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배우는 시간 -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슬기롭게 죽는 법
김현아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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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이 싫었던 이유라면 백 가지도 댈 수 있지만, 가장 싫었던 이유는 언제나 하나로 귀결되었다. 병원은 죽음을 배우고 죽음에 무뎌져야만 하는 공간이었다. 내가 매달 받았던 월급은 사람의 죽음에 점점 무뎌지는 데에 대한 대가였고, 그래서 그 총합은 항상 모자랐다. 한 사람의 죽음이 유가족에게 슬픔만을 남기지는 않는다는 것을, 기나긴 투병을 거쳐 이르게 된 죽음이 남은 자들에게 형벌같은 짐을 지운다는 것을 알아버렸기에. 고작 그만큼의 월급과 간호사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죽음 앞에 슬퍼할 권리를 맞바꾸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첫 환자의 죽음에 대해 환자의 보호자보다도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p.29




 한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에는 생각보다 많은 타인의 인력과, 인내와, 시간과 비용이 든다. 삶도 죽음도 아닌 경계에서 너무나도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는 것이다. 의료진이 병원에서 가장 많이 목격하게 되는 것은 죽음, 그러나 가장 배우기 어렵고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 역시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에 무뎌지기를 포기한 나는 병원을 떠나기를 선택했다.
 현대의학이 너무 발달해서, 혹은 애매하게 발달해서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 병원에서 무의미하게 하루하루 시들어가도록 만든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항상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인간의 존엄은, 죽음 앞에서 생각보다 지켜지기 어렵다. 타인의 손을 빌려 모든 기본위생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러한 것이 지켜질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병원에서 존엄을 잃은 채  삶의 마지막을 보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죽음은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최악이자 최대의 사건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일생일대의 사건에 대해 새 자동차를 구입할 때보다도 준비를 덜한다.

p7.



이 책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삶의 어느 시점에서 언제든 겪을 수 있는 죽음과 함께 일상을 지내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래서 갑작스레 죽음과 대면하게 된 보통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무의미한 치료로 하루를 채우며, 고통 속에 삶을 끝내고 있음을 직시한다. 
 내과 병동에 근무했을 적, 췌장암을 진단받은 할머니가 계셨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췌장 말기, 복수가 찬 배 때문에 며칠 째 몸을 바로 뉘이지도 못하던 할머니가 힘겹게 내뱉은 말이었다. 수시로 주사바늘을 쥐어뜯어 애를 먹이고, 복수를 빼내던 중 혈압이 뚝 떨어져 한바탕 온 병동에 소란이 일었던 후에 할머니가 했던 말이었다. 그 말에 진땀 내며 바삐 움직이던 몸에 맥이 탁 풀렸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언제부터였을지도 모를 금식 중이었다. 그 혼돈한 말에 내 머릿속도 혼돈에 빠졌다.

 가망 없는 숨을 억지로 연명하며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 하나 입에 대지도 못한 채 희미해지는 삶의 말로. 이게 과연 치료인가. 내가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치료가 맞는가. 억지로 혈압을 올리고, 억지로 억지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고 있지만, 이건 치료도 무엇도 아니지 않나. 여기 할머니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그럴 바에는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 한 입 먹는 게 낫지 않을까.





병원 중환자실은 일시적인 문제로 생명이 위독해진 환자들이

의학적인 시술의 도움으로 위험한 시기를 넘기고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존재한다.

원칙은 그렇지만 현대의료에서는 이런 원칙이 너무나 빈번히 깨져버린다.


누구도 "이제 그만"이라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을 말하기 싫어하는 의사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환자 가족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하에, 중환자실은 환자가 임종을 맞기 위한 장소로 급속히 변질되어가고 있다.

p.71




 그럼에도, 할머니의 말은 온전치 못한 의식에서 한 말로 치부되어 아무도 귀담아 듣는 이가 없었다. 보호자조차. 그런데 그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힘겹게 뱉은 말은, 그건 사실 정말 할머니가 간절히 원했던 게 아닐까. 그러나 먼 친척들까지 몰려와 둘러 모인 보호자들의 표정들이 하나같이 냉담했기에, 아이스크림 하나를 구해서 몰래 할머니의 손에 쥐어주고 싶은 마음은 내 몫이었다. 아니, 이런 걸...... 이런 걸 치료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식의 일이 반복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러한 일상을 견딜 수 없었던 건 내가 무르고 유약한 탓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내가 한 행위는 치료도 간호도 아니었다. 어찌됐던 할머니의 상태는 악화될 수밖에 없었고, 중환자실로 이실된지 일주일만에 할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하지만 어떤 시점에 이르면

누군가 "이제 그만"을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의문도 든다.

p. 37


여전히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밤이면 퉁퉁 부은 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할머니는 그래서, 떠나기 전 아이스크림을 먹었을까.

병원은 치료를 위한 곳이다. 삶의 말로에서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결코 치료가 아니다. 현대의학으로 못 고칠 병은 없다는 인간의 교만일 뿐이다.






국가는 그 구성원의 삶을 개선하는 데 힘쓰는 만큼

죽음의 질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는 데에 공감대가 이루어졌다.

p. 88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자신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며 살아가지만, 그 삶의 마지막의 질이 어떨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당장 하루하루 살기 바쁘기 때문에, 당면한 문제가 많기에, 국가 역시 개개인의 죽음의 질을 고려할 여력도 이유도 없어보인다. 하지만 죽음의 질만큼 한 사람의 여생이 어땠는가를 대변할 수 있는 지표도 없다. 그럼에도 국가가 죽음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망자는 말이 없기 때문일까. 그 노력을 알아줄 사람 역시 없는 탓일까.
 문득 길을 건너다, 버스 안에서, 나를 스쳐가는 차들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가장 끔찍한 상상을 떠올리곤 한다. 졸린 눈을 부릅뜨자 부옇게 흰 천장이 보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가물거리는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흰 천장과 가끔 눈 앞에 어른거리는 의료진 혹은 울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다. 전신이 마비되어 의식도 없이, 혹은 의식만 남은 채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온 몸에는 여러 선들이 얽혀 연결되어 있고, 어느 한 곳이 설령 간지럽거나 불편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목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간호사가 수시로 다가와 들끓는 가래를 억지로 뽑아낼 때면 고통스럽다. 차라리 의식이 없다면 감사할 일이고, 의식이 있다면 감옥에 갇힌 기분으로 여생을 누워 지내게 될 것이다. 이게 무슨 해괴한 상상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언제 어디서든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러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충분한 삶을 살아가지만, 아무도 이러한 상황을 상상하지 않는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이러한 불행한 사건이 발생할 위험성까지 염두에 두는 사람은 없다. 그러고 싶지 않아 한다. 상상하기도 싫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부정한 일로 여긴다. 안타깝고 불행하지만 내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로 치부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우리의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미리 자신의 죽음의 질에 대해 염려해야 한다. 나의 의지가 남아 있을 때, 내 죽음의 삶을 최대한 향상시킬 방법을 생각해두어야 한다.

의료 전달 체계가 엉망이라는 것은

'빅 4' 병원의 외래 진료실이 경증 환자로 미어터지는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p.59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가시가 온 발바닥을 아프게 하는 것처럼, 인간의 몸은 생각보다 약하고 섬세하다. 그런 인간에게 죽음이란 한없이 무섭고 두려울 수밖에 없는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당장 수도권만 벗어나도 소위 말하는 '제대로 된 병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확률이 뚝뚝 떨어진다. 위급한 환자가 병원에서 병원으로 이송을 거듭하다 골든타임을 놓치고 길에서 숨을 거두게 되는 사건이 이러한 현실을 대변한다. 반면 수도권의 대형병원, 대학병원이라는 곳에는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온몸을 아프게 한다며 건강에 대한 염려로 병원 쇼핑 중독에 걸린 사람들이 가득하다. 
 여느 응급실에서나 심폐소생술 중인 환자의 옆에서 자신의 순서가 먼저라며 의료진을 보채며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먼저 온 순서대로 진료를 보는 것은 곧, 위급한 환자를 포기하고 시작하는 의료체제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는 것일까.


죽음이 병원으로 떠넘겨진 다음 수순은

당연히 죽음이 치료해야 하는 질병으로 둔갑하는 거예요.


요즘은 한술 더 떠서 노화조차도 치료가 필요한 병으로 치부되고 있지요.

p.81


온통 흰색과 기계와 알 수 없는 선들과 모르는 사람들이 오가는 병원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웃으며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싶다. 그러한 행운이 내게도 올지는, 아마도 그 시점이 오기까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행운이 내게 올 확률을 높이는 일 뿐이다. 죽음은 어느 날 불현듯 찾아올 수도 있지만, 대체로 노화의 과정으로 맞이할 가능성이 더 크기에. 우리에게는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선택할 여지가 어느정도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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