먹고 폐지 더미에 뚫린 구멍 속에 살며 그 작은 둥지 안에서 새끼들을 낳고 키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소박한 짐승들인데. 추운 밤이면 내 품안에서 공처럼 웅크렸던 내 어린 집시 여자처럼 몸을 사린 생쥐들이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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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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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엔 oo문학상 수상작품집, 같은 책을 일부러 사서 읽진 않는다. 취향이 생기기 이전엔 컴필레이션 음반이나 아티스트의 베스트앨범을 사다가 취향이 생긴 후엔 아티스트의 정규 앨범만 사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또 하나 사소한 이유는 문학상 작품집에 보통 이미 읽은 소설 몇 편이 포함됐다는 것이다. 이번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도 4편은 이미 읽은 것이었다. 본전 생각하며 책 읽진 않지만 14000원 11편 작품 중에 4편이 읽은 것이라면 어째 아깝다는 느낌이 들긴 한다.

 

이런 이유로 난 취향에 맞는 작가나, 남들이 좋다는 작가 위주로 읽는다. 사실 그것들 읽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 컴필레이션 앨범엔 손이 잘 안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ㅎㅎ. 다만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음으로써 그 시대의 문학 트렌트를 캐치할 수 있고, 취향에 맞는 새로운 작가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한 장점이다. 나도 취향이랄 게 없었던 때가 있었고 2005년 황순원문학상 작품집에서 박민규를 찾은 후에야 한국 문학의 세계로 들어왔다.

 

서구 문학이 홀로코스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장담할 수 없지만 한국 문학도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느낌이 강하다. 소설가가 세월호를 의식하지 않았어도 독자가 문학을 세월호의 알레고리로 읽는 순간은 분명 많을 것이다. 강력한 사회의 부조리와 희생자들 그리고 남은 자들의 죄책감, 소설가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하고 독자는 어떻게 글을 읽어야 할까.

 

대상 수상작 한강의 <눈 한 송이가 녹는동안>은 세월호가 아닌 다른 사건을 말하지만, 남은 자들의 윤리를 말하는 탁월한 작품으로 읽혔다. 자, 임신하면 퇴사해야 하는 회사가 있다. 그 부조리에 항거하던 여자가 있다. 여직원들의 편이었지만 결국 임신할 일이 없으니 남을 사람이고, 그래서 방관자로 비친 남자가 있다. 아이러니하게 부조리에 짓눌린 이들은 결국 서로에게 칼날 같은 말을 남기고 만다. 여자는 결국 패배하듯 이직하고, 남자 또한 이직하여 각자의 세계에서 윤리적 삶을 지키며 살아간다. 둘은 각자의 이유로 젊어서 죽는다.

 

소설의 화자는 이 둘의 갈등을 목격한 사람이자 남은 자다. 화자는 삼국유사 일화를 차용한 희곡을 쓰다 머뭇거린다. 삼국유사 일화는 이렇다. 각각의 두 암자에 사는 스님에게 길 잃은 여자가 찾아가 하룻밤 재워줄 것을 요청하는데 한 명은 유혹이 두려워 거절, 한 명은 여자를 암자로 들인다는 이야기다. 거절한 승려는 친구가 유혹에 넘어갔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욕조와 물이 모두 황금으로 변했고, 친구는 황금 부처로 변했다는 것이다. 여자는 관음보살이었다고.

 

화자는 이걸 그대로 차용해서 희곡을 쓸 수 있을까? 없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에 대한 구원이 이렇게 쉽고 간편하게 찾아오지 않음을 똑똑히 봐왔던 까닭이다. 희곡은 그의 손에서 조금씩 바뀐다. 길 잃은 소녀는 객석을 향해 말한다. "나는 잠을 잘 수 없어요. 당신은 잠들 수 있어요? 잠깐 잠들어도 꿈을 꿔요. 당신은 꿈을 꾸지 않아요? 언제나 같은 꿈이에요. 잃어버린 사람들.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 그러나 화자는 거기서 더 쓸 수 없는데 고통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고통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 무섭도록 생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다. 길 잃은 소녀는 잠들 수 없고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꿈을 꾼다고 당신은 그렇지 않으냐고 묻는데 우리는 어떤가. 사실 잊고 살지 않았는가.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예술 작품은 많다. 그리고 많은 작품이 관객을 자극적인 방법으로 고통의 한가운데 던져 놓길 주저하지 않는다. 고통을 알량하게 경험한 관객은 착각한다. 자기는 이 고통에 공감한다고. 한강은 소설가인 자신도, 읽는 우리도 모두 고통의 바깥에 있는 사람이란 사실을 말한다. 예술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을까? 한강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물으며 소설을 썼을 것이다. 거짓 고통/ 거짓 체험/ 거짓 구원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실재하는 고통을 숙고하며 문학의 구원을 스스로 경계하는 감각, 이 윤리적 거리감각은 무척이나 각별하게 느껴진다.

 

 

2.
세월호 이후 많은 한국 문학은 문학이 고통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수렴하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김애란의 <입동>, 이기호의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은 다르면서도 비슷한 궤로 읽힌다. <입동>의 이웃들은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에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하"다가 이후엔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까" 피하고, 수군거리고, 끔찍한 말을 퍼트리고, 의심하고, 구경한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의 권순찬 씨는 사채업자에게 부조리하게 떼인 칠백만 원을 받기 위해 피켓을 들고 노숙하며 시위한다. 가난한 주민들은 그 사채업자 여기에 없다고, 그의 노모만 있을 뿐이라고, 그를 안타까이 여겨 칠백만 원을 모금해 전달한다. 권순찬 씨는 거절한다.

 

이 이웃들의 모습은 늘 고통의 바깥에 있던 우리 모습이다. 우리는 수군거리거나, 그게 아니라면 섣부른 동정으로 그들을 우리 일상에서 빨리 떼 놓으려 했을 뿐이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비정상을 비정상이라 같이 외치고, 구조적 부조리에 대한 저항에 동참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3.


인상비평

 

늘 유쾌한 소설을 조금은 더 좋아하는 나에겐 김솔의 <피커딜리 서커스 근처>가 재밌었다. 한강 작품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비겁함을 적나라하게 말하는 정소현 <어제의 일들> 또한 무척 좋았다. 조해진 <사물과의 작별>은 누구나 있을 법한 인생의 조각들을 좋은 문장으로 엮어낸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다. 손보미 <임시교사>는 이미 2년 전에 읽은 것인데, 한국 문학 올스타 총출동했던 문학동네 20주년 81호 계간지에서였다. 김훈, 김연수, 천명관, 박민규, 은희경, 성석제...... 그중에서도 빛나는 단편 중 하나였다. 말 다했다.

 

알라딘 서재의 누군가는 황정은의 최근 소설집 <아무도 아닌>을 두고 이전엔 징징대지 않았는데 이번 소설집은 유독 징징댄다고 말했다. 그의 7년 전 작품을 읽어보니 그 말 뜻을 알겠다. <웃는 남자>는 <아무도 아닌>에 수록되어 있던 단편인데, 소설집 내 거의 모든 작품이 그러했 듯 폭발 직전의 분노를 포함하고 있었다. 김애란은 여전히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의 디테일을 잘 잡아내고 소설도 잘 쓰지만 더 이상 생기발랄하지 않다. 해학의 대가 이기호는 웃지 않는다. 황정은은 폭발 직전이다. 이런 것들이 아슬아슬하게 읽혀서 가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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