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하여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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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책이다. 지금처럼 카메라가 완전히 대중에게 보급되진 않았고, 여유 좀 있는 사람들이 카메라 장만해 여행 사진을 찍던 때였다. 사진은 회화와 비교할 수 없게 사실적이고 생생하여 발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널리즘, 예술, 일상까지 그 위력을 전방위적으로 발휘했다. 40년 지난 지금은 스마트폰 시대니 그야말로 1인 1카메라 시대다. 그만큼 사진의 위상은 더 높아졌다. 사진의 현재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신문을 비롯한 그 어떤 매체도 아니다. 바로 전 세계 7억 명이 사용하는 인스타그램이다. 이곳에선 누구나, 무엇이든 찍어서 전 세계 사람에게 쉽게 전시할 수 있다. "잠깐만, 먹지 마. 아직 사진 안 찍었단 말이야." "정말 예뻤는데 아깝게 사진을 못 찍었어." 이제 사진 없는 일상은 상상할 수 없다. 에밀 졸라는 인스타그램 모르고 죽었겠지만 이렇게 말했다. "어떤 대상을 사진으로 찍어보기 전에는 그 대상을 진정으로 봤다고 말할 수 없다."

 

사진은 전통적인 회화로부터 기록 수단, 예술로서의 지분을 상당히 뺏어오는데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회화는 그리는데 숙련도와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고, 모더니즘 회화 정도 되면 감상하는 데에도 최소한의 예술적 교양이 필요하다. 반면 사진은 기계가 몇 초면 찍어준다. 게다가 사실성은 비교도 안 된다 (그러나 사진의 이런 극단적 사실성이 회화를 사실적 묘사의 강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누구나' 찍을 수 있는 사진은 '무엇이든' 찍기 때문에도 승승장구했다. 사진은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미지는 무엇인가를 선택해야만 했던 (화가의) 편협함에서 벗어났(134)"기 때문이다. 손택에 따르면 엘리트주의적 순수 예술은 진품과 모조품, 원본과 복제물, 좋은 취향과 나쁜 취향이라는 구분에 의존하는가 하면 특정한 경험이나 피사체에 의미가 있다고 가정한다. 반면 미디어 예술은 민주적이다. 세계 전체가 재료가 된다. 그리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미술은 가치 있는 피사체를 선택해야 하지만, 미디어 예술에 가치 있는 피사체라는 것은 없다. 찍고 또 찍고 그저 선택만 하면 되니까. 사진을 통해서라면 가난하고 지저분한 일상까지 파토스로 느끼게 된다. 이처럼 사진은 "예술이 아니라 예술의 주제[혹은 피사체]가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191)" 말한다.

 

그러나 여기엔 못내 찝찝한 구석이 있다. 사진의 강력한 장점인 리얼리즘이 우리 세상의 실재the real와 진정 같을지는 의문이므로. 저자는 사진조차도 "예술과 진실 사이에서 흔히 발생하는 수상쩍은 거래(23)"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말한다. 사진도 회화나 데생처럼 이 세계를 해석하기는 마찬가지라고. 쉬운 예부터 생각해보면 이렇다. 카메라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우포늪의 사진엔 거의 항상 조그만 나무배 위에서 노를 젓는 뱃사공이 있다. 사진사들에게 고용된 어부다. 극도의 사실성이 은폐한 조작된 현실일 것이다.

 

한편, 리얼리즘과 현실의 괴리를 감각의 층위에서 생각할 수도 있다. 가령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휴머니즘 같은 주제의 사진들. 따로 특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인간의 고통을 소재로 삼은 숭고한 사진은 많다. 그러나 사진은 "미학적 경향 [피사체를 미화하는 경향] 탓에, 세상의 고통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사진은 그 고통을 중화"시키며, "경험을 축소하고 역사를 구경거리로 변질"시키고, "연민을 자아내는 것만큼 연민을 없애고 감정을 떼어낸다.(164)" 수단 소녀와 독수리, 시리아 난민 꼬마의 죽음,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 같은 장면은 분명 고통스럽다. 그러나 사진 그 자체로 평가했을 때 그 고통 이면엔 부인하기 어려운 교묘한 미감 같은 게 있다. 이처럼 사진엔 고통받는 피사체조차 미화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위험이 있다. 이는 그의 다른 책 <타인의 고통>의 메시지와 상통한다. 박제된 타인의 고통에서 우리가 숭고함이나 우아한 연민 같은 것을 느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람자의 숭고한 감정과 사진 너머 현실 속 피사체의 고통 사이는 너무나 멀다. 그래서 고통의 관람자에겐 정치의식이 필요하다.

 

한편 사진이 사실을 배반하지 않지만 괴리감을 일으킬 때도 있다. 바로 나의 리얼리즘이 아닐 때다. 사진 속 타인의 리얼리즘이 내 현실을 침범하는 것이다. 이전엔 전시회나 잡지에서나 그런 감각을 느꼈지만, 지금은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모두가 다른 모두의 리얼리즘에 고통받는다. 며칠 전 어느 기사에선 사용자 정신건강에 최악인 SNS가 바로 인스타그램이라고 했다. 아무리 글로 나 근사한 걸 먹었네, 돈이 많네, 좋은 곳을 다녀왔네, 써도 딱히 실감을 불러오진 않는다. 그저 사진 한 장이면 충분하다. 파리의 우아한 거리에서 비싼 핸드백 든 사진 한 장이면 타인의 현실감각을 공격하기 딱 좋다. 수전 손택 역시 인스타그램 모르고 죽었겠지만, 하여간 이렇게 말했다. 사진이 "이미지와 현실의 틈을 훨씬 더 크게 갈라놓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고 "사진을 경유해 신비롭게 얻게 된 지식(또는 현실의 고양) 탓에 사람들이 각자 이미 현실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믿거나 현실의 가치를 격하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틈 안에서(180)"라고.

 

70년대 책이지만 수전 손택이 말하는 사진의 윤리학, 현상학이 현시대의 사진 기반 미니멀리즘 SNS의 흥행과 어떤 식으로 맞물리는지 생각하며 읽으면 (생각보다) 재밌다. 이 책 읽으면 꼭 사진이 현실을 배반하는 나쁜 무언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령 마지막 페이지에서 저자는 못 박듯이 이렇게 말한다. "카메라는 일종의 약이자 병이며, 현실을 전유하고 쓸모없게 만들어 버리는 수단(255)"이기도 하다고. 이미지가 끝없이 범람하고 소비되는 현 세태에서 이런 피로감에 대한 지적은 적확할 것이다. 그러나 항상 엄격한 윤리 감각으로만 살아갈 순 없다. 그게 더 피곤하니까. 저자는 이렇게도 말했다. "삶에서는 모든 순간이 중요하거나, 빛을 발하거나, 영원히 고정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진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한다.(126)" 저자는 사진이 현실세계와 부정확한 관계를 맺는다는 맥락에서 말했지만, 나는 이 문장을 긍정적으로 읽고 싶다. 추억은 인간 삶의 중요한 동력이고, 무엇보다 추억을 잘 매개하는 건 사진이니까. 적당한 윤리 감각과 자존감으로 음식 사진이나 셀카 찍으며 재밌게 놀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럼 다들 즐거운 인스타 라이프. 

사진은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사진이 재현해 놓은 현실은 그 사진에 충실해지기 위해서 면밀히 검토되고 평가된 현실이다. 1901년, 15년 경력의 아마추어 사진작가이기도 했던 자연주의 문학의 주창자 에밀 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대상을 사진으로 찍어보기 전에는 그 대상을 진정으로 봤다고 말할 수 없다." 사진은 현실의 단순한 기록이기보다는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사진은 현실, 더 나아가서 리얼리즘의 개념 자체까지 뒤바꿔버렸다. 1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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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지음, 김한영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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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봐도 작가가 무슨 말하려는지 대충 감은 온다. 연애는 낭만적이지만 그 후의 일상, 결혼은 낭만적이지 않은 현실이라는 말이다. 이걸 누가 모르나. 그러나 정확히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서 낭만적 관계가 지긋지긋한 일상이 되는지 고찰해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대개의 소설이나 영화는 그들이 어떤 역경을 딛고 관계에 성공하게 되는지에만 집중하지 그 후의 일상은 말하지 않으니까.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정말 그럴까. 미녀와 야수는 그 후로 정말 행복하게만 살았을까? 성격 차이, 육아 문제, 구질구질한 개인사, 그도 아니라면 외도같은 문제는 전혀 없었을까?

 

통상 말하는 결혼 적령기(란 게 있나요)에 속하는 나이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연애는 몇 번 했지만 그때마다 구질구질하게 헤어졌다. <500일의 썸머>의 톰은 썸머 목의 반점을 두고 처음엔 하트 모양이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선 바퀴벌레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감정의 변화는 호르몬 변화로 설명된다. 이건 과학이다. 낭만적 사랑이 식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번번이 그런 시간 앞에서 물러났던 것 같고.

 

완벽히 같은 사람은 없고, 사람이 변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평생을 같이 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성숙하고 장점 많았던 그/녀가 이기적이고 단점 많은 그/녀로 보일 텐데 말이다. 해법이 궁금하다면 이 소설을 읽어봐도 좋다. 좋게 말하면 현실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너무 교훈적이라 재미가 있진 않았다. 낭만적 사랑 - 힘든 일상 - 권태 - 외도의 순서를 거치는 그들 부부가 어떻게 될지를 지켜보며 사랑의 규칙을 되새겨보는 것은 좋지만 어쩔 수 없이 내 실패를 반추해보게 되니 씁쓸할 수밖에.

 

너무 많이 체크해서 그가 말하는 사랑의 법칙을 전부 옮길 순 없다. 가장 핵심적인, 뻔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말만 옮겨본다. "따라서 결혼할 사람을 선택하기란 감정의 존재 법칙을 우회할 방법을 찾았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고통을 흔쾌히 견딜지 결정하는 일이다. 아니면 우리는 모두 당연히 악몽의 전형인 '엉뚱한 사람'을 곁에 두게 된다. 279p"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283p" 그러니까, 평생 같이 할 사람과 어떻게 같이 행복할지를 상상하지 말고 어떻게 고통을 분담하고 합의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라는 말 되겠다. 그러면 치명적인 실수도 줄어들 거란 말.

 

보통도 직접 이야기하지 않은 게 있는데 결혼과 그 후의 일상에 미치는 현실 조건의 영향이다. 행복과 불행을 떠나서 일상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면 갈등 소지가 분명 줄어드는 게 사실이다. 배우자 월 소득이 얼마 이상이면 이혼율이 현저히 낮다는 기사를 봤다. 사람들이 속물이라 그런 게 아니라 결혼 이후엔 사랑보다 삶을 영위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소설의 남자가 좀 더 능력 있었다면, 그들이 좀 더 넉넉한 형편으로 시작했더라면 어땠을까. 결혼 전 숙고해야 할 불편한 진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혼하신 분들 존경합니다. 

여러 해가 지나고 또 여러 편의 사랑에 관한 에세이를 접한 후에야 라비는 몇몇 다른 결론에 도달하고, 한때 그가 낭만이라 보았던 것ㅡ무언의 직관, 순간적인 갈망, 영혼의 짝에 대한 믿음ㅡ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배워가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을 유발했던 신비한 열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유효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관계에 처음 빠져들게 한 감정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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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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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었을 때 딱 편혜영 소설이다 싶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쯤에 있는 그로테스크한 설정, 더럽고 축축한 것의 적나라한 묘사, 배경에 깔린 불안한 정서. 편혜영 좋아한다고 선뜻 말은 안 하지만 싫어하지도 않는데... 이번 소설은 솔직히 별로였다고 말해야겠다. 일단 작가가 그려낸 디스토피아가 너무 현실성 없다. 도시 전체가 쓰레기로 뒤덮이고 시체와 병자의 산 몸이 불타오르고. 끔찍하지만 그대로 받아들여 상상하긴 어렵다. 그런데 그 디스토피아가 어느샌가 멀쩡히 회복되어 버리는데, 이해 안 된다. 그 정도 자정 능력을 갖춘 나라였다면 애당초 전염병으로 인한 디스토피아적 환경이 생겨나지도 않았겠지. 

 

신형철 선생 말마따나 독후의 감을 말하는 데 작품 허물의 기소에 집중하는 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 이쯤 하고 복기할 만한 지점만 생각해보려 한다. 소설의 초점 화자인 '그'는 현실 도피하듯 외국 파견 근무를 떠났는데 그곳에서도 또다시 현실을 피해 도망쳐야 한다. 전처는 죽었고, 자신은 용의자로 몰리고, 수사를 피해 도피한 현실은 더러운 시궁이다. 그 속에서 그야말로 쥐처럼 살아가는 그는 원래 쥐를 잘 잡는다는 이유로 해외 본사로 파견됐었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버려지고 상한 음식을 찾아먹고, 아무 곳에서나 배설하고, 당연히 씻지도 못하고. 자신이 잘 잡던 쥐보다 별달리 나아보이지도 않는 그가 하수도에서 쥐를 다시 맞닥뜨렸을 땐? 역시 잡을 수밖에. "처음에는 자신이 쥐와 같은 처지라는 게 무서웠고 나중에는 쥐를 잡을 때에만 쥐와 같은 처지가 아니라는 안도를 느끼"기 때문이다. 달리 쥐와 쥐처럼 더러워진 인간으로 한정하지 않아도 이런 역학 관계는 일반적이다. 같은 환경의 타인을 억압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안겨줄 때 맞이하는 우월감과 안도감이 있다. 이런 이유로 같은 곳에 있어도 인간들이 저마다 느끼는 고통의 층위와 정도는 모두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타인에게 느끼는 우월감과 안도감이 인간 악의 근원일 수도 있다. 나는 쥐인가 아니면 쥐를 잡으며 나는 그래도 다르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쥐 같은 인간인가?

 

편혜영 데뷔 단편집 <아오이 가든>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한 장편 소설이었다. 편혜영 소설을 읽으며 섬뜩함과 불쾌함 자체를 문장으로 즐겨보라는 어떤 평론을 본 것 같기도 하다. 그 말대로 섬뜩함과 불쾌함 자체는 즐길 수 있는데 그것으로 그친다면 소설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재와 빨강, 조금 아쉽다. 쥐어짜내며 의미 찾아내기 힘들다. 감기에도 걸렸거니와, 감기약의 진정 효과가 세서 영 퉁명스럽게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자가 처방한 약인데!) 다행히 이 소설은 편혜영의 2010년 작품이다. 요즘 그의 소설은 이보다 더 재밌고 생각할 거리도 많다. 그러므로 이 작품만 놓고 작가에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한국 문단에 이만한 스타일리스트는 드물기도 하고.

"나는 연민은 있어도 관용은 없는 사람이야. 불쌍한 사람은 봐줘도 어리석은 사람은 못 봐주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거든. 어리석어서 상황을 이해 못하는 건데 사람들은 선하거나 순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일을 망치는 건 결국 그런 사람들이야. 설마 퍼스트클래스 뭐 이런 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1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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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와 문명 - 1300~1700년, 유럽의 시계는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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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시계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서 특별한 기술의 상징도 되지 못한다. 시계 아니더라도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는 많다. 티브이나 컴퓨터, 스마트폰을 틀면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기계식 시계보다 정확한 위성 시간을 알려준다. 알람까지도 스마트폰이 담당하니 시계가 설자리는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그나마 사무실이나 대합실의 벽시계 정도가 실용성을 유지하고 있고, 손목시계는 일종의 액세서리처럼 되어버린 상황이다. 시간만 확인하려는 용도라면 돌핀 전자시계로도 충분하다.


그렇지만 산업혁명 이전엔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는 것조차 어려웠으니 시계는 분명 정밀 기계 기술의 극치였다. "시계 제작은 물리학과 역학의 이론적 발견이 실용화된 최초의 산업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응용역학의 전반적 발달에서 첨단을 달리며 과학 기구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90p)"


책의 부제는 <1300~1700년 유럽의 시계는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다. 르네상스 이전 중세 시대엔 유럽보단 이슬람 문명과 중국이 경제와 기술 모두 유럽에 앞섰다. 심지어 무역에서도 유럽은 동양에 팔 것이 없었다고 한다. 책은 말한다. "우리는 산업혁명 이후 기술과 과학에서 서양의 우위를 너무도 당연하게 여긴 나머지, 동양은 내놓을 원자재와 상품이 많았던 반면 서양은 아시아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상품을 거의 내놓지 못했던 상황을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119p)"


그럼 서양 코쟁이들이 뭘 팔 수 있었느냐, 바로 기계식 시계라 이거다. 1090년 송나라 과학자 소송이 꽤 정확한 물시계를 만든 적 있었는데, 새 황제가 즉위하면서 그 시계를 폐기했고 무려 5세기 동안이나 시계의 존재가 잊혔다고 한다. 그러므로 훗날 예수쟁이 선교사들이 시계를 건넸을 때 중국 사람들이 환장한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생각해볼 문제가 생긴다. 첫째, 왜 유럽은 시계 같은 정밀 기계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동양은 그러지 못했나. 둘째, 왜 중국은 시계를 접한 이후로도 그 정밀 기계 기술을 자신들 것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나.


저자는 유럽 수공업자 집단의 지위/경제력 상승을 중요한 요인으로 말한다. 수공업자들이 길드를 형성했고, 그 길드가 기존의 제국이나 왕국, 봉건영주로부터 사법적 지위를 요구해 인정을 받았다. "주변의 봉건 세계에 대한 자유민들의 연합체의 승리(27p)" 부터 서유럽 역사의 변화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런 수공업자 집단은 중세 도시 환경에서 우세했던 실용성과 실리주의 정서와 더불어 성장한다.


게다가 동시대 비잔티움이나 이슬람 중동은 수공업자의 솜씨를 오락거리나 극적 장관 정도로 소비했던 반면, 중세 유럽에서는 갈수록 수가 늘어나던 수공업자들이 기술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응용역학에 관심을 갖고 이를 추구했다고 하니 기술 격차가 점점 벌어졌음은 당연하다.


중국의 경우엔 시계는 차치하고 먼저 발명한 인쇄술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이렇다. "17세기 초가 되자 중국 인구 대다수는 여전히 문맹인 반면 유럽의 문자 해득률은 괄목한 만한 진전을 보였다. (50p)" 혁신이 사회문화적 성격에 제한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명대 중국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 체계는 수공업자를 억압하고 응용과학과 과학기술의 진보를 방해했다. (148p)"


마지막 질문. 서양은 실용성과 실리주의를 추구했는데, 왜 중국은 그러지 못했나.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 것 아니겠나. 조선의 실패도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는지라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바랐는데, 책엔 시원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냥 그 나라 사회 분위기가 그랬고, 국민성이 그래서 그랬다는 식이다. 가령 "에스파냐 사람들이 본래 기술과 기예에 관심이 없어서 (41p)" 빈곤이 만연하게 됐다는 평가에 동의한다는 저자의 말이 그렇다. 이런, 사농공상 공맹퇴율 읊다가 일제에 나라까지 빼앗겨버린 한국인 입장에서는 "너희 사회와 국민성이 원래 그러니까 그리 된 거야"라는 식의 설명은 조금 억울하다. 차라리 제래드 다이아몬드처럼 이것저것 이유를 분석해서 "얘네는 지리적으로 안 될 수밖에 없었어"라는 식으로 설명해주면 위안이 될 텐데 말이다. 그러나 종반부 저자 의견은 역사 해석의 정당성을 다시 고민하게 만든다. "왜 중국이 성공하지 못했는가"라고 질문할 때 우리는 암암리에 비중국적인 조건에서 중국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승자 입장에서 패배자의 패배 원인을 조목조목 써 내려가기란 참 쉽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패배자의 조건을 고려한 분석은 아니라는 것이다. 속 시원한 분석은 없었지만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다고 설명하는 겸허한 역사 해석의 자세가 바람직해 보인다.


혁신도 중요하지만 혁신 이후를 결정짓는 건 사회 문화적 분위기에 달려있다는 결론을 개인 차원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시대에 어떤 직업이든 얼리 어답터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긴 할 테다. 민초들이 말 많은 인공지능 시대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준비할 게 무엇일까. 언뜻 생각해선 답 안 나오긴 한다. 인공지능에 밀리지 않는 전문기술? 자본금? 돈 없으면 그냥 시류에 휩쓸리기만 할 것 같다는 우울한 결론만 떠오른다.

도시에서는 낙관주의가 우세했고, 이는 개혁을 향한 일반적인 열망과 상호 협동을 위한 진정한 욕구를 키웠다. 개혁에 대한 열망은 당시 팽배한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종교적 색채를 띤 반면, 상호 협동 욕구는 대체로 사회정치적 수준에서 작동했다. 길드가 성장했고 길드 위로는 더 큰 형태의 연합체ㅡ자치도시가 발전했다. 이러한 연합체들은 기존의 제국이나 왕국, 봉건영주로부터 사법적 지위를 요구해 인정을 받는 데 성공했으며 평화적으로 혹은 폭력적 수단을 통해 독립적인 사법적 권한을 획득했다. 주변의 봉건 세계에 대한 자유민들의 연합체의 승리는 서유럽 역사에서 진정한 전환점이었다. 그 후로 일어난 일은 모두 이 중대한 변화의 논리적 귀결이었을 뿐이다. 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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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추방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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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포스팅 거의 하지 않지만 따봉은 비교적 열심히 누르고 다닌다. SNS는 인생의 낭비,라는 말에 상당히 동의하지만 잘 사용한다면 나름대로 SNS로 얻는 것도 많다. 10년 전만 해도 잡지, 신문에서나 볼 수 있던 양질의 글을 요즘엔 어렵지 않게 SNS로 받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고력과 글솜씨 뛰어난 일반인이 바로 작가가 되는 시대라 팔로잉 설정만 잘하면 허튼 피드 없이 유익한 정보를 신문 보듯 받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뉴스피드를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의 글로 채운다는 건 결국 취사된 입장의 의견만 접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페이스북엔 '차단' 기능도 있다. 이것은 뉴스피드를 좀 더 정교하고 편협하게 다듬는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현 사회가 부정성의 과잉이 아닌 긍정성 과잉 상태가 병리적 상태를 빚는 '자기 착취'의 사회라고 진단했다. <타자의 추방> 역시 긍정성 과잉을 지적한다. 차이는 <피로사회>는 성과 주체 자신의 긍정 과잉을 문제로 삼고, <타자의 추방>은 주체를 둘러싼 타인의 긍정성 과잉을 문제로 삼는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타자의 부정성은 같은 것의 긍정성에 밀려나고 있다."

 

그렇게 소통을 중요시하는 SNS 시대에 이 무슨 말인가. "전면적인 디지털 네트워크와 소통은 타자와의 만남을 쉽게 해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히려 낯선 자와 타자를 지나쳐 같은 자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발견하도록 하고, 우리의 경험 지평이 갈수록 좁아지게 만든다. (...) 경험의 본질은 고통이다. 그러나 같은 것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오늘날 고통은 같은 것을 지속시키는 '좋아요'에 밀려난다. (10-11p)"

 

내가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글들은 내가 선택한 나와 '같은 것'들이다. 꼭 차단 기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더라도 이미 SNS의 영리한 알고리즘은 내 '좋아요'와 '팔로잉'을 기반으로 하여 내 취향에 맞는 피드만 내놓는다. 당장 자신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추천 피드를 살펴보면 안다.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인을 후원하는 단체가 추천 그룹으로 떠있다거나, 평소 좋아하던 몸짱 여인들의 몸매 사진이 추천 피드에 떠있을 것이다 (ㅎㅎ).

 

어쨌거나 이런 같은 것들의 창궐은 저자의 말대로 '긍정성의 지옥'이다. <피로사회>와 마찬가지로 '부정성' 자체가 꼭 나쁘지 않다는 전제에서 이런 주장이 가능하다. "균열과 고통의 부정성만이 정신을 생생하게 유지해준다. (50p)" "반대의 부재는 자기침식을 낳는다. (68p)"

 

현시대는 다양성의 시대가 아니라 '소비할 수 있게 만든 다름'인 '잡다함'의 시대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는 나르시시즘적 주체다. 우리는 우리가 취사선택한 타자들의 내부로 들어가 에고를 확인하려고 한다. 우리는 SNS에서 취사하여 다듬은 사유가 '같은 것을 지속시키는 긍정적 조작(89p)'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서로 소통하고 타자를 이해한다는, (자신조차 깨닫지 못하는) 기만적 소통의 시대에서 진짜 타자는 추방되어버렸다. 저자는 이 논리를 밀고 나가 시대의 궁극적 문제를 지적한다. 타자를 경청하지 않는 시대에서 고통은 전적으로 사유화된다는 것이다. 고통의 사회성이 간과되는 사회에서 우리의 고통은 누구에게서도 위로받을 수 없을 것이다.  

 

늘 그렇듯 현학적이고 매끄러운 철학자의 논리지만,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경청해야 할 타자를 어디까지 설정해야 하는가. 예를 들어 지금의 세월호를 이용하고 조롱하는 타자들을 생각해보자. 3년이 지나 세월호가 뭍으로 나온 지금 어느 사람은 세월호 침몰 음모론을 어떤 책임감도 없이 끊임없이 주창한다. 어느 사람은 오뎅 리본 사진을 찍어 올린다. 솔직히 난 둘 다 혐오스럽다. 그런 인간성들이 탐구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이해나 경청의 대상이 되기는 끝까지 어렵다고 느낀다. 이 경우엔 타자로부터 자아를 지켜야 정신건강이 유지될 것 아닌가. 역시 이론과 실제는 완벽히 부합하지 않는다. 

셀카 중독도 자기애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셀카 중독은 고립된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공회전일 뿐이다. 내면의 공허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자신을 생산하려고 헛되이 노력한다. 그러나 공허만 재생산된다.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다. 셀카 중독은 공허감을 강화한다. 자기애가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자기관계가 셀카 중독을 낳는다. 셀카는 텅 빈, 불안한 자아의 매끄러운 표면이다. 고통스런 공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오늘날 면도날을 들거나 스마트폰을 쥔다. 셀카는 공허한 자아를 잠시 동안 은폐하는 매끄러운 표면이다. 그러나 셀카를 뒤집으면 피가 흐르는 상처들로 가득한 뒷면을 보게 된다. 셀카의 뒷면은 상처들이다. 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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