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슬픔을 말하시오. 비탄이 입을 못 열면 미어지는 가슴에 터지라고 속삭이는 법이니.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p.399
이 책은 트라우마가 남긴 것들과 앞으로 남기게 될 것들, 그리고 그를 이겨내는 방법까지도 말하고 있다. 저자가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트라우마에 대해 얼마나 집요하게 매진해왔던 긴 과정을 책 한 권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원천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하는 경험의 모든 측면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충고하셨다. 또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느끼는 것을 느끼지 못하면 결코 나아질 수 없다는 말씀도 하셨다. p.67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원천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우리가 하는 경험의 모든 측면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어느 한 구석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옳은 말이지만, 또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개인이 겪은 모든 경험을 정직하게 받아들였을 때, 트라우마와 제대로 마주했을 때, 비로소 그를 인식하고 해결해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듯 하다.
우리에 갇힌 상태에서 몇 차례 전기 충격을 가한 후, 연구진은 우리 문을 열고 다시 충격을 가했다. 앞서 전기 충격을 당한 적 없는 대조군 개들은 충격이 가해지자마자 얼른 달아났지만, 피할 수 없는 충격을 당했던 개들은 문이 활짝 열려 있는데도 달아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서 낑낑대고 배변을 했다. 단순히 도망갈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서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동물이나 사람이 자유를 찾아가지는 않는다. 마이어와 셀리그먼 연구진의 실험 개들처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들 역시 기회가 주어져도 그냥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위험이 따를지도 모르는 새로운 방법을 택하는 대신, 익숙한 두려움에 갇혀 있으려 하는 것이다. P.71
가장 인상 깊게 읽힌 실험이었던 것 같다. 사실 이와 같은 내용의 실험은 생각보다 종종 마주해왔기에 놀랍지 않았다. 좀더 놀라웠던 것은 이 실험을 해석하는 저자의 시선이었던 것 같다. 도망갈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동물이나 사람이 자유를 찾아가지는 않는다는 말은, 이 책의 전반을 관통하는 말이 될 것 같다.
매일 저녁 뉴스에서는 스스로 생을 끊은 이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온다. 그리고 그 죽음은 쉽게 재단되며 지레짐작으로 판단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우울과 트라우마에 빠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약 처방이나 공감이 결여된 가벼운 조언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것들로는 트라우마에 압도된 이들을 구하는 속도보다 잃는 속도가 빠를 것이다.
소리나 냄새, 신체 감각처럼 트라우마 경험에 관한 가공 안 된 감각의 조각들은 이야기와 분리되어 따로 저장된다. 따라서 비슷한 감각을 접하면 과거가 재현되어 그때의 일이 되살아나고, 시간이 흘러도 변형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p.95
잠들지 못하는 새벽 이불을 차게 만드는 기억들이 있다. 그 기억들은 모두가 잠든 새벽 홀로 잠들지 못하는 때에 여지없이 찾아와 괴롭게 만든다. 보통의 사람들이 이불을 몇 번 차낸 후에, 그만 잊자며 잠에 빠져드는 것은 사실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흑역사로 치부할 수 있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면, 이불 몇 번 차내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트라우마라는 것은 기억으로만 남지 않는다. 소리, 냄새, 느낌, 분위기와 같은 모든 것들이 따로 저장되고, 비슷한 상황에 놓일 때마다 그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과거에 즐겨 듣던 노래마다에 그때의 기억이 스며있는 것처럼, 그 노래가 재생됨과 동시에 원하든 원치 않든 그 기억들이 물씬 밀려오는 것처럼, 그렇게 트라우마는 현실을 덮쳐오는 것이다.
정신적 외상을 입은 사람들은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실망스러운 일을 겪을 때 섬세하게 반응하지 못한다. 대신 그 스트레스로 인해 ‘멍해지는’ 상태가 되거나 과도하게 표출한다. 어느 쪽의 반응이 나타나든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언짢은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상태는 신체에도 영향을 주고, 그 결과 자기 보호 능력이 사라져 또다시 희생자가 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널리 입증됐다. p.185
정신적 외상을 입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자기 보호 능력을 잃고, 다시금 상처를 받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무척이나 슬픈 일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반드시 외상이 존재한다. 외상 없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비교적 평화로운 상황을 보고도 끔찍한 결과만 상상할 수 있다면, 방에 들어온 사람이든 낯선 사람이든 화면이나 게시판에 걸린 모든 이미지가 재앙의 조짐으로 인식될 수 있다. p.201
모두가 졸고 있는 오후 한낮의 교실, 지진과도 같은 재해 상황이 발생하거나 좀비나 외계인이 출몰한다. 교실은 탈출하기 위한 아이들로 혼비백산인 상태가 된다. 잠들기 전 올려다 보이는 천장을 보면서 이 집이 과연 부실공사를 한 건물은 아닐지 걱정한다. 습관처럼 들려오는 뉴스 탓에, 횡단보도에 설 때면, 이무렇게나 질주하던 음주운전자의 차가 질주하며 달려오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렇듯 일상의 순간에서 재앙을 상상하는 것은, 살면서 간접적으로 듣고 보아왔던 것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내가 겪었던 일들이라면, 분명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고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넌 순간 끊어지는 상상에 그치지만은 않을 것이다.
성장하면서 우리는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점차 배워 가지만, 자기 관리를 맨 처음 배우는 건 바로 우리가 돌봄을 ‘받는 방식을 통해서다. 자기 통제 기술을 습득하는 수준은 생애 초기에 양육자와 얼마나 조화롭게 상호 작용했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부모가 안락함과 힘을 충분히 제공해 준 아이들은 평생 그 효과를 누린다. 즉 운명이 건네는 최악의 순간도 견디는 일종의 완충제를 확보하는 것이다. p.204
어릴 적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정신과 폐쇄병동에 있던 어린 아이들, 제 각기 다른 모양의 상처를 품고 있던 아이들이 생각난다. 그 아이들의 불안과 트라우마는 타고난 성향이나 유전적인 소인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어른들이,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처음의 소중한 ‘돌봄’의 경험을 쥐어주었어야 할 어른들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한 경우, 아이들은 평생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게 된다. 이 트라우마는 성장하면서 옅어지거나 점차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온몸 깊숙한 곳에 껴안은 채 살게 된다.
“쪼개지고, 거부당하고, 알지 못하고, 원치 않고 의식의 곳곳 지하 세계로 쫓겨나고 추방당한 우리 자신의 일부, 그 일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밤바다 여행’이라고 한다. (…) 이 여행의 목표는 우리 자신과 재결합하는 것이다. 놀랄 만큼 고통스럽고 잔혹한 귀향이 될 수도 있다. 이 과정에 돌입하려면, 먼저 ‘무엇도 내쫓지 않겠다’고 동의해야 한다.” 스티븐 코프Stephen Cope p.225
모든 사람의 몸에는 알게 모르게 저마다의 트라우마가 새겨져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상처 하나 없이 반질한 몸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상처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혹시 가벼운 생채기로 여겼던 상처가 피를 철철 흘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보고 살피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한 인간이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속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