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탄생 100주년 기념 스페셜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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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한 남자의 눈이 갑작스럽게 멀었다. 이후 원인을 알 수 없는 실명 현상이 들불처럼 번지며 환자들이 늘어났다. 정부는 긴급 조치를 통해 실명 전염병을 백색 질병으로 규정한 후 실명자들을 옛 정신병원 건물에 강제 격리토록 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폐건물이 된 정신 병동에 강제 수용된 이후 이곳은 점차 생지옥으로 변해간다. 외부로부터 공급되는 식량은 언제나 부족했기에 굶주림과 싸워야 했고, 생리적인 현상을 아무 데나 해결해버림으로써 병동 곳곳은 어느새 사람들의 배설물과 악취로 가득찼다.

'주제 사라마구'의 장편 <눈먼 자들의 도시>에 나오는 이야기다. 소설이 내뿜는 열기에 숨이 멎는 것 같다. 눈먼 사람들 속에는 눈이 멀지 않은 여성 한 명이 존재했다. 작가는 이 여성의 눈을 빌려 눈먼 자들의 비참한 참상을 어떠한 여과 없이 날 것 그대로 묘사했다.

인간 본성의 심연을 그대로 까뒤집어 놓은 듯했기에 보는 내내 불편했고, 역겨웠다.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인간이 갖는 원초적 본능의 태도는 결코 예의 바르지 않다. 음식을 앞에 두고 주먹 다툼을 하며 아무 데서나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는 모습은 눈이 먼 직후 인간의 품위라는 실존의 의미를 무색게 한다.

나름의 질서가 있는 그곳에서 무질서의 원흉인 불법 그룹이 탄생한다. 권총 한 자루의 힘으로 수용소의 모든 음식을 장악한 이들이 벌이는 행태는 그야말로 약육강식 동물의 왕국이다.


음식을 먹기 위해 권총을 가진 눈먼 악당들에게 자신들의 아내와 여성들의 몸을 상납하는 무기력한 남성들의 추악한 이기심, 온갖 수치를 무릅쓰고 짐승들의 침실로 들어가는 눈먼 여성들의 비애가 머릿속을 혼란케한다.

작가가 참담한 현실을 너무 사실적으로 묘사했기에 짜증이 날 정도다.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에 갇힌 실험 쥐와 같이 독서하는 내내 지난한 통증이 마음을 메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인간 본성의 민낯과 알몸을 목도케 하는 불유쾌함이 가득하다. 이 책이 문단에 극찬을 받은 이유다.

눈이 보일 때는 우리 모두 가장 고상하며 아름답다. 누구 하나 다른 이들에게 해코지하는 이가 없고, 서로를 사랑하며 위한다. 인간 본성의 심원에 꾹꾹 눌려져 감추어 있는 원초적 이기의 씨앗은 문명의 온실 속에서는 결코 싹트지 않는다.

하지만 규율하는 제도의 공백과 질서의 진공 상태가 이루어지고, 거기에 작가가 설정한 눈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기본적 인간 능력의 상실이 혼합될 때 인간의 참 모습이 머리를 든다.



말미에 나오는 한 문장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중략)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p463


작가는 인간 실존의 의미를 제대로 꿰뚫었다. 모든 인간은 원래부터 눈이 먼 존재다. 자신이 보기 원하는 것만 보기 원하는 선택적 시각 능력이 인간 사회가 원래부터 눈먼 세상임을 말한다.

나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외면, 오직 나만을 바라보는 극도의 이기심은 인간이 원래부터 눈이 먼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훌륭한 반증이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 백색 질병의 출현이라는 인위적 상황 가운데 드러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인간에게 선함이 있는가? 책 전체를 뒤덮는 야만의 쓰레기와 폭압의 배설물은 원래부터 우리의 것이다. 하지만 눈먼 자들 틈 속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이웃을 돕는 눈이 보이는 유일한 여인의 존재가 그래도 아직은 세상이 살 말한 곳임을 기억케하는 작은 불씨가 된다. 작가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놓고 떠난 선물이다.

책을 읽는 내내 몇 개의 작품들이 오버랩된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과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다. 모두 다 추악한 인간 본성의 끝을 보여주는 데 있어 결이 같다. 질서의 부재가 가져오는 무질서와 혼돈, 그 안에서 자생하는 새로운 권력의 부패성과 이에 대항하는 소수가 가진 선의 의미에 대한 실재가 공통적이다.

인간과 짐승의 구분이 무색한 소설, 여건이 조성되면 인간도 짐승, 괴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이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 야만의 시대, 자신의 이기와 탐욕을 위해 마지막 남은 인간성마저 손쉽게 내던지는 작금의 시대를 작가는 정확히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최후의 확신이 뿌리째 흔들리는 경험, 한 번쯤 해 볼 만하다. 동시에 주제 사라마구의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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