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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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소설의 줄거리를 알고 있으면 호기심이 동해서 더 보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어두운 소재들의 책은 잘 손이 안가기 마련입니다. 이 책도 최근 많은 호평을 받고 있지만 앞선 이유로 조금 미뤘었는데 책을 읽기 시작한 순간 그런 걱정따윈 기우였던듯 완전히 몰입해서 순식간에 읽어버리게 되었네요.  

한 소년이 '살인자의 아들'이란 이름하에 너무도 괴로운 시간들을 보내왔습니다. 부인과 옆집 소녀와 그 아버지를 죽이고 댐을 열어 저지대 사람들도 죽였다는 희대의 살인마가 된 아버지. 소년 서원은 7년동안 친척들도 밀어내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세상에 숨어살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사형이 확정될즈음 그도 한 바닷가 마을에 정착해 숨어살고 있고 이 사건들을 추억하듯 간간히 독자들에게 보여줍니다.

문체들은 사건의 무게보다는 한결 가벼운 부분이 있어서 이들에게 닥칠 이 끔찍한 사건들이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하면서 '읽기'를 강요하는 면도 있습니다. 야구선수였다가 은퇴하고 경비회사에 다니는 서원의 아버지 현수와 억철스럽게도 좋은 남편을 닥달해서 가계를 꾸려가는 서원의 어머니 은주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한편 이야기의 중요 인물이 될 세령댐의 경비로 일하는 승환은 세령호 일대 지주의 집안인 세령이네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어린 소녀를 아버지가 회초리로 때리고 모든 동네 사람들은 모른척한다는 것. 이 아버지 영제는 되려 승환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이상한 사람이기도 해서 그가 이 문제에 개입을 못하게 막습니다.

시세보다 싼 값에 아파트를 사서 지방근무를 자청하게 한 은주는 남편을 이 세령댐 경비로 지원하게 하고 가족은 이사를 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비극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 입니다.

정말 중요한 '사실'은 읽는 분들의 재미를 위해 덮어두기로 하고 이 소설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들을 언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가는 후기를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바로 이 '그러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되지 않은, 혹은 이야기할 수 없는 '어떤 세계'. 불편하고 혼란스럽지만 우리가 한사코 들여다봐야 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모두 '그러나'를 피해 갈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이 소설은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다.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파멸의 질주를 멈출 수 없었던 한 사내의 이야기이자, 누구에게나 있는 자기만의 지옥에 관한 이야기며, 물러설 곳 없는 벼랑 끝에서 자신의 생을 걸어 지켜낸 '무엇'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다. (p. 521~2)

이 소설의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 녹아있는 '진실'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이 이미 일어난 이야기라면, 돌이킬 수 없는 과거였다면, '진실'은 이 '사실'을 통해 파급될 수 있는 부정적인 일들이 되어버릴 지 모를 미래의 '사실'을 바로 잡아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두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너무도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지만 분명한 것은 닮지 말아야할 '아버지'의 모습을 닮았다는 면입니다. 어머니를 때리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는 아버지. 그래야 고칠 수 있다는 오만한 사고를 갖고 있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그것을 그대로 닮아 그 인생을 밟아갑니다. 한편 다른 아버지는 다릅니다. 술만 마시면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가 싫어서 자신은 그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이 그 아버지와 같은 행동을 했고 영원히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는 또 다른 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살인이 등장하는 소설은 주로 비슷한 패턴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범인은 누구인가, 진상은 무엇인가의 근본적인 이야기이거나 반대로 살인을 한 사람에 대한 재조명으로 과연 그가 악인인 것인지 그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패턴도 있습니다. 이 소설은 그 모든 것들을 녹여내고 있고 나아가 앞서 언급한 '사실'과 '진실'을 통한 미래의 '사실'을 긍정적으로 바로잡고자하는 노력이 들어있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좀 독특했습니다.

단순히 살인을 묻는 한 가지 질문이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과연 누구에게 죄가 있는 것인지 두 가지 보기가 있는 질문이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나약함이 때로는 죄를 낳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한 사람이 존재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게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모든 악한 상황들 속에서도 다른 무엇도 아닌 '아버지의 사랑'이 가슴 가득 남는 것은 역시 그 무게가 가볍지 않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책 정보

7년의 밤
지은이 정유정 
도서출판 은행나무
1판 1쇄 발행 2011년 3월 23일 
1판 2쇄 발행 2011년 3월 30일 
디자인 오진경

 

   p. 8
   ... 무수한 얼굴들 사이에서 아저씨를 찾던 짧은 순간, 카메라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섬광을 뿜었다. 나는 빛의 바다에서 홀로 섬이 되었다.


   p. 13

   마을 앞바다에 있는 돌섬의 수중절벽이 이 적요한 땅으로 그들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아저씨와 나도 그들처럼 불려왔다가 눌러앉았다.


   p. 42
   숨을 마시면 흉통이 왔다. 기사의 헤드카피는 활자의 조합이 아니었다. 내 갈비뼈 밑에 찔러 넣은 세상의 칼이었다.


   p. 75
   대한민국은 자기 딸을 때렸다고 부모를 감옥에 보내는 선진사회가 아니었다.


   p. 505
   "... 그런데 그날은 그곳으로 갈 수가 없었네. 꿈속의 세상 대신 무시무시한 것이 몰려왔어. 아이 곁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다는 직감. 그때 깨달았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자네, 선수시절 내 포지션, 기억하나."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게임을 복기해서 패인을 찾아내는 사람, 게임의 판을 읽고 흐름을 조율하는 사람, 타석에 들어선 타자를 분석하고, 행동을 예측하고, 승부할 시기와 수를 판단하는 사람, 온몸으로 홈 플레이트를 사수하는 사람, 그게 포수지. 그리고 난 열두 살 때부터 포수로 길러진 사람이고. ..."

 

   p. 507

   "자네가 그림을 맞춰줬으면 해. 그래 주기만 하면 내가……"

   ...

   "마지막으로 포수노릇을 할 수 있을 것 같네."


   p. 513

   "아니야. 단지 네가 자발적으로 그 일을 하기를 바란 것이지."

   "왜요?"
   "팀장님은 네 안에 도사리고 있는 걸 두려워했어. 그것이…….

   아저씨는 한동안 앞만 바라보았다.

   "너 자신을 죽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고, 나아가 너를 괴물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

   "제 안에 있는 걸 누가 만들었는데요. 그 과정을 고스란히 밟은 사람이 누군데요. 아버지예요. 자신을 죽이고, 누군가를 죽이고, 스스로 괴물이 된 사람은 바로 아버지라고요."

   "그래서였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서늘한 기운이 가슴을 쓸고 갔다. 아저씨가 말했다.

   "그래서…… 넌 아니기를 바란 거야."


   p. 516
         I believe in the church of baseball.


   p. 517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길고 길었던 밤이 빛의 바다로 침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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