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바보가 되었나
마르탱 파즈 지음, 용경식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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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성이란 잘 설계되고 멋있게 발음되는 어리석음을 가리키는 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성은 너무나 타락해서 이제는 공인된 지식인이 되는 것보다 차라리 바보가 되는 것이 훨씬 유리할 때가 많다는 것을 종종 보아왔다. 지성의 눈속임이 신문의 영원성과 자기들이 읽은 것을 믿는 사람들의 감탄을 불러일으킬 때, 지성은 불행과 외로움과 가난을 가져온다.
                                                                               pp.5~6

 
 사람들은 언어와 생각으로 세상을 단순화시켜놓고 확신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확신을 가진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쾌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돈보다도 섹스보다도 집중된 권력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가집니다. 진정한 지성의 포기는 확신을 갖는 대가로 치러야 할 값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양심이라는 은행에서 치러야 할, 보이지 않는 비용이니다.

                                                                                  p.86


 "넌 균형을 잡아야 해."

 강자가 말했다.

 "그래, 그게 안 되면 균형 잡힌 불균형이라도 좋고."

                                                                                   p.96


 "그것 또한 예상되는 위험이지. 하지만 바보가 되는 것은 지성의 굴레 아래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기쁨을 가져다 주거든. 그렇게 사는 것이 더 행복한 것은 확실해. 나는 어리석음의 의미를 지키는 것이 아니야. 하지만 미량원소처럼 그 속에 녹아 있는 유익한 원소들, 즉 행복을 간직하겠어. 일정한 거리, 공감함으로써 받는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삶과 정신의 가벼움을 간직할 거야. 무사태평!"

                                                                                  p.126

 

마르탱 파즈, 『나는 어떻게 바보가 되었나』中

 

+) 소설의 주인공 앙투안은 "지성은 곧 질병"이라고 생각하며 "지성은 미친 말"이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역자는 소설에서 '지식'과 '지성'을 각각 달리 사용하여 번역하였는데, 그것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지식과 지성, 그 차이는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지식과 지성은 다음과 같다.

지식 : 1.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 2. 알고 있는 내용이나 사물. 3. 철학분야에서는 인식에 의하여 얻어진 성과, 사물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적 경험적 인식을 말하며, 객관적 타당성을 요구할 수있는 판단의 체계를 이른다.

지성 : 1.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 넓은 뜻으로는 지각이나 직관, 오성 따위의 지적 능력을 통틀어 이른다. 2. 심리학 분야에서는 새로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에, 맹목적이거나 본능적 방법에 의하지 아니하고 지적인 사고에 근거하여 그 상황에 적응하고 과제를 해결하는 성질을 이른다.


지식과 지성 사이에 '직관'이나 '오성'이 존재한다. 앙투안이 바보가 되려는 것은 지식 때문이 아니라 지성 때문이다. 즉 그는 끝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자신의 지성때문에 바보가 되려고 한다. 지성은 지식만이 아니라, 직관 그러니까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감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이성과 감성으로 자신을 움직이는 지성인때문에 앙투안은 바보가 되려한다. 물론 그 이면에는 사회생활에 부적합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라는 중요한 이유도 숨어 있다.


알코올중독자가 되려고 하고, 자살을 하려고 하는 것은 그가 결정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사회 속에, 사람들 사이에 융합할 수 있는 하나의 방책으로 그것들을 선택한 것이다. 앙투안은 자신이 지성인이기 떄문에 사람들과 쉽게 어울릴 수 없으므로 바보가 되려고 생각한다.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되면, 사람들과도 쉽게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떄문이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그의 지성이 아니다. 앙투안의 문제는 바로 '사회 속의 개인(앙투안 자신)'이다. 사회라는 조직체에서 유기적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동떨어져 지내게되는 스스로를 인정할 수 없어서, 그는 끝없이 자신을 방어하는 변명을 만든다.


사실 앙투안은 군중 속의 고독을 겪으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한 개인의 상징이다. 이 소설은 '군중'보다 '고독'에, '사회'보다 '개인'에 주목하고 있다. 개인의 행복으로 앙투안이 선택한 것은 바보가 되는 길이었다. 바보가 되어 군중의 한 사람으로 통합되어 지내면, 그것이 그의 삶에 하나의 행복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성인이라는 변명은 왜 필요했을까. 그것은 앙투안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마지막 핑계와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성인과 비지성인의 구분에 '양심'과 '소통'을 잣대로 세운 앙투안은 비지성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를 "바보"라 불렀다. "유령처럼", "사라진 사람들처럼" 행동하여 쉽게 사회에 편입하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이 바로 "바보"다.


그는 바보가 되려고 했고, 그것으로 행복해지려고 했으며,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속하기를 바랬다. 바보가 된 과정보다, 바보가 되려는 이유가 훨씬 의미있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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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바람의 사생활 창비시선 270
이병률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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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인의 방향

 
 십년도 더 전에 나 살던 집 오르막길 숲 앞에 작은 언덕 하나


 한데 그곳에 올라 숲을 내려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들으라는 남의 말을 듣지 않은 것만 같아 무작정 무거워져 소란하다

 
 동네의 눈부신 평화로움과 그 주변 곳곳에서 내가 안심을 배웠다는 사실을 떠올리자니 미안해지다 마음 자꾸 깜박거리다

 
 글자 없는 책은 맘에 들고, 모순 없는 책은 경쾌해도 그 사이 머리는 좁아지고 심장이 졸아드는 것은 이만큼이라도 나를 끌고 왔기 때문은 아닌가 하다

 
 내리막길이 좋아지는 것도 다 어깨는 내려앉고 발치의 밑동은 쓸리고 마는 생의 기울기 때문은 아닌가 하다

  나를 죽이고 싶다던 한 사람 마음을 거절한 적 있는데 지금쯤 그 사람은 잘살까 마음이 쓰이다

 

이병률, 『바람의 사생활』中

 

 

+) 이 시집을 집어들고 몇 편을 읽다가 머뭇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쉽게 들어오지 않는 내용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서 시가 잘 읽히지 않았다는 말이다. 일상어를 사용하여 일상을 이야기하는데 왜 그렇게 편하게 들어오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의 시가 지나치게 자기 안에 갇혀있는 것은 아닐까. '나'라는 시적화자가 세계와의 소통을 원하기보다, 오히려 스스로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접한 이 시집은 오히려 자신에게서 시작된 모든 감정들이 발산되기를 간절히 바란이의 목소리가 느껴졌다. "삼라만상이 내 말을 믿었음 한다"([탄식에게])는 화자의 목소리, 벽 뒤에서 잠시라 믿으며 살기도 한 사람([사랑의 역사]), 그는 오래전부터 "먼 곳을 보려 했지만 먼 곳은 보이지 않"는([외면]) 삶을 산 존재가 바로 화자다. 

 
화자는 자기 안에서 울리는 소리를 벗어나, 저 먼곳을 치고 돌아오는 메아리에 마음을 쓰고 있다. 그가 겪는 대부분의 상황은 현실의 한 시점이다. 각 시마다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를 읽을수록 화자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그 상황에 대응해가는 그의 태도도 짐작할 수 있다. 일상에 녹아있는 관념, 그것은 단순한 배열이 아니다.


이는 그가 "그럴 수 없는 일이 그렇게 되고 마는"([달에게 보내는 별들의 종소리]) 生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매순간 반복되지만, 결코 같지만은 않은 역설적인 삶. 누구나 겪는 것 같지만, 모두 다 경험하는 것은 아닌 일들. 매 순간 우리를 머뭇거리게 만드는 어떤 것들이 그와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에게 현실은 자신과의 교감으로 이루어진다. 사랑도, 시간도, 목숨도 그에게는 "모른 체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자신을 다독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은 자신에 대한 다짐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바람"([바람의 사생활])처럼 그의 마음도 끝나지 않았다. 화자에게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이어짐일 뿐이다. 끝난 것은 없으며 끝날 것도 없다. 


슬픔이나 쓸쓸함에 익숙한 것도 혼자라는 시공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습성 때문이다. "과도한 세상이 다시 그를 결박하지 않기를 / 그가 더이상 모두를 미워하지 않기를"([아무 것도 아닌 편지]) 바라는 마음은 억압에 대한 해방의 외침이다. 한편으로 그러한 마음은 그에게서 현실을 지켜내는 힘이 되기도 한다.


이 시집에는 유달리 "아무"가 많이 등장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특별히 지정하지 않고 쓰는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그것을 잃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당신이 누구인지, 주변의 사물이 무엇인지, 생은 어떤 것인지 지정하는 것은 그것을 잃는 일이다. 적어도 시인에게 정의 내리는 것은 곤란한 사유의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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