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릿속의 개들 - 제11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이상운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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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중심을 그에게로 옮기면서 내 외로움은 오히려 더 커졌어요."
 "모든 만남은 원초적 고독을 가르쳐주죠."

                                                                            pp.80~81

 

 저는 절망하여 생각했습니다. 박사님, 욕망은 독재적인 것입니다. 민주적인 욕망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약육강식은 인간에게 합당한 체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체제는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교환할 수 있고, 교환해야 한다고 세뇌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전혀 교환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이 체제는 모든 것이 교환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교환 가능하다는 그 편집증만 교환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속아서 칼을 빼든 아둔한 검투사들일 뿐입니다.

                                                                                   p.92

 

 "자네 혹시 인간은 도덕적인 자들과 부도덕한 자들, 이렇게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네, 어쩌면......"

 "틀렸네."

 저는 답을 기다렸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자기 이상을 실현할 능력이 없어서 타락과 타협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파멸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무력하고 비열한 존재라네."

 "네, 선생님."

 가느다랗게 한숨을 토해내고 나서 선생님은 말을 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두 종류인가?"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

 "자신이 무력하고 비열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라네."

                                                                         pp.121~122

 

이상운,『내 머릿속의 개들』 中

 

 

+) 자본주의 세태에 대한 냉소와 풍자, 현대인들이 '인간'으로 판단하는 조건, 사랑과 욕망에 대한 현실적인 관점 등이 바탕에 깔려 있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비만으로 거대한 몸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여자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 여자를 변화시키기보다 그와 닮아 가려는 한 남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상대가 변하기를 기다리기보다 자신이 변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개들을 아무리 꺼내도 끝없이 나오는 것, 그것은 욕망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에 대한 집착이 '나'에게도, 누구에게도 '개'로서 형상화되어 드러나고 있다.

 

'장말희'가 집착하는 "설탕"이나 "사랑"은 사실 버릴 수 없는 욕망이다. 그녀가 집착하고 갖고 싶어하는 것. 주인공 '고달수'가 원하는 "돈"과 "여자"(섹스라고 해두자), '마동수'가 갈망하는 "그림"과 "섹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인간이 원하는 욕망의 하나로서 묘사된다.

 

거침없이 소설을 읽었지만, 다 읽고나면 제법 우울한 기분을 전달한다. 자본주의 세태이기 떄문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모두가 갖고 있는 욕망에 대한 집착을 확인하게 되기 떄문이다. 그리고 그 욕망의 끝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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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장남자 시코쿠 랜덤 시선 4
황병승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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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부드럽고 딱딱한 토슈즈

 

 

나 아끼코는 그렇게 하는 것이 나쁘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나빠요 싫은 행동이에요, 라고 말하는 순간

나 아끼코가 더 나쁜 사람이 되고 마는 건 왜일까

그렇다고 침묵을 하면 뭔가 달라질까

그래도 역시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

 

나 아끼코를 초(超)비참하게 만들지 않는 한

앞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꼭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라고 타협을 할까 한다

 

저녁에는 극단(劇團)의 언니 오빠들과 함께 장어 멍게 해삼을 먹었다

그것들의 공통점은 물에서 산다는 것이지만

그것들이 얼마나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지는 모르겠다

서로 얼마나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인지도

나 아끼코는 모르겠다

 

장어 한 번 멍게 한 번 그리고 해삼...... 이렇게 순서대로 먹었다 계속해서

뭔가 석연치 않으면서도 나 아끼코는 한껏 온아한 표정으로

건배를 하고 뉴스를 보며 오물오물 수다를 떨었다

 

아끼코 상! 아끼코 상! 그렇게 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다들 그렇게 한다는 것은 그것이 머리의 차가움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비옷을 입은 기자는

장마통에 집이 무너져 사람들이 깔려 죽었다고 전한다

나 아끼코에게 집이라는 건 빗소리를 듣기에 참 좋은 장소인데......

비 때문에 집이무너지고 사람들이 깔려 죽었다는 보도는

언제 들어도 즐거움과 초재미를 준다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  황병승의 시에서는 분열적인 주체가 등장한다. 황병승의 시적 주체는 어린 아이와 어른의 경계, 남자와 여자의 경계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 아이와 어른, 혹은 남녀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은 의미가 없다. 때로는 여장남자이고, 또 자궁 달린 남자이기도 하며, 페니스 달린 여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의 시적 주체는 혼성적이다. 그러나 고정되거나 완전하지 않은 시적 주체, 남자이기도 하고 여자이기도 한 존재가 그의 시에 불안정한 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환멸을 동반함으로써 슬픔을 자아낸다.

모호해지는 것은 성 정체성뿐만이 아니다. 시코쿠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흔들리고, 이동하고, 전도된다. 죽은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되고, 북향이던 집이 남향이 되고, 진실은 거짓을 위해 봉사하며, 진짜는 내 얼굴이 아니라 뒤통수가 된다. 이곳은 남성과 여성이, 삶과 죽음이, 안과 바깥이, 앞과 뒤고, 진실과 거짓이, 현실과 환상이, 자꾸 자리를 바꾸는 세계이다. 당연하게도 이 세계의 이질 혼재는 성 정체성이라는 ‘소재’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 것이다. 황병승의 문체, 즉 한문, 한글, 영어, 이탤릭체, 전각 기호 등의 혼합된 사용은 분열적인 시적 주체와 접목되어 그의 시에 카오스적인 의미를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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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152
이진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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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냄새

 

 

쉰 냄새는

지나친 냄새

모든 익은 것들이 이상해질 때는

쉰 냄새가 난다

분명 알맞게 익어서

처음에는 향기로웠을 그것이 쉬는 데는

수십 년 만의 이상 기온

섭씨 삼십팔, 구 도의 장마철 찌는 더위 한낮으로 금방이다

알맞게 익었던 그것이 향기로웠던 그것이

한낮 잠깐 사이

쉰다는 것은 슬픈 일

이상 기온뿐이 아닌 이상 정황 이상 심리 속에서일지라도

쉽게 쉰 냄새 피우지 않으려면

무엇을 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알맞게 잘 익은 다음에도

소금을 더

물기를 아주 싹

쉰 냄새는

지나친 냄새

모든 익은 것들이 익은 그 다음에도

어떻게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한다면

이상 기온도 탓은 탕시지만

그보다 먼저 스스로

무엇을 속에 계속 넣고 있지 말고 비우기를

자리를 고집하지 말고 구멍 숭숭한 허한 곳으로 나가 앉기를

 

이진명,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中

 

 

+) 이 시집에는 공간이 중요하다.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화자가 머무를 수 있는 심리적인 공간이 존재한다. 그것이 동굴이든, 집이든, 길이든 화자에게 그 공간은 도착지가 된다. 편안히 쉴 수 있는 안정된 공간. 화자는 그것을 소망하는데 늘 거기까지 가는 주변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하나 하나 세밀하게 살펴보는데, 그 과정은 화자 내면의 길찾기가 된다.

 

화자는 길을 잃어버린 존재가 아니다. 출발지도 있으며 목적지도 있고, 도착지도 알고 있다. 그에게는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거기까지 자신이 어떻게 견뎌내는가가 더 의미있다. 물론 여담이다 싶을 정도로 잡담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순간의 장면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긴 시간의 과정을 잡아내는 화자의 시선 때문이다. 그에게 과정은 전부가 된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시인의 다양한 화법이 신기했는데. 한 사람이 쓴 시집답지 않게 꽤 다양한 필법이 돋보였다. 다른 시집을 한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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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문학과지성 시인선 108
장석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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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집을 읽는 오후

 

 

하루종일

가는 빗발들이 날개 달고 떠다닌다.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막 중환자실을 나서는 환자 같은 하늘을

철없는 비둘기들이 연한 부리로 무심코 쪼고 있다.

절망한 것도 아니고

공연히 헛것에 홀린 것도 아니다.

 

세상에 딱 한 번 새로 오는 봄이

길 잘못 든 사람처럼

방범대원 없는 주택가 빈 골목길을 서성거린다.

 

지금은 죽은 자에 대한 기억들로 심란해지는 때,

모든 완강한 죽음과 재의 차가운 시간을 딛고

무청에서 샛노란 움이 터오기 시작하는 때!

 

오후는 빠른 채무자의 발걸음으로 지나가버린다.

죽은 기형도의 시집을 덮는다.

 

 

장석주,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中

 

 

+) 이 시집에서 드러나는 '죽음'은 괴롭거나, 아프거나, 슬픈 것처럼 감정이 격화된 것이 아니다. 뭐랄까. 시인에게 죽음은 예정된 선로에서 만나는 일부분이랄까. 외롭게 걷다가 만나게 되는, 그리 반갑지 않은, 그러니까 어색한 벗 같다. 그것은 어둠과 외로움 속에서 발현하는데, 잊고 있다가 삶 위에서 순간순간 마주치게 된다.

 

시인에게 '비'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 소통의 역할을 한다. 비를 통해 죽은 자에게 접할 수 있다. 사는 것 자체가 상실과 절망을 동반한 일이지만 무엇보다 외로움 끝의 두려움이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때의 비는 위로의 손이 되어주기도 한다. 어쩌면 삶과 죽음을 같이 이끌고 가는 것처럼 비 역시 그의 삶을 무조건 받아주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희망을 간직하고 살지만 시인이 세상 속에 있는 한, 그것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세상을 버릴 수도 없다. 그가 느끼는 세상에 대한 담담한 시선은 마치 일흔이 다 된 할아버지의 관조적인 시선이랄까. 그렇게 다가왔다.

 

시집은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였는데. 감정이 격렬하게 일지 않아도 이렇게 무게감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그러나 주어진 소재가 한전된 느낌이 드는 것은 색깔이 너무 비슷한 시편들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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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72
유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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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中

 

 

둘은 서로의 기억 저편에 닫아둔 다락방에 대해 묻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욕망이란, 서로의 뇌수 뚜껑을 열어 그 은밀한 다락방을 들여다보고, 그 공간을 완벽하게 지배하고픈 것일지도 모른다 그 다락방조차 햇빛 가득한 창문을 내고 자신의 살림살이를 들여놓고 싶다는 욕망,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해될 수 있게, 다락방을 털어 재빨리 케케묵은 상처를 윤색하고, 비밀의 서랍을 정리해보지만, 그래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숨길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아니라, 원래 침묵의 편에 서 있는 것들이다 ( 두 사람 사이엔 침묵의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지금 이 순간의 '불타오름', 그리고 나머지는 온통 무심한 어둠, 그 불꽃의 저편은 내 격정의 영토와는 무관하다 그 어둠 속에, 내 불타오름의 '타인'인 내가 살고 있고, 그녀의 불타오름의 '타인'인 또 다른 그녀가 살고 있다

 

유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中

 

+) 이 시집을 읽으면서 문득 시의 '자유로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어째서 시가 자유롭다는 것을, 지상에서 멀리 떨어진 위치의 줄타기를 하는 기분일까. 어떤 작품은 시의 형식을 완전히 파괴하고 있는, 산문시도 아닌 마치 소설의 한 페이지같은 작품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형식적으로 연구분을 했을 뿐, 읽고 나니 몇 편의 산문을 섭렵한 것도 같다.

 

그러나 분명 그의 작품에는 시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물론 문학을 고상한 것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읽기에는 거슬릴 수 있는 표현도 있고, 이런 소재를 어떻게 쓰나 하는 대중적인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시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농후하다. 아, 이 사람은 시를 가슴에서 놓아본 적이 없구나, 싶었다.

 

그의 표현대로 "인생이라는 환각"에 대해, 그는 시로서 응답하고자 했다. "재즈"로 삶을 그리고 시를 만들고 길을 걸어간다. 이 시집을 좀 더 이해하려면 대중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인간적인 고정관념"뿐만 아니라 시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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