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낚시통신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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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 첫 단편소설집. 이젠 시의성이 그다지 없지만, 당시엔 센세이셔널 했다고. 기실 90년대 중반은 세계와 투쟁할 필요가 없던 시대였으니 세계와 분리된 듯한 윤대녕 소설이 주목받은 것은 당연하다.

 

많은 평론가와 독자가 읽고 해석했듯 소설은 개인의 근원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평론가 남진우가 멋들어지게 요약해낸 주제 의식은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 작가도 자신이 천착하는 주제를 여섯 글자로 슬쩍 흘려놨다. "근원결락강박 (223)"

 

평론가, 독자 모두 거의 같은 해석을 내놓고 작가도 동의하는 주제의식을 내가 한 번 더 해석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어떤 인간은 왜 은어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보는 건 여전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넌 왜 그렇게 사니?" 이런 존재론적인 질문(ㅎㅎ)에 대답은 저마다 다를 테니까.

 

소설의 중요한 모티프인 은어는 강에서 나고, 바다에서 성체 시기를 보냈다가, 다시 강으로 거슬러 올라와 산란하고 죽는다. 인간도 자신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가? 그렇다면 왜 그런가. 딱 집어 말할 순 없지만 과거에 묶어놨던 진짜 나를 찾아가든, 어딘가에 잠재된 나를 찾아가든, 모든 여정은 현실의 불만족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짐짓 만족스러워 보이는 지금 삶이 실은 진짜가 아니었다, 라는 차원보다 아예 현실 자체가 불만족스럽기 때문에 나를 찾아야 한다고 허둥대는 것이겠지. 윤대녕 소설 속 인물들은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먹물들이다. 지성과 자의식은 날카로운데, 생활은 그럭저럭이라고 하면 될까. 세상 탓을 하기엔 민주화도 됐고, 경제는 쭉쭉 발전하고. 뭔가 내 자리는 없는데 투쟁할 대상은 없다. 그렇다면 개인은 혐의를 자신에게서 찾을 수밖에, 라고 2017년의 독자는 현실적으로 삐딱하게 이야기를 읽었다.

 

현실이 불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내 심성이 왜 이리 글러먹었을까, 라는 생각이 종종 들어 근원을 생각해볼 때가 있긴 하다. 현실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진 못하니 잠자리에서 잠 헤쳐가며 그런 생각들을 하는 것이다. 내 근원을 결락시킨 것은 무엇일까. 그때마다 가정사와 트라우마 같은 것들에서 혐의를 찾긴 한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다들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은어는 강으로 거슬러올라가 결국 그곳에서 죽는데, 인간은 그럴 수 없다. 어찌 됐든 불만족스럽고, 무언가가 결락된 현실에서 다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의 회귀는 은어처럼 죽음을 위한 것이 아니고 회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죽음 충동은 소설과 영화로만 느끼고 다시 현실로 복귀하면 된다. 그것이 예술이 주는 위로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회복을 위한 회귀 행위로, 삼국지5 (KOEI, 1996)를 며칠 동안 재밌게 했다. 음, 써놓고 보니 개뻘소리 서평이네.

귀소하고 싶어요. 목숨을 걸고!
영원회귀? 좋지, 거기서 우리는 죽고 우리의 아들딸들이 되어 다시 태어나는 거야!
그러고 나서 우리는 쉼 없이 술잔을 들었다 놨다 하며 또 은어 얘기를 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시간의 쓰레기를 게워내면서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 우리는 모든 걸 뒤에 두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덧 거슬러오르고 있다. 우리의 경과가 시작된 곳으로, 부활하기 위해, 지금 수만의 은어떼들이 나와 함께 강물을 거슬러오르고 있다. 그래, 우리는 다시 무언가가 되고 싶다. 그리하여 뒤로 가기 위해, 끊임없이 벗어던지기 위해 정든 너를 처단하기도 한다. 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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