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국도 Revisited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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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엔 나를 도와주는 20대 초반의 부하 직원들이 있다. 난 그들에게 여자친구가 있냐고 물어보곤 한다. 있다고 하면 어차피 그 나이 때 만나는 여자는 헤어질 수밖에 없으니 대충 만나라 말한다. 헤어지고 입사했다고 하면 마찬가지로 어차피 헤어지게 됐을 테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하고. 여자친구가 있던 적이 없다고 하면 더 이상 농을 던질 수 없다. 같이 울어줘야 한다. (ㅎㅎ)

 

이 책은 왜 청춘은 사랑할 수밖에 없고, 헤어질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김연수의 대답이다.

 

일단 이 책의 제목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Revisit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이렇다.

 

1.(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방문하다
2.다시 논의하다.

 

이 책은 김연수가 20대 중반에 쓴 7번 국도라는 소설을 2010년에 수정하여 다시 쓴 것이다. 그리고 책 안에서는 7번 국도를 오랜 시간 뒤 다시 찾아가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7번 국도 Revisited라는 제목은 두 가지 작품 내외적 함의를 지닌다.

 

책의 첫인상은 아주 산만했다. 짧은 호흡으로 시간 축이 뒤섞인 채 이야기가 진행된다. 영 산만해서 몇 장 읽다 말고를 반복하다 책상 위에 던져뒀다. 만날 김연수가 하는 그저 그런 사랑 이야기인가 보다 하고 말이다. 몇 달 후 지독히 책 읽기 싫은 때가 찾아왔다. 다시 책을 읽고 싶은데 두꺼운 책은 도저히 엄두가 안 나서 얇은 책부터 조금씩 읽어보기로 했다. 전락, 야만적인 앨리스 씨를 읽었지만 결코 쉽게 읽히지 않았다. 세 번째로 잡은 7번 국도 Revisited는 빠르게 읽혔다. 여름에는 그렇게 안 읽히던 이 책이 중반을 넘어가며 술술 읽혔다. 인물들의 속 사정을 알게 됐을 때 비로소 내가 그 청춘들에 공감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책에는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나온다. 두 남자는 한 여자를 사랑한다. 순서대로. 묘한 경쟁의식을 가진 두 남자지만 이 여름 아니면 갈 때가 없을 것이라며 7번 국도로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여자는... 더 말하면 재미가 없을 테니 책을 읽어보자.

 

왜 청춘은 헤어지고 말 사랑에 몸을 던지는가? 작가는 고양이 킬러의 질문에 대한 고양이의 대답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복수하기 위해 사랑한 게 아니다. 우리는 단 하나의 희망을 가지기 위해 사랑했다. 희망은 당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며, 당신의 복수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며, 당신의 운명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지금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단 하나의 희망을 위해 서로 사랑할 것이며, 당신이 다시 복수를 시작한다고 해도 그 단 하나의 희망을 위해 서로 사랑할 것이다. 거기 의미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서로 사랑할 것이며,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해도 우리는 서로 사랑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오직 맹목적일 것이다.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살아남았지만, 당신은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려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으나, 우리가 복수할 대상은 이미 지상에서 사라졌다. 204p"

 

사랑은 맹목적이고 청춘은 완전하지 않으니까 이별할 수밖에 없다. 지나간 사랑들을 그저 치기 어렸을 때의 일들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그 경험들이 우리의 인생을 구성하고 오롯이 떠받치는 것이므로 치기는 한순간일 뿐 우리는 계속 사랑해야 한다. 다시 찾아간 7번 국도에 청춘은 없다. 예전의 우리로도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나는 부하 직원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헤어졌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 살다 보면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더라. 아니, 못 만나면 어떠냐. 아픔은 희석되기 마련이니 걱정 마라. 지금은 증오하지만 증오도 희석된다, 상대방도 그럴 것이고. 다른 여자 만나서 또 놀면 되지 뭐"

 

하지만 여자를 만나본 적 없는 부하 직원에겐 여전히 해줄 말이 없다는 건 함정이다.

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둘러싼 기억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 죽어간다. 우리는 그걸 ‘학살‘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의 날씨를 잊었고, 싫은 내색을 할 때면 찡그리던 콧등의 주름이 어떤 모양으로 잡혔는지를 잊었다. 나란히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던 이층 찻집의 이름을 잊었고, 가장 아끼던 스웨터의 무늬를 잊었다. 하물며 찻집 문을 열 때면 풍기던 커피와 곰팡이와 방향제와 먼지 등의 냄새가 서로 뒤섞인 그 냄새라거나 집 근처 어두운 골목길에서 꽉 껴안고 등을 만질 때 느껴지던 스웨터의 까끌까끌한 촉감 같은 건 이미 오래 전에 모두 잊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마침내 그 사람의 얼굴이며 목소리마저도 잊어버리고 나면, 나만의 것이 될 수 없었던 것들로 가득했던 스무 살 그 무렵의 세계로, 우리가 애당초 바라봤던, 우리가 애당초 말을 걸었던, 우리가 애당초 원했던 그 세계 속으로 완전한 망각이 찾아온다. 3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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