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한번 본 것을 절대로 잊지 못하는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가 실종되고 1년 후 죽게 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기본 형태는 피해자가 있는 수사물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온다 리쿠의 스타일답게 정통 수사물을 기대하신 분이라면 상당히 실망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띠지를 통해 자신의 문학 세계를 '집대성'했다는 표현을 작가가 썼습니다. 온다 리쿠는 어느 작가보다도 더 독특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는데 주목할만한 부분은 그런 세계관이 존재해도 각각의 소설 속에서 각기 다른 색채로 보여진다는 점일 것 같습니다. 단순하게 구분하자면 전통, 초능력, 다수의 등장인물들, 상상할 수 없는 큰 스케일 정도일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공포와 적절히 조화시켜 풀어냅니다.
이번 이야기도 역시 그런 요소들이 등장합니다. 평범한 회사에 다니던 조용한 중년 남성이 실종됩니다. 그 후로 1년이 지나 전혀 연고가 없는 마을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살인인지 자살인지, 사고인지 전혀 밝혀내지 못하고 한 여성은 이 '이치가와 고로'의 뒷조사를 하게 됩니다.
등장인물은 단순히 이 여성을 통한 수사로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체를 발견한 전직 교사인 할아버지와 쌍둥이 자매인 두 할머니, 이치가와의 동료에 의한 회사 생활의 단편, 이치가와가 나타났던 커피 가게와 모닥불을 필때 누군가 등장한다는 소녀의 이야기와 어느 날 훌쩍 사라지는 양조장 가문의 경영자, 어릴 때 헤어진 이치가와의 동생, 이 마을의 유지인 집안과 탑을 관리하는 이야기, 전직 경찰과 기차역 직원의 이야기가 마치 전혀 상관없는 듯 화자를 바꿔가며 이어집니다.
이 각각의 사람들이 보고 겪은 일들이 하나로 엮어져서 마지막에 왜 그런 상황이 언급되었고 그런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식은 이 피해자가 어떤 행동을 했고 감추어진 비밀을 통해서 왜 죽었는지를 추리할 수 있도록 느끼게 하는 점에서 추리 소설 같은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온다 리쿠의 서술 방식에 익숙한 분들에겐 단순한 '범인찾기용 소설'로 끝나지 않을 예상을 하고 읽게 되지요.
이치가와가 한번 본 것을 절대 잊지 않는 능력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단순히 그가 '기억한다'는 점에서 그 능력이 이야기에 사용된 것이 아닌 면이 바로 '온다리쿠식' 장점 같습니다. 흔히 이런 능력이 있는 캐릭터를 내세운다면 1차원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수사나 범죄에 관한 부분이겠지요. 그러나 이 능력은 거기까지가 아니라는 점이 이 소설의 또 다른 재밌는 요소입니다.
바꿔 이야기하자면 그가 이러한 능력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이 한 사람의 인생이 지니는 역할을 더욱 중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온다 리쿠는 애착이 가는 등장인물은 없다고 어느 인터뷰를 통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역시 이 소설도 그런 취향이 두드러집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작가의 세계관을 설명하고 보여주기 위한 각자의 역할을 합니다.
대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위험은 소수만이 부담하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소문을 이용해 사람들의 시선을 막을 수 있었던 현명함은 또한 감탄이 되더라구요. 3개의 탑이 있는 마을, 그러나 언젠가부터 신이 내려오지 않는다는 소문이 도는 탑, 그리고 지도에는 존재하지 않는 탑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 소설을 보기 전에 유추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시체가 발견되고 그 사람의 죽음을 추리하기 위해 그의 발자국을 뒤좇지만, 현실에서는 모든 요소가 증거물이 되고 트릭을 밝히는 요소가 되는 것이 아니듯 이 소설은 그 어떤 현실보다도 더 현실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추리 소설 자체가 너무 작위적이라고 느끼셨던 분에겐 이 소설이 너무 재밌을 것 같고, 정통 추리물을 좋아하는 분에겐 이 소설이 너무 허무맹랑할 것 같습니다.
제게는 작위적인 부분을 반대하며 이런 시도해줬던 면에서, 그리고 기발한 생각을 해냈고 이런 끈질긴 서술을 해냈다는 것에, 마지막으로 신이 될꺼라는 이치가와가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다 해낸 그 점에서 별 다섯 개를 매겨봅니다. 음모론은 언제나 아무도 모르게 살해되거나 입막음 당하는 큰 세력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런 비밀도 세상엔 있지 않을까요. 자신의 마을 사람들이 공포감없이 편안히 일상을 살아가게 해주는 한 집안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때의 내게 어제까지의 세계는 이미 다른 세계의 사건이었다." (p. 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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