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즐 - 권지예 소설
권지예 지음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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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퍼즐이 삶을 견디기에 좋은 게임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틀렸다. 물론 퍼즐을 하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퍼즐만큼 꽉 차고 완벽한 인생이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들 인생은 늘 몇 조각 부족한 퍼즐 판이다, 라는 그럴듯한 통찰이 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퍼즐 게임은 완벽함이 생명이다. 한 조각이라도 달아난 퍼즐 판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폐기 처분되어야 마땅하다. 단 한 조각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완전하게 맞추기 위해 퍼즐 게임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은, 생의 에너지는, 결핍을 채우려는 불완전한 욕구로 허덕일 뿐이다. 그게 인생과 퍼즐 판의 차이다.

p.34

 

이 나이에 경미한 우울증은 어쩌면 세탁의 마지막 단계에 넣는 섬유 유연제와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여고생 때의 풀 먹인 날 선 칼라를 견딜 이유가 갱년기의 삶에 있을까. 삶에 대해 결기가 빠지고 난 인생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굵은 소금으로 숨 죽인 배추의 목적은 명확하고 단순하므로. 단지 김치가 되어 소멸될 운명만 남았으므로.

p.35

 

간혹 나는 내가 흔들어 놓은 맥주 캔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겉은 멀쩡하지만 거품이 뿜어 나오는 맥주 캔처럼 따기만 하면 내 안의 분노와 증오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조마조마하다.

p.55

 

 

권지예 소설집, <퍼즐> 中

 

 

+) 이 소설집에는 총 7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는데,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다. [BED]는 한 남자가 결혼 전의 만난 여자를 잊지 못해 아내에게 상처를 주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아내만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남자도, 그리고 결혼 하기 이전의 여자도 상처를 받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아픈 것을 건드림으로써 상대방에게 복수를 행한다. 복수, 그것은 과연 상대방에게만 상처를 남길까.

 

[퍼즐]은 손자를 기다리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몇 번의 낙태를 강요하는 소설이다. 여자의 남편 또한 어머니처럼 아들을 기다리고, 그 사이 사라지는 생명은 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듯이 시어머니가 아내에게 행하는 반인륜적인 행위를 묵인한다. 견디다 못한 여자가 최우의 선택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여자는 자기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복수를 행하는 것은 아닐까. 복수는 상대에게 행하는 만큼 스스로에게도 큰 상처를 남긴다.

 

[네비야, 청산 가자]는 정신 연령이 14살에 멈춘 노총각의 국제결혼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도 여성들은 남자의 선택을 강요받고 자기 스스로 주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여주인공 오영실]에서 오영실이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나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권지예의 소설 속에는 하나같이 상처받는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들은 표면적으로 수동적일지 모르나 그들이 선택하는 최후는 어쩌면 상대에게 하는 마지막 발악이 아닐까 싶다.

 

나를 죽임으로써, 나를 버림으로써, 나를 짓밟음으로써 상대에게 각인시키는 고통 같은 것. 그것이 최선이고 최후의 방법인 여성들. 이번 권지예의 소설집에는 이런 여성들의 고통이 곳곳에서 보이기에 씁쓸하다. 거부하고자 했으나 마음대로 자신의 인생이 풀리지 않는 여자들의 답답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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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 현대문학 테마 소설집 1
하성란.권여선.윤성희.편혜영.김애란 외 지음 / 강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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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우르르 쏟아지듯 내려오는 인파에 갇혀 옴짝달싹 못할 때면 언젠가 건성으로 읽은 한 연구자의 글이 떠올랐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학문을 하는 비주류의 외로움에 대해 쓴 글이었는데 아마도 그 고독감이란 것이 이런 걸 거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괜히 고끝이 싸해지곤 했다.

p.40  -하성란, [1968년 만우절]

 

"질투란 건 말이야, 원래 판이하고 불가능한 쪽을 향하는 거야. 대상이 저질이든 고상하든 중요하지 않아. 나랑 판이하게 다른 년, 내가 죽었다 깨나도 될 수 없는 년, 정글이나 동굴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년, 그런 년들한테는 손도 써볼 수 없지. 이해도 안 되고 납득도 안 돼. 우린 걔네들 눈 깜빡거리는 동작 하나도 흉내 못 내. 걔네들은 어쩐지 늙거나 죽지도 않을 것 같아. 그러니 그저 우리 같은 것들은 평생 질투나 하다 나가떨어지는 수밖에."

p.85  -권여선, [빈 찻잔 놓기]

 

하성란 외, <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 中

 

 

+) 서울을 테마로 쓰여진 소설집이다. 2000년대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 중심으로 9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아, 가만히 살펴보니 작가 대부분이 여성이다. 여성 작가들이 바라본 서울은 어떨까. 작가들은 각자의 글쓰기에 앞서 서울에 대한 소박한 편린들을 펼쳐놓았는데, 소설만큼이나 매력적인 글귀였다. 이 사람은 서울을 이렇게 느끼고 있구나.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지방으로 여행을 갈 때마다 나는 서울과 거리가 있는 지역들이 그 거리만큼이나 서울과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을 떠나서 나란 사람이 느끼는 거리감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에서 서울은 친구에게 돈을 꿔주고 돌려받지 못한 인물이 있는 곳이거나(이혜경, [북촌]), 축구 경기가 있던 날 죽었다 깨어난 아버지의 믿지 못할 이야기가 있거나(하성란, [1968년 만우절]), 같은 공간에 허락없이 거주하는 벌레들을 마주선 인간의 공포감이 서려 있는 곳(김애란, [벌레들])이다.

 

어찌보면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서울이라는 공간에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 같지만, 복잡한 도시의 대표적 표상인 서울을 간과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을 특별히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다. 비교적 편리한 교통 시스템과 늦은 밤에도 밝은 거리가 좋다면, 짜증섞인 사람들의 표정과 불쾌한 공기, 잡다한 소리가 얽혀서 만들어내는 무수한 소음이 싫다.

 

소설 속 인물들도 그렇지 않을까. 자신들의 삶과 엮이면서 서울이라는 공간은 폐쇄적이거나 혹은 익명성이 담보된 채 지나치게 개방적이기도 하다. 그런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위악적이기도 하고 혼란스러움을 견디다 못해 정신을 놓기도 한다. 이 소설집은 그런 도시의 일상과 현대인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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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는 세월
박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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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살살 녹이는 부드러운 거짓말과 타인의 마음에 쇠코뚜레를 채워 끌고가는 거짓말이 어찌 똑같을 수가 있을까.

p.71

 

"다른 호선은 다 종착역이 있어. 그런데 2호선은 계속 빙글빙글 돌아. 어쩌면 2호선이야말로 진짜 인생 아닐까. 숨이 끊길 때까지 계속 도는 게 진짜 인생이라고. 이뤄야 할 목표가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짜고 치는 집단 사기잖아."

p.210

 

미령은 그제야 왜 사람들이 비슷한 조건이나 엇비슷한 나이의 사람과 결혼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혼을 막기 위한 울타리를 치기 위한 조건이었다. 술에 술을 타고 물에 물을 탄 정도의 미지근하지만 뜨거워지지도 차가워지지도 않는.

p.208

 

박진규, <내가 없는 세월> 中

 

 

+) 이 소설은 시간의 순서대로 쓰여졌다. 1988년부터 2023년까지를 등장인물들의 성장과 더불어 전개했다. 미령은 새엄마와 함께 생활하게 되면서 그녀의 딸 신혜와 바구미여사(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를 만난다. 어린 나이였지만 엄마의 죽음도 견디고, 새엄마와 함께 살면서 치매 노인을 돌보는 것에도 잘 적응하는 인물이다. 오빠는 삼촌에게 맡겨 길려지며 사기 행각을 일삼는 인물로 나온다.

 

이 소설은 한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가족의 모습을 여러 시점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정작 이 껄끄러운 가족을 만들어버린 '최씨(아버지)'의 목소리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생각으로 살았을까. 새엄마의 많은 돈은 추후 지진으로 인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다. 아니, 1차적으로 주식 폭락으로 인해 망한 것이 먼저고, 그 뒤 지진이 일어나서 많은 것을 잃은 것이 후이다.

 

모든 것은 욕심에서 시작한다. 그 욕심만큼 많은 것을 얻기도 하지만 그만큼 잃기도 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개개인이 설정한 인생이 목표가 있고, 그것에 근접하기 위해 아둥바둥 살면서 성공과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다. 그 밑바탕에는 바로 '욕심' 혹은 '욕망'이 존재한다.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것을 손에 쥐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에 새엄마(명옥)의 간절한 바람은 욕심이나 욕망이 아니라 소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루어졌다. 그것만으로도 명옥은 행복하지 않았을까. 전체적으러 어두웠지만 흥미로운 점도 많은 소설이었다.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신혜, 휴거를 믿는 근자, 그들의 모습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것 같아서 참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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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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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의 생각과 결정이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행동은 그에 앞서 이미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한 것을 단순히 그대로 수행하지는 않는다. 행동에는 나름대로의 원천이 있으며, 나의 생각은 나의 생각이고 나의 결정은 나의 결정이듯이 나의 행동 역시 독자적인 방식으로 나의 행동인 것이다.

pp.23~24

 

자신감을 다시 얻는 것은 결코 성공에 따르는 결과가 아니었다. 내가 이룬 것은 나중에 비교해보면 내가 실제로 해낼 수 있다고 기대하거나 남에게 인정을 기대했던 것에 비참할 정도로 못 미쳤으며, 내가 그것을 실패로 느끼느냐 성공으로 느끼느냐는 오로지 나의 기분에 달려 있었다.

p.74

 

그렇지만 내가 무언가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을 때면 당시에 겪었던 마음의 상처들이 떠오르고, 내가 죄책감을 느낄 때면 당시의 죄책감이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내가 오늘날 무언가를 그리워하거나 향수를 느낄 때면 당시의 그리움과 향수가 되살아나곤 한다. 우리의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집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 이전의 것은 이미 떨어져 나가거나 제쳐둔 것이 아니며 늘 현재적인 것으로서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p.232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中

 

 

+) 이 소설에는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것을 말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죄를 감당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를 어린 나이였을 때부터 지켜보고 사랑하던 남자가 있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떠난 이유를 알지 못했고, 여자를 만나는 사이 갑작스럽게 그녀가 화를 낸 이유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여자가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남자는 알게 되었다.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던 여자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더 리더>는 한 편의 영화같은 이야기이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자존심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멋진 소설이었다. 나라면 어땠을 지 상상해본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다른 한 편으로 이 작품은 여자가 지은 죄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여러 사람들이 갇힌 공간이 폭발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내버려 두는 행위, 아무리 상대가 포로일지라도 그것은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되는 행위가 아닐까.

 

나는 가끔 사람들이 네 편, 내 편만을 생각하느라고 정말 우리 모두가 한 사람의 인간임을 잊어버리는 것이 안타깝다. 최소한 인간이라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가 있다. 사람이라면 여자는 당장 뛰어가서 그 문을 열어주었어야 했다. 남자의 생각이 전개될수록 생생한 장면들이 떠올라 안타까웠다. 마지막 장편 또한 파격적이었는데, 과연 그 여자에게 삶의 즐거움은 무엇이었을지 고민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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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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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증명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딱딱함과 부드러움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지. 틀리지는 않아도 너저분하고 짜증나는 증명도 얼마든지 있어. 알겠나? 왜 별이 아름다운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수학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도 곤란한 일이지만 말이야."

p.26

 

"문제를 만든 사람은 답을 알고 있지. 반드시 답이 있다고 보장된 문제를 푸는 것은, 가이드를 따라 저기 보이는 정상을 향해 그저 등산로를 걸어 올라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수학의 진리는 길 없는 길 끝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숨어 있는 법이지. 더구나 그 장소가 정상이란 보장은 없어. 깎아지른 벼랑과 벼랑 사이일 수도 있고, 골짜기일 수도 있고."

p.51

 

그것은 늘 거기에 있다. 절대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소리 없이. 내가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는 곳에 있다.

p.249

 

 

오가와 요코, <박사가 사랑한 수식> 中

 

 

+) 수식을 사랑하는 박사, 그러나 80분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가 있다. 80분 이전에 만났던 사람을 80분이 지나면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대하는 사람들도 답답하겠으나, 본인은 어떨지 충분히 상상이 된다. 박사를 볼보는 일을 시작한 파출부는 그의 엉뚱함에 당황할 때도 많지만 차츰 그의 입장을 배려하고 이해하게 된다.

 

무엇보다 파출부의 어린 아들(박사는 그를 '루트'라고 불렀다.)이 박사를 신뢰하고 존중하는 태도는 순수한 어린이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앞뒤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박사를 인간으로서 믿은 루트의 태도는, 엄마를 반성하게 만들고 더불어 우리들도 반성하게 만든다.

 

순수하게 상대방을 믿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나의 이익이나 손해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다면 가능한 것일까. 이 소설은 모든 것을 수와 수식과 수학으로 풀이하는 박사의 모습을 통해 순수하고 진정성이 있는 수학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인간의 순수한 아름다움까지 소개하고 있다. 독창적인 인물 구도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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