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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엔딩 (양장)
김려령 외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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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창비 사전서평단으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이 책에는 여덟 편의 두 번쨰 엔딩이 실려 있다. "우아한 거짓말"의 외전 '언니의 무게', "싱커"의 외전 '초보 조사관 분투기', "1945, 철원"과 "그 여름의 서울"의 외전 '보통의 꿈', "모두 깜언"의 외전 '나는 농부 김광수다', "아몬드"의 외전 '상자 속의 남자', "페인트"의 외전 '모니터', "버드 스트라이크"의 외전 '초원조의 아이에게', '유원'의 외전 '서브'까지.

"두 번째 엔딩"의 서평단을 신청하게 된 계기는 "아몬드"의 외전인 '상자 속의 남자'였다. 작년에 읽었던 "아몬드"는 엔딩 이후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던 책들 중 하나였다. 주인공 윤재와 곤이의 행복한 모습을 봐야 비로소 책을 덮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엔딩"은 윤재나 곤이의 이야기가 아닌, 전혀 다른 타인의 두 번쨰 시선을 통해 "아몬드" 속의 장면을 재조명한다.

코트를 여미면서도 나는 굳이 내 생일을 축하하러 나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나가지 않는 쪽을 택했어야 했다.

아몬드

그들은 자신들이 어른이라는 걸 잊은 듯 아이들처럼 폴짝거리며 눈밭에서 즐겁게 뛰놀았다. 경쾌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 가족이란 저런 거였지.

상자 속의 남자, p.157

"아몬드"에서 현재의 생일날 칼에 찔린 할머니와 어머니.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참혹했던 날의 사건.

같은 사건이 타인의 시선으로 묘사되는 것이 좋았다. 분명 많은 시선이 있었겠지만, 그 누구도 돕지 않았던 그날의 사건.

그리고 그 중 한명의 시점으로 보는 현재 가족의 모습이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감사의 마음을 쉽게, 너무나 빨리 잊어버린다.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고, 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쉬고,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가 버린다.

p.155

시간이 흘렀다. 형이 가진 많은 것들이 차츰 사라졌다. ...... 불행만 나열한 듯 쓸쓸한 삶. 그 삶이 우리의 것이 됐다.

p.153

그리고 처음 본 아이를 구하려다 전신이 마비되어 버린 '상자 속의 남자'의 주인공의 형.

타인에게 건낸 선행 이후의 삶이 불행만 남은 채 무너지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 속에 발을 묻은 채 버티고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살아남은 방법이다. 내 삶의 기준대로, 형이 내게 남긴 교훈대로.

p.158

형의 사건 이후, 감사의 마음을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들에 상처받은 주인공은 더이상 타인을 돕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상자 속에 들어간 남자.

ㅡ정말 궁금한 게 있어요. 그날로 다시 돌아간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요.

p.161

그러나 윤재의 가족을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내내 시달리던 주인공은 결국 윤재 할머니의 장례식장에 찾아간다.

굳게 마음 먹었지만 도움을 구하는 타인을 차마 완전히 외면할 수 없는 모습을 잘 표현한 것 같다.

‘구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사형수 출신의 미국 작가 P.J. 놀란이 한 말이다. P.J. 놀란은 자신의 의붓딸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아몬드

그렇게 아몬드에서 말한 '구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못하는 주인공.

ㅡ그날로 다시 돌아가면 똑같이 할 거냐고.

형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ㅡ그건 답하기가 힘들어. 쉽게 답해서도 안 돼. 어떻게 대답하든 누군가는 아파져.

ㅡ왜.

ㅡ똑같이 할 거라고 말하면 널 아프게 할 테고, 아니라고 하면 내가 비겁해지는 거니까.

p.164

ㅡ있잖아, 이미 일어나 버린 일에 대해 만약이란 건 없어. 그건 책임지지 못할 꿈을 꾸는 거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지. 어떻게 하든 누군가는 아프게 된다고.

형이 나를 바라봤다.

ㅡ반대로 말하면 누군가는 기쁘게 되는 거야.

p.164

모든 삶을 빼앗긴 채 몇 년째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형의 말.

나중에 사람들은 내게 왜 그랬느냐고, 왜 끝까지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제일 쉬운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아몬드

아몬드에서 현재가 했던 말인데, 형의 말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살아났으면 좋겠다. 다시 숨을 쉬었으면 좋겠다. 나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어쩌면 언젠가 내 손길이 닿는 상자 한 개쯤은 이 사람의 문 앞에 닿은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렇게 과도하게 뛰는 내 맥박을 조금이라도 나눠 주고 싶다.

p.169

사람을 돕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심장이 멎은 사람을 앞에 두고 간절히 살아나기를 바라며 돕는 주인공.

아마도 나는 변함없이 상자 안에 숨어서 안전한 삶을 추구할 것이다. 이미 굳어진 어른의 마음은 쉽게 변하기가 힘든 법이니까. 그렇지만 누군가를 향해 손을 멀리 뻗지는 못한다 해도 주먹 쥔 손을 펴서 누군가와 악수를 나눌 용기쯤은 가끔씩 내 볼 수 있을까.

p.173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아몬드

"아몬드"와 '상자 속의 남자'는 모두 인간의 외면할 수 없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함에도 곤이를 돕는 일에 나섰던 현재와, 사람을 돕는 일을 외면하지 못하는 상자 속의 주인공. 우리는 모두 상자 속에서 안전한 삶을 살고자 하지만, 상자 밖의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분명 찢고 나갈 존재라는 것을 믿는다고, 이 책은 우리에게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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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말하시오. 비탄이 입을 못 열면 미어지는 가슴에 터지라고 속삭이는 법이니.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p.399


이 책은 트라우마가 남긴 것들과 앞으로 남기게 될 것들, 그리고 그를 이겨내는 방법까지도 말하고 있다. 저자가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트라우마에 대해 얼마나 집요하게 매진해왔던 긴 과정을 책 한 권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원천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하는 경험의 모든 측면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충고하셨다. 또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느끼는 것을 느끼지 못하면 결코 나아질 수 없다는 말씀도 하셨다. p.67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원천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우리가 하는 경험의 모든 측면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어느 한 구석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옳은 말이지만, 또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개인이 겪은 모든 경험을 정직하게 받아들였을 때, 트라우마와 제대로 마주했을 때, 비로소 그를 인식하고 해결해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듯 하다.


우리에 갇힌 상태에서 몇 차례 전기 충격을 가한 후, 연구진은 우리 문을 열고 다시 충격을 가했다. 앞서 전기 충격을 당한 적 없는 대조군 개들은 충격이 가해지자마자 얼른 달아났지만, 피할 수 없는 충격을 당했던 개들은 문이 활짝 열려 있는데도 달아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서 낑낑대고 배변을 했다. 단순히 도망갈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서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동물이나 사람이 자유를 찾아가지는 않는다. 마이어와 셀리그먼 연구진의 실험 개들처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들 역시 기회가 주어져도 그냥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위험이 따를지도 모르는 새로운 방법을 택하는 대신, 익숙한 두려움에 갇혀 있으려 하는 것이다. P.71


가장 인상 깊게 읽힌 실험이었던 것 같다. 사실 이와 같은 내용의 실험은 생각보다 종종 마주해왔기에 놀랍지 않았다. 좀더 놀라웠던 것은 이 실험을 해석하는 저자의 시선이었던 것 같다. 도망갈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동물이나 사람이 자유를 찾아가지는 않는다는 말은, 이 책의 전반을 관통하는 말이 될 것 같다.

매일 저녁 뉴스에서는 스스로 생을 끊은 이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온다. 그리고 그 죽음은 쉽게 재단되며 지레짐작으로 판단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우울과 트라우마에 빠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약 처방이나 공감이 결여된 가벼운 조언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것들로는 트라우마에 압도된 이들을 구하는 속도보다 잃는 속도가 빠를 것이다.


소리나 냄새, 신체 감각처럼 트라우마 경험에 관한 가공 안 된 감각의 조각들은 이야기와 분리되어 따로 저장된다. 따라서 비슷한 감각을 접하면 과거가 재현되어 그때의 일이 되살아나고, 시간이 흘러도 변형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p.95


잠들지 못하는 새벽 이불을 차게 만드는 기억들이 있다. 그 기억들은 모두가 잠든 새벽 홀로 잠들지 못하는 때에 여지없이 찾아와 괴롭게 만든다. 보통의 사람들이 이불을 몇 번 차낸 후에, 그만 잊자며  잠에 빠져드는 것은 사실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흑역사로 치부할 수 있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면, 이불 몇 번 차내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트라우마라는 것은 기억으로만 남지 않는다. 소리, 냄새, 느낌, 분위기와 같은 모든 것들이 따로 저장되고, 비슷한 상황에 놓일 때마다 그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과거에 즐겨 듣던 노래마다에 그때의 기억이 스며있는 것처럼, 그 노래가 재생됨과 동시에 원하든 원치 않든 그 기억들이 물씬 밀려오는 것처럼, 그렇게 트라우마는 현실을 덮쳐오는 것이다. 


정신적 외상을 입은 사람들은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실망스러운 일을 겪을 때 섬세하게 반응하지 못한다. 대신 그 스트레스로 인해 ‘멍해지는’ 상태가 되거나 과도하게 표출한다. 어느 쪽의 반응이 나타나든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언짢은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상태는 신체에도 영향을 주고, 그 결과 자기 보호 능력이 사라져 또다시 희생자가 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널리 입증됐다. p.185


정신적 외상을 입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자기 보호 능력을 잃고, 다시금 상처를 받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무척이나 슬픈 일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반드시 외상이 존재한다. 외상 없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비교적 평화로운 상황을 보고도 끔찍한 결과만 상상할 수 있다면, 방에 들어온 사람이든 낯선 사람이든 화면이나 게시판에 걸린 모든 이미지가 재앙의 조짐으로 인식될 수 있다. p.201


모두가 졸고 있는 오후 한낮의 교실, 지진과도 같은 재해 상황이 발생하거나 좀비나 외계인이 출몰한다. 교실은 탈출하기 위한 아이들로 혼비백산인 상태가 된다. 잠들기 전 올려다 보이는 천장을 보면서 이 집이 과연 부실공사를 한 건물은 아닐지 걱정한다. 습관처럼 들려오는 뉴스 탓에, 횡단보도에 설 때면, 이무렇게나 질주하던 음주운전자의 차가 질주하며 달려오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렇듯 일상의 순간에서 재앙을 상상하는 것은, 살면서 간접적으로 듣고 보아왔던 것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내가 겪었던 일들이라면, 분명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고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넌 순간 끊어지는 상상에 그치지만은 않을 것이다. 


성장하면서 우리는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점차 배워 가지만, 자기 관리를 맨 처음 배우는 건 바로 우리가 돌봄을 ‘받는 방식을 통해서다. 자기 통제 기술을 습득하는 수준은 생애 초기에 양육자와 얼마나 조화롭게 상호 작용했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부모가 안락함과 힘을 충분히 제공해 준 아이들은 평생 그 효과를 누린다. 즉 운명이 건네는 최악의 순간도 견디는 일종의 완충제를 확보하는 것이다. p.204


어릴 적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정신과 폐쇄병동에 있던 어린 아이들, 제 각기 다른 모양의 상처를 품고 있던 아이들이 생각난다. 그 아이들의 불안과 트라우마는 타고난 성향이나 유전적인 소인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어른들이,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처음의 소중한 ‘돌봄’의 경험을 쥐어주었어야 할 어른들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한 경우, 아이들은 평생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게 된다. 이 트라우마는 성장하면서 옅어지거나 점차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온몸 깊숙한 곳에 껴안은 채 살게 된다.



“쪼개지고, 거부당하고, 알지 못하고, 원치 않고 의식의 곳곳 지하 세계로 쫓겨나고 추방당한 우리 자신의 일부, 그 일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밤바다 여행’이라고 한다. (…) 이 여행의 목표는 우리 자신과 재결합하는 것이다. 놀랄 만큼 고통스럽고 잔혹한 귀향이 될 수도 있다. 이 과정에 돌입하려면, 먼저 ‘무엇도 내쫓지 않겠다’고 동의해야 한다.” 스티븐 코프Stephen Cope p.225


모든 사람의 몸에는 알게 모르게 저마다의 트라우마가 새겨져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상처 하나 없이 반질한 몸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다만 상처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혹시 가벼운 생채기로 여겼던 상처가 피를 철철 흘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보고 살피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인간이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속해야 가장 중요한 과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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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전사 소은하 창비아동문고 312
전수경 지음, 센개 그림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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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하는 눈치 없고 특이하고 지구인 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 별명이 외계인이다. 하지만 은하는 게임 속 세상에서만큼은 보유행성이 278개나 되는 상위 랭킹 유저이다. 어느 날 손목에 별 무늬가 나타나게 되고, 엄마에게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책에서의 외계인은 지구를 빼앗고 침략하려는 공격적인 존재이기보다는 지구와 우주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무래도 내가 이미 커버린 어른이어서 예상 가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아 나 늙어버렸구나 싶어서 좀 슬프긴 했다.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지금과는 또 다른 것들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그게 좀 아쉽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머나 먼 땅에 정착해 임무를 수행하는 외계인의 모습이 신선했다. 주변을 둘러보면 어렵지 않게 ‘눈치 없고 특이한 지구말을 잘 못 알아듣는’ 사람들을 외계인이라 낙인 찍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초등학교, 혹은 이미 유아학교부터 ‘다름’이 놀림과 차별의 이유가 되고 상처 받는 아이들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다름’을 경계하는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사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500만 광년 떨어진 곳에서 온 우주인은 아닐런지. 살다가 눈치 없고 특이해 지구말을 잘 못 알아듣는 외계인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친절하게 대하도록 하자. 그 외계인 친구를 통해 우주 저편 어딘가를 만나게 될 수도 있으니까!



.

나는 연못보다 하늘이 좋다. 더 솔직히 말하면 하늘 저편이. 가끔 이 세상이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P13

별똥별 같은 우주적 사건 앞에서 ‘게임 레벨 승급시켜 주세요.’나 ‘인기 있는 아이가 되게 해게 해 주세요.’ 따위 소소한 소원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난 오래전부터 우주 평화를 빌어 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 P14

은하야, 애들 말에 신경 쓰지 마.
난 네가 지구인이든 외계인이든 상관없어.
너는 너니까.
나한테는 똑같은 소은하야. - P114

누구에게나 아무 방해 없이 숨을 시간과 공간이 필요해.
조용히 숨어서 기운을 충전하고 싶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PC방이야. - P125

우주 평화는 저절로 지켜진 것이 아니었다.
이름없는 이들의 헌신으로 유지되어 온 것이었다. - P152

지구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외계인을 놀리는 건 우스운 짓이야. 물론 헥시나가 지구를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말이야. 우주는 다양한 우주인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고 모든 우주인은 저마다 존재하는 이유가 있어.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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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함에 대하여 - 홍세화 사회비평에세이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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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 되물림된다면 그 반대편에 가난의 대물림이 있는데, 가난이 죄인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발언할 수 없을 때, 부러움이든 시기든 부의 대물림만을 바라보는 대신 대물림되는 가난을 바라보자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의 고통과 불행, 불안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목소리를 안간힘처럼 내보내는 것이다.


서문 살아남의 자의 미안함, p.8


 두어 달 전부터 구독했던 신문이 어느 순간부터 쌓이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시간이 넘도록 신문을 붙잡고 있던 날들은 이미 오래된 과거가 된 것 같다. 매일 세상을 챙겨 보는 일이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끼고 있다.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터지는 사건들과 각종 사고들을 가득 메운 신문을 읽다보면 어느새 피로가 몰려오곤 했다. 시간은 꾸준히 흐르고, 세상사는 나의 관심 없이도 훌쩍 진행되기 마련이다. 날짜가 지나버린 신문에는 이미 결론이 났고, 그 결론을 알고 있는 기사들이 실려 있다.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영화를 보듯 날짜가 지난 신문을 읽을 때는, 무감한 마음에 피로감 역시 덜어지는 느낌이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설 때마다 발에 채이는 따끈따끈한 신문을 볼 때면, 그렇게 그 신문이 하나둘 모여 어느새 한가득 쌓여 있는 신문들을 볼 때면, 매일 써야 하는 일기가 밀려 착잡한 심경이 되곤 한다. 그럼에도 구독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1년 정기 구독과 비누 다섯 개와 커피 두 잔을 맞바꾸어서이기도 하지만, 비비안 포레스테가 말한 것처럼 ‘무관심은 잔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악몽 같은 세상에서 잔인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첫 번째, 혐오스러운 세상을 개탄하며 그저 포기하는 ‘민주 건달’이 되고 싶지 않은 이유가 두 번째일 것 같다.

 나는 평소 ‘미안함’이라는 감정을 자주 느끼는 편이다. 뭐 하나 조금 못 해준 게 그렇게 미안하고, 이래도 미안하고, 저래도 미안하고. 조그만한 호의에는 그저 고마운 것이 아니라 그만큼 답을 해야겠다는 부담감과 함께 괜한 미안한 마음까지 드는 것을 건강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온정과 시혜를 필요로 하는 사회보다는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가 더 나은 사회라는 말이, 무척 아프게 와 닿았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서로의 온정과 시혜가 너무나 필요한 상태이고, 이는 곧 우리의 존엄성이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의미할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이 수면 밖으로 폭발해 터져나왔고, 또 일순간 수면 아래로 사라진 사건이 2014년 4월 16일에 있었다. 세상은 꾸준히, 정말 잔혹할만큼 성실하게도 흘러가기 때문에 금세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버렸다. 세월호는 2017년 인양되어 그 모습을 드러냈지만, 여전히 여러 의문을 지닌 채 심해 속에 잠겨 있다.



매일 평균 다섯 명이 산재 사고로 사망하고 38명이 자살하는 사회. (p.118)

우리의 몸이 거하는 모든 곳, 그러니까 집과 배움터 그리고 일터에서 자유로운 주체이기가 어려운 사회. (p.13)

수학여행을 가다가 한꺼번에 수장되고

일하다가 직업병으로 죽어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사회. 청춘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지 않는 사회. (p.25)

남을 설득하기를 포기한 사회. 설득되기를 포기당한 사회. (p.71)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을 택한 사회. (p.74)

사유 없이 자신의 처지나 정체성과 동떨어진 의식 세계만 갖고 그것을 고집하는 사회. (p.98)

타인의 온정과 시혜가 너무나도 필요한,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된 사회. (p.116)

일제의 앞잡이였던 자를 법이 아닌 암살로써만 그 죄값을 치르게 할 수 있는 사회. (p.135)

20세기 초 타이타닉호의 선장과 선원 같은 선장과 선원을 찾을 수 없는 사회. (p.157)


 
 헬조선. 작금의 한국 사회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적나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숨이 막힐 만큼 머릿속이 복잡했고 암담했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왔다니, 살고 있다니, 살아가야 한다니. 이 나라를, 그냥 포기해버리고 싶은 심경이 된 찰나 마주친 책의 마지막 구절이 있었다.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다시금 절감한다. 하지만 좌절하지도 포기하지도 말자. 자칫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의 하나는 개탄하는 것으로 자신의 윤리적 우월감을 확인하면서 자기만족에 머무르는 것이다. 실상 세상이 혐오스럽다고 개탄하기는 쉬운 일이다. 개탄을 넘어 분노할 줄 알아야 하고, 분노를 넘어 참여하고 연대하고 설득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기존의 생각을 고집하기 때문에 설득하기 어렵고, 그래서 설득하기를 포기한다면, 세상의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의미 있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다시금 되새기자.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우리가 가야 하는 것이다.


p.239

 ‘민주 건달’이 되기를 경계하고, 잔인할 만큼 무관심한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저자의 마음이 느껴져서. 그 마음에 포기해 버리려던 것이 또 미안해져서. 그 자포자기의 마음을 다시 접어 깊숙이 넣었다.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현실에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전혀 들지 않을 때까지, 그런 감정을 들게 하는 일들이 사라질 때까지는, 그 마음을 꺼낼 일이 없었으면 한다. 저자의 말대로 의미 있는 일은 언제나 어렵기에, 다름아닌 우리가 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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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 되물림된다면 그 반대편에 가난의 대물림이 있는데, 가난이 죄인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발언할 수 없을 때, 부러움이든 시기든 부의 대물림만을 바라보는 대신 대물림되는 가난을 바라보자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의 고통과 불행, 불안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목소리를 안간힘처럼 내보내는 것이다. - P8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다시금 절감한다. 하지만 좌절하지도 포기하지도 말자. 자칫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의 하나는 개탄하는 것으로 자신의 윤리적 우월감을 확인하면서 자기만족에 머무르는 것이다. 실상 세상이 혐오스럽다고 개탄하기는 쉬운 일이다. 개탄을 넘어 분노할 줄 알아야 하고, 분노를 넘어 참여하고 연대하고 설득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기존의 생각을 고집하기 때문에 설득하기 어렵고, 그래서 설득하기를 포기한다면, 세상의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의미 있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다시금 되새기자.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우리가 가야 하는 것이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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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배우는 시간 -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슬기롭게 죽는 법
김현아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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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이 싫었던 이유라면 백 가지도 댈 수 있지만, 가장 싫었던 이유는 언제나 하나로 귀결되었다. 병원은 죽음을 배우고 죽음에 무뎌져야만 하는 공간이었다. 내가 매달 받았던 월급은 사람의 죽음에 점점 무뎌지는 데에 대한 대가였고, 그래서 그 총합은 항상 모자랐다. 한 사람의 죽음이 유가족에게 슬픔만을 남기지는 않는다는 것을, 기나긴 투병을 거쳐 이르게 된 죽음이 남은 자들에게 형벌같은 짐을 지운다는 것을 알아버렸기에. 고작 그만큼의 월급과 간호사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죽음 앞에 슬퍼할 권리를 맞바꾸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첫 환자의 죽음에 대해 환자의 보호자보다도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p.29




 한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에는 생각보다 많은 타인의 인력과, 인내와, 시간과 비용이 든다. 삶도 죽음도 아닌 경계에서 너무나도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는 것이다. 의료진이 병원에서 가장 많이 목격하게 되는 것은 죽음, 그러나 가장 배우기 어렵고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 역시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에 무뎌지기를 포기한 나는 병원을 떠나기를 선택했다.
 현대의학이 너무 발달해서, 혹은 애매하게 발달해서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 병원에서 무의미하게 하루하루 시들어가도록 만든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항상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인간의 존엄은, 죽음 앞에서 생각보다 지켜지기 어렵다. 타인의 손을 빌려 모든 기본위생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러한 것이 지켜질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병원에서 존엄을 잃은 채  삶의 마지막을 보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죽음은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최악이자 최대의 사건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일생일대의 사건에 대해 새 자동차를 구입할 때보다도 준비를 덜한다.

p7.



이 책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삶의 어느 시점에서 언제든 겪을 수 있는 죽음과 함께 일상을 지내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래서 갑작스레 죽음과 대면하게 된 보통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무의미한 치료로 하루를 채우며, 고통 속에 삶을 끝내고 있음을 직시한다. 
 내과 병동에 근무했을 적, 췌장암을 진단받은 할머니가 계셨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췌장 말기, 복수가 찬 배 때문에 며칠 째 몸을 바로 뉘이지도 못하던 할머니가 힘겹게 내뱉은 말이었다. 수시로 주사바늘을 쥐어뜯어 애를 먹이고, 복수를 빼내던 중 혈압이 뚝 떨어져 한바탕 온 병동에 소란이 일었던 후에 할머니가 했던 말이었다. 그 말에 진땀 내며 바삐 움직이던 몸에 맥이 탁 풀렸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언제부터였을지도 모를 금식 중이었다. 그 혼돈한 말에 내 머릿속도 혼돈에 빠졌다.

 가망 없는 숨을 억지로 연명하며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 하나 입에 대지도 못한 채 희미해지는 삶의 말로. 이게 과연 치료인가. 내가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치료가 맞는가. 억지로 혈압을 올리고, 억지로 억지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고 있지만, 이건 치료도 무엇도 아니지 않나. 여기 할머니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그럴 바에는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 한 입 먹는 게 낫지 않을까.





병원 중환자실은 일시적인 문제로 생명이 위독해진 환자들이

의학적인 시술의 도움으로 위험한 시기를 넘기고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존재한다.

원칙은 그렇지만 현대의료에서는 이런 원칙이 너무나 빈번히 깨져버린다.


누구도 "이제 그만"이라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을 말하기 싫어하는 의사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환자 가족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하에, 중환자실은 환자가 임종을 맞기 위한 장소로 급속히 변질되어가고 있다.

p.71




 그럼에도, 할머니의 말은 온전치 못한 의식에서 한 말로 치부되어 아무도 귀담아 듣는 이가 없었다. 보호자조차. 그런데 그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힘겹게 뱉은 말은, 그건 사실 정말 할머니가 간절히 원했던 게 아닐까. 그러나 먼 친척들까지 몰려와 둘러 모인 보호자들의 표정들이 하나같이 냉담했기에, 아이스크림 하나를 구해서 몰래 할머니의 손에 쥐어주고 싶은 마음은 내 몫이었다. 아니, 이런 걸...... 이런 걸 치료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식의 일이 반복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러한 일상을 견딜 수 없었던 건 내가 무르고 유약한 탓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내가 한 행위는 치료도 간호도 아니었다. 어찌됐던 할머니의 상태는 악화될 수밖에 없었고, 중환자실로 이실된지 일주일만에 할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하지만 어떤 시점에 이르면

누군가 "이제 그만"을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의문도 든다.

p. 37


여전히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밤이면 퉁퉁 부은 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할머니는 그래서, 떠나기 전 아이스크림을 먹었을까.

병원은 치료를 위한 곳이다. 삶의 말로에서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결코 치료가 아니다. 현대의학으로 못 고칠 병은 없다는 인간의 교만일 뿐이다.






국가는 그 구성원의 삶을 개선하는 데 힘쓰는 만큼

죽음의 질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는 데에 공감대가 이루어졌다.

p. 88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자신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며 살아가지만, 그 삶의 마지막의 질이 어떨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당장 하루하루 살기 바쁘기 때문에, 당면한 문제가 많기에, 국가 역시 개개인의 죽음의 질을 고려할 여력도 이유도 없어보인다. 하지만 죽음의 질만큼 한 사람의 여생이 어땠는가를 대변할 수 있는 지표도 없다. 그럼에도 국가가 죽음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망자는 말이 없기 때문일까. 그 노력을 알아줄 사람 역시 없는 탓일까.
 문득 길을 건너다, 버스 안에서, 나를 스쳐가는 차들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가장 끔찍한 상상을 떠올리곤 한다. 졸린 눈을 부릅뜨자 부옇게 흰 천장이 보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가물거리는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흰 천장과 가끔 눈 앞에 어른거리는 의료진 혹은 울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다. 전신이 마비되어 의식도 없이, 혹은 의식만 남은 채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온 몸에는 여러 선들이 얽혀 연결되어 있고, 어느 한 곳이 설령 간지럽거나 불편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목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간호사가 수시로 다가와 들끓는 가래를 억지로 뽑아낼 때면 고통스럽다. 차라리 의식이 없다면 감사할 일이고, 의식이 있다면 감옥에 갇힌 기분으로 여생을 누워 지내게 될 것이다. 이게 무슨 해괴한 상상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언제 어디서든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러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충분한 삶을 살아가지만, 아무도 이러한 상황을 상상하지 않는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이러한 불행한 사건이 발생할 위험성까지 염두에 두는 사람은 없다. 그러고 싶지 않아 한다. 상상하기도 싫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부정한 일로 여긴다. 안타깝고 불행하지만 내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로 치부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우리의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미리 자신의 죽음의 질에 대해 염려해야 한다. 나의 의지가 남아 있을 때, 내 죽음의 삶을 최대한 향상시킬 방법을 생각해두어야 한다.

의료 전달 체계가 엉망이라는 것은

'빅 4' 병원의 외래 진료실이 경증 환자로 미어터지는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p.59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가시가 온 발바닥을 아프게 하는 것처럼, 인간의 몸은 생각보다 약하고 섬세하다. 그런 인간에게 죽음이란 한없이 무섭고 두려울 수밖에 없는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당장 수도권만 벗어나도 소위 말하는 '제대로 된 병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확률이 뚝뚝 떨어진다. 위급한 환자가 병원에서 병원으로 이송을 거듭하다 골든타임을 놓치고 길에서 숨을 거두게 되는 사건이 이러한 현실을 대변한다. 반면 수도권의 대형병원, 대학병원이라는 곳에는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온몸을 아프게 한다며 건강에 대한 염려로 병원 쇼핑 중독에 걸린 사람들이 가득하다. 
 여느 응급실에서나 심폐소생술 중인 환자의 옆에서 자신의 순서가 먼저라며 의료진을 보채며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먼저 온 순서대로 진료를 보는 것은 곧, 위급한 환자를 포기하고 시작하는 의료체제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는 것일까.


죽음이 병원으로 떠넘겨진 다음 수순은

당연히 죽음이 치료해야 하는 질병으로 둔갑하는 거예요.


요즘은 한술 더 떠서 노화조차도 치료가 필요한 병으로 치부되고 있지요.

p.81


온통 흰색과 기계와 알 수 없는 선들과 모르는 사람들이 오가는 병원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웃으며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싶다. 그러한 행운이 내게도 올지는, 아마도 그 시점이 오기까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행운이 내게 올 확률을 높이는 일 뿐이다. 죽음은 어느 날 불현듯 찾아올 수도 있지만, 대체로 노화의 과정으로 맞이할 가능성이 더 크기에. 우리에게는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선택할 여지가 어느정도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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