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자유다 - 수전 손택의 작가적 양심을 담은 유고 평론집
수잔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이후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시국이 이런데 문학이 자유롭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느냐,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워워, 시국에 삶을 잡아먹히면 안 된다. 시국이 무거워서 질문은 못 받아도 삶의 자유는 누려야지. 게임에서 얻든지, 음악에서 얻든지, 술에서 얻든지, 문학에서 얻든지. 수전 손택은 말했다. "문학은 더 큰 삶, 다시 말해 자유의 영역에 들어가게 해주는 여권"이라고. 캬, 권위자가 이렇게 멋지게 말해주면 내 궁상맞은 취미 생활도 고급한 것으로 바뀐다. 그러니까, 하품하며 넓적 다리나 긁으면서 책 읽다 졸다 하던 내가 자유의 날개 달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 되는 것이다. (라고 부대에 갇힌 채로 책을 읽고 쓴다)

올해에만 수전 손택을 세 권 읽었다. 그는 늘 자신이 소설가로 불리길 원했다고 하지만 내게는 일종의 사상가와 같다. 앞선 두 권의 책으로 그에게 경도됐다고 하면 조금 오버일까? 어쨌거나 작가에 대한 믿음만으로 책을 샀으니 경도란 단어가 무거우면 팬심 정도로 가볍게 설명하지 뭐.

뉴욕 지성계의 여왕. 그를 수식하는 말이다. 뉴욕, 지성, 여왕. 각각을 떼어놔도 대단한데 자그마치 세 가지 최고의 콤비네이션이다. 치열한 지적 사유, 단호한 문장, 다수의 논리에 맞서는 당당함, 풍부한 예술 취향. 정말 멋지다. 이런 멋진 사람은 백 살쯤 살아서 글을 많이 썼어야 하는데. 유방암도 이겨낸 그는 안타깝게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70살에 죽는다. 죽기 직전까지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삶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고 하니 글과 삶이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열렬한 팬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 책은 살짝 별로였다. 책이 그의 퇴고를 거치지 않은 유고집이라 그런지 하나의 주제로 수렴하지 않는다. 1부는 그가 줄곧 쓰던 비평들이고, 2부는 9.11 이후 보인 미국의 야만성에 대한 비판이다. 3부는 각종 문학상 시상식의 연설문이다. 이전 작들이 줬던 묵직한 메시지는 없는 게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몇몇 메시지는 여전히 날카롭다. 가톨릭교회 성추문 사건에서 교황이 가톨릭교회를 위대하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에 비유했을 때, 그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수십 장의 글을 썼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본질 자체에서 저절로 나오지만 예술의 아름다움은 이상화 역사의 일부이며,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내적/외적', '고급한/저급한' 같은 이원적 개념으로 받아들인 까닭은 아름다움의 판단이 도덕적 판단에 종속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아름다움이 인간이 만든 정신의 산물에서 비롯됐다면, 그것이 윤리와 어떻게 분리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교황 이야기는 잠깐 하고 넘어가지만 독자는 알 수 있다. 수전 손택이 차분하게 가톨릭 교황을 '멕였다'는 것을.

<은유로서의 질병>이나 <타인의 고통>에서 봤듯이 그는 정치적 올바름의 화신과도 같다. 그런 그가 9.11 이후 한쪽으로 무섭게 쏠린 복수의 논리에 경계의 목소리를 냈던 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반대 의견을 내면서도 자신의 주장이 작가로서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야말로 새길만하다. "작가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이란 순전히 우연한 것"이며 "연예인 문화의 한 양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주장은 주장 자체의 논리에 힘을 얻어야지 주장하는 이의 권위에 힘을 얻어선 안 될 일이다. 노래 잘 부른다고, 남 좀 웃긴다고, 아니면 자신이 무엇에 권위 있다고 권위 없는 분야에 성실한 비논리를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한편으론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정당한 대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는 데 공모한 사람이 많았다고. 진실과 정의 가운데 선택해야 한다면 진실을 선택하겠다고. 멋지다. 어렵기 때문에 멋지다. 우리는 진실을 위해 국가를, 그것이 너무 크다면 자신이 속한 집단을 배신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물리적 실천이 어렵다면 적어도 글의 윤리에서라도. 이건 끝까지 어려울 것이다.

지금 편하게 손가락 놀릴 동안에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선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 고통스러운 일을 일일이 알 수 없으니 그것에 일일이 반응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의 상상력과 연민까지 부정할 순 없다. 인간 정신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외연을 넓히는 건 무엇보다도 문학의 역할일 것이다. 아, 제 말이 아니라 작가의 말이 대충 이렇다고요.

두서없는 책이라고 서평도 두서 없이 써버렸다. 올해가 아직 한달 더 남았지만 내 올해의 사상가로 수전 손택을 선정한다. 왜냐하면 더 심오한 책을 읽기는 귀찮으니까 하핫. 아니 그보다도 12월엔 문학보다 술로 자유를 찾아야 마땅하니까. 농담이다. 내 취미에 이렇게 거창한 의미를 부여해주는 사람을 어찌 숭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학은 세계를 넓힌다. 문학은 자유다. 아아 멋져라. 이상 블랙아웃 전문가 쥬드의 리뷰였습니다.

결국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해나 화합에 이르게 된다면 그 모델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오래된 대립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결과일 것입니다. ‘문명‘과 ‘야만‘의 대립은 그것이 아무리 어떤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그냥 그렇게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숙고하고 권위 있는 척하며 말하는 것은 본질을 흐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대립은 진짜고 뿌리 깊은 것이며 우리가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중심에 있습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과 방향 감각의 영원한 두 축입니다. 낡은 것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낡은 것에는 우리의 과거, 지혜, 기억, 슬픔, 현실 감각 모두가 들어 있으니까요. 새로운 것에 대한 믿음 없이도 살 수 없습니다. 새로운 것에는 우리의 활기, 낙관할 수 있는 능력, 맹목적인 생물학적 갈망, 화해할 수 있게 하는 치유력인 망각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2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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