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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그래, 유리. 라이스에는 소금을!”
이건 우리 세 사람에게만 통하는 표현으로 굳이 번역하자면 ‘자유 만세!’다. 공기에 든 흰쌀밥은 그대로도 맛있어 보이는데 접시에 담긴 밥에는 왜 그런지 소금을 치고 싶어진다. 우리 셋 다 그렇다. 하지만 예의 없어 보이고 소금을 과잉 섭취하게 된다는 이유로 어릴 적에는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성인이 되어 다행이다, 자유만세’라는 의미다. P.291
오랜만에 에쿠니 가오리 소설이다. 솔직히 그녀의 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 유명한 도쿄 타워나 냉정과 열정사이도 그다지 좋아하는 소설은 아니었다. 왜 그럴까 생각을 해보니 왠지 일본영화 같은 그런 분위기가 별로였나보다. 소설은 뭔가 긴장감이 넘치거나 기승전결이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녀의 소설은 잔잔한 일본영화처럼 기승전결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기만 한다. 이 소설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도 마찬가지다.
에쿠니 가오리가 일본 여성 월간지 슈프르에 4년 넘게 연재했던 글을 책으로 묶어낸 이 책은 3대에 걸친 100년 동안의 야나기시마 일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각 장마다 1982년 가을, 1968년 늦봄, 이런 식으로 시간을 넘나들며 가족 구성원 개인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각 장마다 화자가 다르고 이야기하는 내용도 개인의 이야기거나 야나기시마 일가가 아닌 사람이라면 그 사람들의 눈에서 바라본 야나기시마 일가의 이야기들이다.
도쿄 가미야초, 다이쇼 시대에 지어진 서양식 대저택에 야나기시마 일가가 살고 있다. 무역 회사를 경영하는 할아버지와 러시아인 할머니, 부모님과 이모, 삼촌 그리고 4명의 아이들이 살고 있는 대가족인 것이다. 이야기 순서는 시계열 순으로 전개되지 않고 여러 세대를 오가며 등장하지만 1세대인 할아버지와 러시아인 할머니가 만난 이야기, 2세대 기누코가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집을 나가 살다가 아이를 임신하고 돌아오고 유리의 결혼 실패, 기리노스케의 자유로운 삶이 등장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기누코의 정혼자로서 가까이서 커온 도요히코의 눈으로 본 야나기시마 일가와 도요히코가 기누코가 아닌 다른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도 등장을 한다.
3세대로 넘어가면 이들의 출생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첫째 노조미는 기누코와 기시베 사이에서 나온 딸이고 고이치와 리쿠코는 기누코와 도요히코의 자식이며 막내 우즈키는 도요히코와 아시미 사이의 아들이다. 이런 출생의 비밀만 이야기하자면 뭔가 막장의 스멜이 나긴 하지만 이 저택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 생부가 자신의 부인과 함께 아이를 만나러 오는 그 순간에도 이 가족들은 그들을 환대하며 언제든 놀러오라고 손을 흔들어주는 기묘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조각조각으로 쪼개져 있지만 책을 덮고 나면 1, 2세대의 죽음과 이별, 3세대의 자립의 이야기들이 모두 연결되는 특이함을 가지고 있다.
서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가족이지만 서로 평생 알지 못하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이 재미있게 다가와 이런 패치워크 형식으로 글을 썼다는 저자의 이야기처럼 나도 내 가족과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평생 전부 알지는 못할 것이다. 가족이라고 해도 결국은 모두 혼자가 아니냐는 저자의 말을 다시금 곱씹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