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의 탄생
이언 모리스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인류의 의식은 시간이 지나며 성숙해졌다. 노예가 해방되고 여성에겐 참정권이 주어졌다. 절대다수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다. 실제는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관념상으론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 지금은 이것들이 당연하지만 수백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인류의 가치관은 변했다. 그렇다면 인류의 가치관은 어떻게 탄생하고 변했을까.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인권이라는 개념이 이전엔 없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원래 존재하던 개념이 억눌렸다가 사회 변화 기류를 따라 발현됐을까? 저자는 이런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시대의 필요가 생각을 정한다."

 

저자는 유물론적 이론을 제시한다. "에너지 획득 방식이 인구 규모와 밀도를 결정했고, 이것이 특정 사회 체제에 상대적 유용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다시 이것이 특정 가치관에 경쟁력과 비교우위를 주었다. (205)" 설명하자면 이렇다. 수렵채집인들은 정치적·경제적으로는 비교적 평등한 생활을 했고 정조 관념엔 상대적으로 무심했다. 폭력에는 관대했다. 1인당 획득 열량이 더 많은 농경인들은 반대였다. 정치적·경제적·성별 위계를 전반적으로 합당하게 여겼다. 정조 관념에 엄격했다. 폭력에 대한 허용치는 낮았다. 수렵채집인의 폭력에 대한 관념은 원시적이었지만 정치·경제·성에 대한 관념은 진보적이었던 걸까? 아니다. 저자는 그 시대에 적합한 가치관이 선택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동 생활하는 수렵채집인에겐 상속할 수 있는 재산이 없다. 반면 정착 생활하는 농경민에겐 물질적 재산이 있다. 물려줄 재산이 있다 보니 물려받을 아이도 자기 자식이 맞는다는 걸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농경민들에겐 노동생산성 증대가 관건이었고 남자의 강한 상체 근력이 농사일에 중요해져 바깥일은 남자의 일이 된다. 농경민의 아내는 여성 수렵채집인보다 아이를 훨씬 많이 낳았다. 대체로 일곱 명 정도였다. 성년의 대부분을 임신, 수유, 육아에 매달려야 했다. 이런 점들이 남녀 간의 노동 분업과 위계를 정당화했다. 즉, 농경사회에선 가부장제가 노동 조직화에 가장 효율적이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화석연료 시대와 농경 시대의 가치관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흔히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가부장적/전근대적 가치관은 화석연료 사회에서 퇴출된다. 화석연료 이용자는 정치적 위계와 성별 위계를 나쁘게 보고, 특히 폭력을 죄악시한다. 경제적 위계에 대해서는 수렵채집인보다는 긍정적이고 농경민보다는 부정적으로 본다. 이 역시 인간의 의식이 진보했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의 필요성에 의해 가치관이 선택된 결과다. 유아생존율의 향상, 기술의 진보는 여성을 집 밖으로 자연스럽게 불러냈다. 노예 해방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책에서 가장 예리한 부분이다. 설명은 이렇다. 임금노동이 매력적인 대안이 되자 자유노동자가 수백만 명씩 노동시장에 유입됐고, 농경시대에서 필요악이던 강제노동은 퇴출됐다. 물건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서 농노와 노예는 제조품을 살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기업가들이 강제노동을 점차 이익 추구와 성장의 걸림돌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경쟁자가 강제노동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노예 해방도 시대의 필요였다. 논증은 치밀하지만 메시지는 간명하다. "우리의 가치관도 우리의 유전자와 비슷한 방식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208)" 

 

저자는 1982년 그리스에서 노인 부부를 만난다. 남자 노인은 당나귀에 앉아서 편하게 가는데, 옆에선 노파가 무거운 자루를 짊어진 채로 걷고 있었다. 둘은 부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풍경 아닌가. 저자의 일행이 남자 노인에게 부인은 왜 당나귀를 타지 않았냐고 묻는다. 대답이 걸작이다. "부인은 당나귀가 없다." 너무 당연하듯 대답하여 물어본 사람이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혼란스러운 경험은 계속된다. 2012년엔 탈레반이 자신들을 비판하던 16세 소녀 유사프자이의 머리에 총을 쐈다. 2014년엔 보코하람이 250명이 넘는 여학생을 납치했다. 탈레반과 보코하람은 전통적 성 역할을 굳건히 믿는다. 소녀는 학교에 가면 안 되고 이것을 비판하는 여자는 죽거나 노예가 되어야 한다. 저자는 이런 사례들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맞고 그들은 틀렸다. 내가 그들보다 가치화를 잘해서가 아니라 농경시대는 끝났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로는 탈레반과 보코하람의 죄는 도덕성의 결여가 아니라 도덕의 후진성이다.

 

혼란스러운 경험은 국내에도 있다. 2014년 신안 염전 노예 사건은 전 국민을 경악게 했다. 이를 두고 천사의 섬이 아니라 '악마의 섬'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홍어나 전라디언 운운하며 지역비하의 논리로 발전시키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들은 용서받아선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이 악마여서, 전라도 사람이라서 그랬다는 접근은 분노 해소 이상의 기능은 없다. 염전업이 이뤄지는 전라남도 섬들이 경상남도에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런 비인간적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섬 특유의 폐쇄성은 사람들을 농경시대 가치관으로 살게 하고, 어디서라도 폐쇄된 섬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현시대의 많은 갈등은 모두가 같은 시대를 살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된다. 저자의 거시적 시각을 미시적으로 좁혀 사회를 바라봐도 어느 정도 유효할 것이다. 가령 '틀딱'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노인 비하 정서를 생각해보자. 그들과 우리는 분명 다른 시대를 살았다. 한국은 농경 시대부터 화석연료 시대로의 이행을 급격하게 겪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겪은 (아직 극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가난은 화석연료 시대 가치관의 정착을 방해했을지도 모른다. 가부장적 사고는 궁극적으로 폐기되어야 하겠지만, 그들에게 일정 부분 빚을 진 지금 우리는 그들 행동을 이해할 의무도 있지 않을까.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 용서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인간 비합리의 발원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없다면 그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가치관은 일종의 적응형질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 시스템이 변하면 자체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치관을 조정한다. 이는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는 당위의 실현이 아니며, 가장 개연성 높았던 잠재의 실현일 뿐이라는 뜻이다. 가치관은 더 큰 전체를 위해 기능하는 부분이다. 가치관을 현실의 맥락에서 뜯어 내 상상의 저울로 가늠하고 판단한다고 절대 보편의 완벽한 가치관을 설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치관은 엄연히 현실 세계에 속한 것이고, 사회 시스템의 부분으로 기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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