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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엔딩 (양장)
김려령 외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창비 사전서평단으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이 책에는 여덟 편의 두 번쨰 엔딩이 실려 있다. "우아한 거짓말"의 외전 '언니의 무게', "싱커"의 외전 '초보 조사관 분투기', "1945, 철원"과 "그 여름의 서울"의 외전 '보통의 꿈', "모두 깜언"의 외전 '나는 농부 김광수다', "아몬드"의 외전 '상자 속의 남자', "페인트"의 외전 '모니터', "버드 스트라이크"의 외전 '초원조의 아이에게', '유원'의 외전 '서브'까지.
"두 번째 엔딩"의 서평단을 신청하게 된 계기는 "아몬드"의 외전인 '상자 속의 남자'였다. 작년에 읽었던 "아몬드"는 엔딩 이후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던 책들 중 하나였다. 주인공 윤재와 곤이의 행복한 모습을 봐야 비로소 책을 덮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엔딩"은 윤재나 곤이의 이야기가 아닌, 전혀 다른 타인의 두 번쨰 시선을 통해 "아몬드" 속의 장면을 재조명한다.
코트를 여미면서도 나는 굳이 내 생일을 축하하러 나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나가지 않는 쪽을 택했어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른이라는 걸 잊은 듯 아이들처럼 폴짝거리며 눈밭에서 즐겁게 뛰놀았다. 경쾌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 가족이란 저런 거였지.
"아몬드"에서 현재의 생일날 칼에 찔린 할머니와 어머니.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참혹했던 날의 사건.
같은 사건이 타인의 시선으로 묘사되는 것이 좋았다. 분명 많은 시선이 있었겠지만, 그 누구도 돕지 않았던 그날의 사건.
그리고 그 중 한명의 시점으로 보는 현재 가족의 모습이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감사의 마음을 쉽게, 너무나 빨리 잊어버린다.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고, 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쉬고,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가 버린다.
시간이 흘렀다. 형이 가진 많은 것들이 차츰 사라졌다. ...... 불행만 나열한 듯 쓸쓸한 삶. 그 삶이 우리의 것이 됐다.
그리고 처음 본 아이를 구하려다 전신이 마비되어 버린 '상자 속의 남자'의 주인공의 형.
타인에게 건낸 선행 이후의 삶이 불행만 남은 채 무너지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 속에 발을 묻은 채 버티고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살아남은 방법이다. 내 삶의 기준대로, 형이 내게 남긴 교훈대로.
형의 사건 이후, 감사의 마음을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들에 상처받은 주인공은 더이상 타인을 돕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상자 속에 들어간 남자.
ㅡ정말 궁금한 게 있어요. 그날로 다시 돌아간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요.
그러나 윤재의 가족을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내내 시달리던 주인공은 결국 윤재 할머니의 장례식장에 찾아간다.
굳게 마음 먹었지만 도움을 구하는 타인을 차마 완전히 외면할 수 없는 모습을 잘 표현한 것 같다.
‘구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사형수 출신의 미국 작가 P.J. 놀란이 한 말이다. P.J. 놀란은 자신의 의붓딸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렇게 아몬드에서 말한 '구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못하는 주인공.
ㅡ그날로 다시 돌아가면 똑같이 할 거냐고.
형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ㅡ그건 답하기가 힘들어. 쉽게 답해서도 안 돼. 어떻게 대답하든 누군가는 아파져.
ㅡ왜.
ㅡ똑같이 할 거라고 말하면 널 아프게 할 테고, 아니라고 하면 내가 비겁해지는 거니까.
ㅡ있잖아, 이미 일어나 버린 일에 대해 만약이란 건 없어. 그건 책임지지 못할 꿈을 꾸는 거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지. 어떻게 하든 누군가는 아프게 된다고.
형이 나를 바라봤다.
ㅡ반대로 말하면 누군가는 기쁘게 되는 거야.
모든 삶을 빼앗긴 채 몇 년째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형의 말.
나중에 사람들은 내게 왜 그랬느냐고, 왜 끝까지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제일 쉬운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아몬드에서 현재가 했던 말인데, 형의 말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살아났으면 좋겠다. 다시 숨을 쉬었으면 좋겠다. 나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어쩌면 언젠가 내 손길이 닿는 상자 한 개쯤은 이 사람의 문 앞에 닿은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렇게 과도하게 뛰는 내 맥박을 조금이라도 나눠 주고 싶다.
사람을 돕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심장이 멎은 사람을 앞에 두고 간절히 살아나기를 바라며 돕는 주인공.
아마도 나는 변함없이 상자 안에 숨어서 안전한 삶을 추구할 것이다. 이미 굳어진 어른의 마음은 쉽게 변하기가 힘든 법이니까. 그렇지만 누군가를 향해 손을 멀리 뻗지는 못한다 해도 주먹 쥔 손을 펴서 누군가와 악수를 나눌 용기쯤은 가끔씩 내 볼 수 있을까.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아몬드"와 '상자 속의 남자'는 모두 인간의 외면할 수 없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함에도 곤이를 돕는 일에 나섰던 현재와, 사람을 돕는 일을 외면하지 못하는 상자 속의 주인공. 우리는 모두 상자 속에서 안전한 삶을 살고자 하지만, 상자 밖의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분명 찢고 나갈 존재라는 것을 믿는다고, 이 책은 우리에게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