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강신주 선생님의 책을 읽었다. 출근하는 길 버스 안에서, 퇴근길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서, 출장가는 기차안에서... 한 문장씩 한 단락씩 꼭꼭 씹어 읽었다. 쉽지는 않았다. 나는 시를 오랫동안 좋아해왔지만 여전히 어렵다.
문정희와 이리가레이, '유방암 검사를 받으며'는 열 번쯤 읽은 것 같다. 읽고 또 읽고... 엑스레이앞에 내가 얇은 병원가운을 입고 서 있는 상상을 했다. 차가운 느낌이 몸에 찌릿찌릿 와 닿으면서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정희와 시몬베유,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외로웠다. 외로운 충만감이 공기를 휘감았다. 가을이라 그랬을까. 주먹을 쥐는 다짐보다 하늘을 바라보는 다짐이었다. 그래도 어찌되었든 다짐은 다짐이다.
한용운과 바르트의 연꽃... 그토록 고요한 풍경이 참으로 격정적인 줄 몰랐다. 침묵이 참 꽉 찬 공기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것은 프롤로그다. 프롤로그라니. 내가 써놓고도 괜히 우습다. 많이 배웠다. 한문장 한문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목소리로 노래하는 시인과 철학자들. 인문정신의 소망..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는 달리 ‘고유명사’의 학문입니다. 수많은 시인과 철학자들은 자기만의 목소리로 무엇인가를 노래하거나 논증합니다. 그들의 시와 철학에는 유사성은 있지만 공통점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김수영의 시와 신동엽의 시, 그리고 바흐친의 철학과 바르트의 철학이 유사하지만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시인과 철학자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데 성공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시인과 철학자들의 궁극적 유사성은 바로그들이 자기만의 제스처와 스타일을 완성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시와 철학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도 그들처럼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문정신의 소망입니다. _17~18쪽_<프롤로그> 중에서
시와 철학에 별 취미가 없는 사람들이라면 하품이 날지도 모른다. (정말일까?) 그러나 둘 중 하나에라도 마음이 있는 독자라면 개인적인 평이야 어떻든 끝까지 읽게 될 것 같다. 짧게나마 끄적인 수준낮은 개인적 감상을 다시 읽어보니 나에게 아직 철학은 어렵나보다.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개인적인 독서였다. 그러나 좋았다. 어려웠지만 반가웠다. 저자의 전작은 꼭, 반드시, 조만간 읽어보리라고 다짐 쾅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