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역시 저자 이름과 책 제목이 간지 난다. 쥬드 씨는 요즘 무슨 책을 읽고 계시나요.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습니다 (근엄, 진지). 상상만 해도 멋지군. 농담처럼 썼지만 책 제목을 보고 고르긴 했다. 좌파들이 자주 인용하는 슬라보예 지젝을 한 권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고, 저자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는 터라 그중 제목에서 흥미가 동하는 책을 주문했다. 세상이 왠지 짜증 나고 화나는 이유에 대한 답을 조금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1.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우리는 폭력이란 단어를 들으면 물리적 폭력을 떠올린다. 범죄나 테러, 폭동, 폭력 시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눈에 보이는 폭력은 주관적 폭력(subjective)이고 그것은 하나의 현상이지, 근원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머지 둘은 객관적 폭력(objective)인데, 하나는 하이데거가 '존재의 집'이라고 칭한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symbolic) 폭력이다. 다른 하나는 구조적(systemic) 폭력이다. 지젝은 상징적, 구조적 폭력을 포함한 객관적 폭력의 이해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주관적 폭력은 정상적인 상태를 혼란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객관적 폭력은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면 위로 드러난 폭력을 비판하고 관용을 장려하는 것은 언뜻 정의로워 보이나 객관적 폭력이 그것들을 지탱한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가 (ㅎㅎ). 책에선 빌 게이츠, 무함마드 만평 때문에 발생한 덴마크에 대한 무슬림들의 폭력,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들을 예시로 든다. 그것들을 심층 분석해 가시적인 폭력에 구조적, 상징적 폭력이 어떻게 관여했는지, 기저에 깔린 병리적 심리가 무엇인지를 고찰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빌 게이츠는 설명이 필요 없는 부자다. 그는 수억 달러를 기아와 말라리아와의 싸움과 교육에 기부했다. 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기부하려면 일단 돈을 벌어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기부의 이면엔 지독한 사업가의 면모가 있다. 실질적 독점을 노리며 경쟁자들을 파산시키거나 사들이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거래 수법을 동원한다. 그의 자선은 무자비한 이윤 추구를 상쇄하는 수단이다.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선진국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미개발 국가들을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의 빈곤에 연루돼 있으며, 공동책임이 있다는 핵심적 쟁점을 회피한다. 이는 초자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기만이다.

빌 게이츠를 위시한 자선을 베푸는 자본가들은 결국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이며,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선한 자에 대한 심문>이라는 시를 인용해 대답한다. 그 시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다.

이제 우리의 말을 들으라, 우리는
그대가 우리의 적임을 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제 그대를 벽 앞에 세우리라. 그러나 그대의 미덕과 장점들을 고려하여
우리는 그대를 좋은 벽 앞에 세우고 그대를
좋은 총의 좋은 탄환으로 쏠 것이며 그대를
좋은 삽으로 좋은 땅에 묻어 주리라.

...... ㅎㅎㅎ

2.
지젝은 주관적 폭력과 싸운다고 하면서 구조적 폭력에 가담하는 자들이 위선적이라 말한다. 그에 따르면 혐오하는 그 폭력을 유발하는 것이 구조적 폭력이다. 폭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하나의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이자, 사회적 폭력이 가진 근본 형식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일종의 신비화다. 정작 가장 잔혹한 형식의 폭력에 대해선 다양한 메커니즘을 동원해 무감각하게 만든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일은 종종 희생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동정의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구조적 폭력이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근원은 결국 자본 주의 체제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폭력에 대한 명제―필요하면 폭력을 쓰되, 폭력이 결코 합법적이지 않다는―는 부적절하고 이 생각은 뒤집어져야 한다.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폭력은 언제나 합법적인데, 이들이 가진 지위가 이들이 폭력에 노출된 결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만 반드시 폭력을 사용해야 하는 건 아니고 전략적 고려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단서를 붙인다.

3.
간헐적으로 지젝이 인간 본성을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택의 자유와 관련해서도 자유주의는 역시 심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자유주의 문화는 타문화에 속한 개인들이 선택의 자유를 가지지 못한 점에 대해 관용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여성 할례, 여성의 조혼, 영아 살해, 일부다처제, 근친상간 등과 같은 쟁점들은 그 명백한 사례들이다. 그러면서도 자유주의는 우리의 자유로운 사회에서 가해지는 엄청난 압박, 예를 들어 여성들로 하여금 성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지 않기 위해 성형수술, 미용을 위한 치아 임플란트, 보톡스 주입 등을 시술받도록 강제하는 그런 압박은 애써 무시한다. 205p

 

지젝은 성차별적 구조가 여성들을 과열된 성형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남성에서 선택받으려는 목적 말고도 성형 수술을 하는 이유는 많다. 성시장에서의 경쟁력보다 중요한 건 여성들도 여성이기 전에 인간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그저 본능적으로 미美 추구한다. 자신이 나아지기 위해 수술한다는 말이다. 지젝의 논리로 남성의 성형 수술이 늘어나는 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오늘날 악을 대표하는 좋은 예는 환경을 오염시키고 사회적 유대가 무너져 가는 폭력적인 세상에 살아가는 평범한 소비자들이 아니다. 그런 전반적 파괴와 오염을 조성하는 데 전적으로 관여했으면서, 돈을 써서 자기 자신이 저지른 결과로부터 쏙 빠져나오는 자들, 빗장 공동체에 살면서, 유기농 식품을 사다 먹으며, 자연 보호 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자들이 바로 악이다. 59p

 

평범한 소비자들은 과연 선해서 위해를 끼치지 않는 것일까. 그들은 단지 위해를 끼칠 능력이 없을 뿐이다. 부촌과 빈민가를 떠올려보라. 평범한 사람들은 평범한 방식으로 환경에 위해를 끼친다. 평범한 사람이 가진 자의 위치로 격상되면 자연 보호 구역에서 휴가를 즐길 것이다. 그러나 지젝은 결코 이것을 지적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이기적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을 비판하는 건 좀 공허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의 문제의식대로라면 해결책은 모두 같은 수준의 생활을 향유하는 것밖에 없다. 만약, 이 단락으로 비판하고 자 했던 게 가진 자들이 도덕의 훈장까지 차려는 것이었으면 절반쯤은 동의한다.

4.
일주일 동안 이 책과 씨름했다. 읽기만 하면 어찌나 잠이 잘 오던지... 헤겔이니 라캉이니 마구 인용하는데 나는 그 사람들을 모르니 잘 읽힐 리가 있나. 지젝은 스스로 인정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약한 자들의 폭력(가시적인)은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300페이지 동안 그 결론을 향해 대중문화와 역사를 종횡으로 누비며 달려간다. 영화에 숨겨져 있는 심리들을 밝혀내는 부분과, 무슬림의 폭력이 좌절로부터 비롯됐다는 분석 등은 흥미로웠다. 다만 폭력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인데, 나는 지젝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젝의 말대로라면 한국 시위의 쇠 파이프, 죽창도 폭력적 구조에서 해방되기 위한 수단으로 긍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쇠 파이프나 죽창이 과연 구조적 폭력의 근원에 닿는가? 그것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구조적 폭력의 핵심에 닿지 않고, 단지 전경의 몸뚱이와 얼굴에 닿을 뿐이다. 그렇기에 난 시위에서의 물리적 폭력이 늘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결론에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세계적 철학가의 지적 사유 방식을 엿본 것에 대해선 나름대로 만족한다. 그러나 다시 지젝을 읽을 것이냐 물으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겠다.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는 아니다. 체크한 문단이 아주 많다는 것만 봐도 결론 외의 사유는 내 마음에 들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철학자들을 과하게 인용하는 서술 방식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책을 읽는 건 철학에 무지한 사람들에겐 고역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모두, 지각의 착각perceptual illusion과 비슷한 일종의 윤리적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우리가 이런 착각에 빠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추상적으로 추론하는 능력이 엄청나게 발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서적-윤리적 대응은 아주 오래된 본능적 반응에 길들여져서 고통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면 동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대부분은 버튼 하나를 눌러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총으로 누군가를 직접 겨냥해 쏘는 일에 대해 더 큰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7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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