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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사생활 창비시선 270
이병률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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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인의 방향

 
 십년도 더 전에 나 살던 집 오르막길 숲 앞에 작은 언덕 하나


 한데 그곳에 올라 숲을 내려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들으라는 남의 말을 듣지 않은 것만 같아 무작정 무거워져 소란하다

 
 동네의 눈부신 평화로움과 그 주변 곳곳에서 내가 안심을 배웠다는 사실을 떠올리자니 미안해지다 마음 자꾸 깜박거리다

 
 글자 없는 책은 맘에 들고, 모순 없는 책은 경쾌해도 그 사이 머리는 좁아지고 심장이 졸아드는 것은 이만큼이라도 나를 끌고 왔기 때문은 아닌가 하다

 
 내리막길이 좋아지는 것도 다 어깨는 내려앉고 발치의 밑동은 쓸리고 마는 생의 기울기 때문은 아닌가 하다

  나를 죽이고 싶다던 한 사람 마음을 거절한 적 있는데 지금쯤 그 사람은 잘살까 마음이 쓰이다

 

이병률, 『바람의 사생활』中

 

 

+) 이 시집을 집어들고 몇 편을 읽다가 머뭇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쉽게 들어오지 않는 내용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서 시가 잘 읽히지 않았다는 말이다. 일상어를 사용하여 일상을 이야기하는데 왜 그렇게 편하게 들어오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의 시가 지나치게 자기 안에 갇혀있는 것은 아닐까. '나'라는 시적화자가 세계와의 소통을 원하기보다, 오히려 스스로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접한 이 시집은 오히려 자신에게서 시작된 모든 감정들이 발산되기를 간절히 바란이의 목소리가 느껴졌다. "삼라만상이 내 말을 믿었음 한다"([탄식에게])는 화자의 목소리, 벽 뒤에서 잠시라 믿으며 살기도 한 사람([사랑의 역사]), 그는 오래전부터 "먼 곳을 보려 했지만 먼 곳은 보이지 않"는([외면]) 삶을 산 존재가 바로 화자다. 

 
화자는 자기 안에서 울리는 소리를 벗어나, 저 먼곳을 치고 돌아오는 메아리에 마음을 쓰고 있다. 그가 겪는 대부분의 상황은 현실의 한 시점이다. 각 시마다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를 읽을수록 화자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그 상황에 대응해가는 그의 태도도 짐작할 수 있다. 일상에 녹아있는 관념, 그것은 단순한 배열이 아니다.


이는 그가 "그럴 수 없는 일이 그렇게 되고 마는"([달에게 보내는 별들의 종소리]) 生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매순간 반복되지만, 결코 같지만은 않은 역설적인 삶. 누구나 겪는 것 같지만, 모두 다 경험하는 것은 아닌 일들. 매 순간 우리를 머뭇거리게 만드는 어떤 것들이 그와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에게 현실은 자신과의 교감으로 이루어진다. 사랑도, 시간도, 목숨도 그에게는 "모른 체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자신을 다독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은 자신에 대한 다짐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바람"([바람의 사생활])처럼 그의 마음도 끝나지 않았다. 화자에게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이어짐일 뿐이다. 끝난 것은 없으며 끝날 것도 없다. 


슬픔이나 쓸쓸함에 익숙한 것도 혼자라는 시공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습성 때문이다. "과도한 세상이 다시 그를 결박하지 않기를 / 그가 더이상 모두를 미워하지 않기를"([아무 것도 아닌 편지]) 바라는 마음은 억압에 대한 해방의 외침이다. 한편으로 그러한 마음은 그에게서 현실을 지켜내는 힘이 되기도 한다.


이 시집에는 유달리 "아무"가 많이 등장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특별히 지정하지 않고 쓰는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그것을 잃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당신이 누구인지, 주변의 사물이 무엇인지, 생은 어떤 것인지 지정하는 것은 그것을 잃는 일이다. 적어도 시인에게 정의 내리는 것은 곤란한 사유의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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