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3부작 열린책들 세계문학 38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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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은 나의 거울이다, 혹은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라는 문장을 많이 봤다. 누가 먼저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비슷한 책 제목도 있다. 그러나 누가 먼저 말했어도 상관없다. 내가 감각하는 타인이 온전한 타인이 아니라는 깨달음은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살며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간다. 시간이 지나 주위에 남은 몇 안 되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 스펙트럼이 반영된 결과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서로의 인생을 반영하는 거울로서의 타인이 된다. 한편,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수도 있다. 내게로 향하는 타인의 감정이 온전한 타인의 감정이 아니라면 어떨까. 그것의 본질이 내가 상대방에게 투사한 감정이라면. 그때 타인은 진정으로 거울에 맺힌 나의 상像일 것이다.

『뉴욕 3부작』은 세 편의 이야기다. 세 편 모두 언뜻 비슷한 느낌인데, 타인을 집요하게 관찰하던 주체의 자아가 붕괴되는 과정이다. 「유리의 도시」에선 잘못 걸려온 전화로 탐정을 맡게 된 대니얼 퀸이 피터 스필먼을 관찰하고 감시하고 「유령들」에선 탐정 블루가 정체불명의 화이트의 의뢰로 블랙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기록한다. 「잠겨 있는 방」은 약간 결이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작가가 행방불명된 (그러나 살아있는) 친구의 전기를 집필하기 위해 친구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질문이 남는다. 타인의 삶을 집요하게 관찰하던 그들은 왜 붕괴하는가.

세 편 모두에서 주인공은 타인의 삶에 대한 글을 쓴다. 과연 타인의 삶에 대한 글은 관찰과 증언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적어도 이 소설 내에선 불가능해 보인다. 「유령들」의 탐정 블루는 '수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들에서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관찰의 한계를 느낀 탐정들은 관찰 대상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그들은 타인을 깊이 들여다볼 때 자신과 타인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경험을 한다. 자아 정체성의 역전을 겪은 그들은 혼란스럽다.

이야기의 의도는 마지막 편에 이르러서 드러난다. 앞선 두 탐정 이야기는 마지막 이야기 「잠겨있는 방」의 화자가 자신의 경험을 변주하여 창조한 것이다. 「잠겨있는 방」의 화자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친구였던 팬쇼에게 경외심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낀다. 행방불명된 (그러나 살아있는 게 분명한) 팬쇼의 전기를 작성하다 그의 아내와 가까워지고 결혼하게 된다. 팬쇼의 어머니와 만나선 정사한다. 몹시 위험한 이 행위는 팬쇼와 자신의 동일시를 전제로 이루어진다. 이 동일시를 통해 그들의 정사는 상징적인 근친상간이 된다. 화자만큼이나 팬쇼를 증오하던 팬쇼의 어머니도 이 자아의 동일시에 무의식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팬쇼에게 끔찍한 복수를 하는 공모자가 된다. 팬쇼의 전유물들을 침범하고 그의 삶을 추적하는 동안 화자의 자의식은 몹시 흔들린다. 그의 삶은 사라진 팬쇼에게 잠식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이걸 깨달은 그에겐 단 하나의 선택만 남는다. 팬쇼를 만나서 죽여야 한다. 이미 침식당한 자아를 지키기 위해선 팬쇼가 정말로 죽어서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세 편의 이야기는 모두 다르면서도 결국 같은 이야기다. 그들 모두 타인을 깊이 알려고 할수록 자신의 내면만 깊게 확인하게 된다. 타인은 결코 온전한 타인이 아니고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이 투사된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을 망각한 '유령들'이고, 관찰하는 동시에 관찰당하는 공간인 뉴욕은 투명한 '유리의 도시'이고, 힘겹게 타인의 자아에 도달했을 때 그곳은 자신의 내면 속 '닫혀있는 방'이라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들이 절절하게 다가온다면 그건 타인에게 내 욕망을 투사하는 일이 결코 드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미숙한 방어기제는 삶에서 숱하게 저질러지고 그렇기 때문에 건강한 자아를 지키며 살기란 어렵다. '그들은 왜 붕괴하는가'라는 질문의 주어는 언제든지 '나'로 바뀔 수 있다. 이 이야기는 그래서 쉽지 않다.

마지막 이야기 속 화자의 혼란스러운 경험을 모두 읽으면 앞의 두 이야기는 또 다른 생명력을 갖는다. 자아의 병리적 현상이 이야기로 어떻게 재창조되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인물과 장치의 변주, 메타포, 메타픽션의 활용 등등. 그러나 가장 압도적이었던 마지막 이야기조차 진실이 아니라 하나의 창조된 이야기일 뿐임을 떠올린다면 폴 오스터라는 작가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이야기를 듣기 원하고 그래서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말속에 진짜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상상하면서 우리 자신을 이야기 속의 인물로 대체시킨다. 마치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기만이다. 우리는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때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어렴풋이 알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삶이 계속될수록 우리 자신에 대해 점점 더 불확실해져서 우리 자신의 모순을 점점 더 많이 알아차리게 된다. 누구도 경계를 넘어 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바로 그 간단한 이유로. 3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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