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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분의 사랑 ㅣ 오늘의 젊은 문학 8
박유경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월
평점 :
"사랑과 위로는 우연히 찾아온대. 둘 다 동시에 오면 운명이라고."
"너 하민이를......"
내가 말을 끝맺지 못하자 가현이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하민이 때문에 다른 사람 안 만나는 거야?"
가현이 말했다.
"때문에 아니고 덕분에."
가현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하민이가 다정한 걸 찾으라고 했어. 그럼 좀 낫다고. 바닥까지 내려갔을 땐 그래야 살 수 있다고."
p.20
"달의 앞면과 달리 뒷면은 상처투성이에요. 외계의 천체와 부딪친 크레이터가 무수히 많습니다. 지구에 사는 지구인이 오로지 달의 앞면밖에 볼 수 없는 것처럼 개개인이 받은 상처는 고유해서 누구도 그 상처의 깊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이클 콜린스가 말한 달의 뒷면은 마이클 콜린스 외에 누구도 본 적 없어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마주해도 사람들은 모두 다른 것을 보니까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을 보았는지 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말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지요. 이 책을 제게 보낸 사람은 그걸 아는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을 읽어보라고 표시를 해두었으니까요. 이해의 가능성은 우연에서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우연을 뛰어넘을 만큼 대단하지 않아요."
pp.26~27 [떠오르는 빛으로]
"빚은 천천히 갚으면 된다. 살면서 실수할 수 있다. 나쁜 생각은 하지 마라."
"유튜브에서 봤는데 세상에 남은 신성한 일 중 하나가 노동으로 돈을 버는 거라고 하더라. 새벽에 나가서 장 보고, 재료 준비하고 그러다 손님 맞으면 뿌듯해. 코인으로 돈 벌어봐라, 이런 기분 느낄 수 있는지. 하루가 꽉 찬다니까."
"너도 빚쟁이면서 뿌듯하긴 뭐가 뿌듯해. 일해도 남는 게 없다고 하면서."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
"그러니까 우리가 계속 이러고 사는 거야."
pp.114~116 [검은 일]
사람들은 여전히 아이의 욕망을 한 번쯤 듣게 되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라 결핍으로 해석하곤 한다. 욕망을 결핍으로 바라보면 교사는 권위자, 심판자로서 아이를 대하게 된다. 나는 들뢰즈가 말한 아이가 좋았고, 아이가 욕망을 통해 무엇을 생산하는지 발견하는 관찰자로서의 교사가 되고 싶었다.
p.122
비슷하게 가지지 못해 배제당하고 서러웠던 마음이 스물셋이 되어서까지 잘 잊히지 않았다. 가진 게 많으면 있는 것을 누리며 없는 것을 드물게 떠올리지만, 가진 게 없으면 없는 것에만 매달리게 되는 것 같았다. 원하는 걸 갖지 못한 지금의 경험이 차이를 느낄 때마다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데 쓰일까 봐 조바심이 났다.
p.128 [변신을 기다려]
질병이나 사고 같은 건 합의되지 않은 상태로 찾아올 텐데 그런 일이 생겼을 때를 견뎌주지 않는 관계를 연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내가 지금껏 좋다고 여기며 맺었던 관계란 작은 입김 하나에도 무너질 수 있는 것이었으며 그건 앞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든 되풀이될 게 분명했다.
p.182 [루프]
박유경, <여분의 사랑> 中
+) 이 책은 박유경 소설가의 단편소설 7편을 실어놓은 단편소설집이다. 작가는 소외받거나 소외당했다고 생각하는 인물들의 모습에 주목하여 객관적인 거리에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묘하게도 작가는 분명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읽다 보면 전체적으로 심리적 거리가 꽤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된다.
[떠오르는 빛으로]에는 무관심하고 무덤덤한 시현을 비난하는 가현이 등장한다. 하민을 잃고 다정함의 의미가 누구보다 컸던 가현은 무례한 시현의 행동을 지적하면서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기간만큼 시현과 가현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상대방이 갖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좋아하는 작가의 사인회에서, 그의 책이 없기에 어떻게라도 사인을 받고 싶어서 시현이는 다른 작가의 책에 사인을 받는다. 그런 모습에 작가에게 무례한 일이라며 가현이는 분노한다. 물론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두 인물은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서로를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그들을 갈라서게 만든 것과 동일하다는 점이다. 서로의 공통점을 찾으려 하기보다 서로의 차이점이 만나는 지점에서 그것을 수용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그런 결과를 만든 게 아닐까 싶다.
이런 모습에서 요즘의 우리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을 비난하다가도 우리는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상대를 다시 생각해 보며 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장 낮은 자리]에는 본인의 사회적 입지가 가장 낮다고 생각하는 지민이 등장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나 끝없이 스스로를 가장 낮은 위치에 서게 만드는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점점 그렇게 느끼게 된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가장 낮은 위치의 사람은 계속해서 등장한다.
버럭 한번 못하고 뒤에서 욕을 하는 김기사나, 만나는 동료마다 다른 방식으로 대하며 남들 다하는 것은 괜찮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은호나, 지민의 몸을 훑어보며 그보다 강자임을 무례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나 다 같다. 중요한 것은 지민이 그들의 모습에 경멸을 느끼며 작은 복수를 꿈꾸는 모습이다.
거기서 또 한번 가장 낮은 자리는 변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 주변에서 꽤 자주 볼 수 있는 사람들이지 않나 싶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그런 사람들 말이다. 이런 모습을 보며 작품을 읽을수록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외에도 사람이 개를 대하는 방식을 통해 그들의 진면목을 알게 만드는 [여분의 사랑], 투자가 잘못되어 불법적인 일을 하며 인간의 속내를 확인하게 만든 [검은 일],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가 큰, 그래서 자기 같은 처지의 아이를 보면 마음이 흔들려서 본인의 생도 같이 흔들리는 [변신을 기다려], 남녀 사이, 부모자식 사이, 부부 사이의 관계와 출산과 낙태의 문제를 리얼하게 담아낸 [루프] 등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정함과 무관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너무 다정해도 [변신을 기다려]의 경우처럼 문제가 생기고, 너무 무관심해도 [여분의 사랑]이나 [손의 안위]처럼 엉뚱한 곳에 분노가 쌓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을 접으면서도 계속 신경 쓰게 된다.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