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던 김연수가 뻔하게 읽히니 이 책이 별로거나 마음이 피폐해졌거나, 둘 중 하나다. 김연수는 달리기로 인생을 대유하며 말한다.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누구를 항상 이겨야 하고 이기지 못할 때는 괴롭지만, 오로지 자신만을 상대하며 나아가는 과정은 괴롭지 않다는 말이다. 아, 좋은 말이다. 나도 알긴 아는데 인생은 꼭 눈에 보이는 경쟁만으로 이뤄지지도 않는다는 게 문제다. 모든 일이 암묵적인 경쟁이라 꼭 자기를 극복하는 달리기처럼 살 수는 없다. 결국 누군가보다는 영어를 잘해야 하고, 누군가보다는 말을 잘해야 하고, 누군가보다는 음식을 잘 만들어야 하고, 누군가보다는 소설을 잘 써야 한다. 그래야 여유롭게 달리기도 할 수 있다. 아, 제길. 난 너무 찌들었다.

그래도 늘 달려야 결국 마라톤도 완주할 수 있다는 루틴의 중요성에는 공감했다. 수학 정석을 늘 두 시간씩 풀었던 루틴은 경쟁자들보다 더 나아가기 위한 루틴이었으니 행복할 리 없었지만 그 꾸준함이 없었다면 근의 공식도 모르던 내가 수능 수학 만점 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자랑 ㅎ). 경쟁이 아닌 루틴은 그래도 즐거운 편이다. 별일 없으면 하는 달리기 하루 한 시간, 독서 하루 한두 시간 정도가 지금 나를 채우는 루틴이다. 특히 일 년 전부터 시작했던 러닝은 자전거 타기에 비해 장점이 많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자전거 타기는 복장과 장비를 갖추는데 시간이 걸려 최소 3시간 이상은 타야 아깝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지 않으면 밤에 타긴 어렵다. 루틴으로 하기엔 왠지 어렵다. 그러나 러닝은 러닝화 하나만 있으면 된다. 겨울이면 타이즈 정도 추가. 한 시간이면 운동 효과는 충분하니 시간 뺏기는 느낌도 덜하다. 약속 있는 날 아침 자전거를 타긴 빡세지만 러닝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러닝 꾸준히 했더니 체력 검정도 특급 나오고, 술 자주 마셔도 살 별로 안 찐다 (자랑2 ㅎ).

그러나 생각해보면 나 또한 이제 직업은 다 결정됐으니 한가롭게 러닝하고 책 읽는 루틴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 결국 이기기 위한 루틴이 지지 않는다는 루틴에 선행할 수밖에 없다. 아, 정말 나는 찌들어버렸다. 김연수의 낭만적인 문장들을 읽고 이런 생각밖에 못하다니.

어쨌거나 일단 계속 쓰고 썼더니 작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김연수 아니더라도 수많은 작가가 이미 말하고 또 말한 인생의 진리같은 것이다. 동의한다. 비단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그렇겠지. 진정 원하는 일이 루틴이 되어도 여전히 즐겁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먹고 사는 루틴도 빠듯한 사람들에게 지지 않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겠지. 아, 또 이야기가 샌다. 난 이미 너무 삐뚤어져 버렸다. 완전 망한 독서다.

왜 제목이 고문일까? 고문하는 사람들은 육신을 가진 자들이라면 결국 변심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은 바뀌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고 남는 찌꺼기 같은 게 있다. 그 찌꺼기 가은 게 고통으로 변심한 자들을 구원한다. 구원은 굴하지 않는 강청같은 인간의 마음이 하는 게 아니다. 인간들이 모두 변하고 난 뒤에도 찌꺼기처럼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얼룩 같은 게 우리를 구원한다. 그걸 일러 영혼이라 할지도 모른다. 2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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