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물었다 -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있느냐고
아나 아란치스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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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학의 권위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인간의 죽음과 임종에 관한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평생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곁에서 목도한 그녀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의 고백이 새롭다.

"타인의 죽음이 철창 안에 갇힌 호랑이라면 나의 죽음은 그 철창을 뛰어넘어 나온 호랑이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이하게 될 죽음을 절대 타자화하고만 싶은 인간의 숨겨진 본능이다.

죽음이란 이처럼 모든 숨 쉬는 존재에게 있어서 거부하고만 싶은 영원한 불청객이다.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침상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한때 웰빙의 중요성이 세찬 바람처럼 온 세상에 휘몰아쳤다. 이후에는 웰다잉이라는 인문학적 개념이 호숫가의 파동과 같이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잔잔하게 퍼졌다. 인간으로서 품위 있게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이 잘 먹고 잘 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인생의 이슈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요 며칠 나의 영혼에 잔잔한 정동을 일으킨 저작 <죽음이 물었다>는 잘 죽는 것에 대한 깊은 통찰이 녹아있는 인문 에세이다. 브라질의 완화의료 전문가 '아나 아란치스'는 20여 년간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고통에 응답하며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끝을 살폈다.

완화의료란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줌과 동시에 남은 시간 인생을 의미 있게 정리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환자와 그 가족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도록 돕는 모든 의학적 노력으로 정의된다. 이야기는 저자가 어떻게 완화의료라는 생소한 의학 분야에 발을 내딛게 되었는지부터 시작된다.

결국 잘 죽는 것은 남은 삶을 잘 사는 것으로부터 기인한다.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이처럼 반어법적 정설이다. 책이 우리에게 주는 명징한 진리는 두 가지다. 첫째는 우리 모두가 죽는다는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다.


어떤 인생길, 어떤 인생 이야기이든 그 끝에는 예외 없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p145


둘째는 죽음을 매일의 일상에서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지혜로운 삶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이다. 염세주의자가 되라는 의미가 아니다. '메멘토 모리'라는 말이 유행이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문구가 가진 진의는 겸손이라는 삶의 덕목을 내포한다. 죽음을 기억할 때 지금의 삶 앞에서 겸손할 수 있으며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의식이 가지런히 정렬된다.



인생의 끝자락, 우리의 삶에 참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 감당할 수 없는 재물이나 뽐낼 수 있는 명예, 움켜쥔 권력인가? 저작 속에 빠져들수록 그러한 외적 조형물이 뿜어내는 가공된 가치가 사뭇 역겹다.

잘 살아온 삶이 잘 죽는 죽음을 정의한다. 책이 말하는 요지다. 우리의 마지막은 우리의 삶이 대변한다. 고통 속 의식이 혼미해지며 모든 오감이 이 땅에서의 마지막을 향해 불꽃처럼 타오르는 순간 남는 것은 내가 살아오면서 쌓아 올린 업적, 재물과 같은 폐기물이 아니다.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아왔느냐에 대한 짙은 물음만이 남는다.

우리의 인생과 삶이 유한하다는 인식의 제고가 사라진 시대, 폭주 기관차와 같이 브레이크 없는 인생을 내달린다. 이후 어느 순간 더 이상 달릴 철로가 없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한다. 실존의 유한성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 세대가 가진 아픔이다.

저자는 죽음의 침상 곁 환자들을 마주하는 완화의료의 일을 인생의 마지막 기차에 올라탄 이들을 배웅하는 플랫폼에 서 있는 것으로 비유했다. 지금은 함께 타고 떠날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 모두 그 열차에 승객이 될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삶이 눈부시게 투명해진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의 차이다. 누구도 동행할 수 없는 마지막 여행을 기다리며 오늘이라는 삶의 결을 보듬는다. 죽음에 관한 깊은 사유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더 잘 살아야겠다는 인생에의 의지로 부활한다.

저자는 완화의료라는 생소한 의학 분야를 통해 자신이 만난 다양한 인생과 죽음의 이야기를 부드러운 필치로 전달했다. 죽음을 직시할 때 삶은 더 맑아진다. 저자는 환자들을 배웅하며 자신과 우리의 끝을 미리 본다. 삶의 끝자락에서 후회함 없는 완벽한 마침표를 찍는 것!


모든 것은 죽지만 사랑은 예외다. 오직 사랑만이 당신 안에서 불멸의 가치를 지닌다. p262


저자의 결론,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일뿐이다.

책의 부제를 내 마음대로 정했다. '죽음이 묻고, 삶이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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