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시대
장윈 지음, 허유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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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 소설은 중국, 1980년대의 시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망허'라는 이름을 가진 시인은 그리 유명하진 않지만 대학 강사 자리도 박차고 나올만큼 그 갑갑함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유랑하는 시인의 강한 영혼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전국을 돌며 살아가는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망허를 만난 두 여자를 소개합니다.




한 여자는 '천샹'이라는 대학생입니다. 시인과의 좌담회를 통해 만나게된 망허와 하루 밤의 정을 통하고 임신을 하게 됩니다. 시인은 기약없이, 그 존재조차 모른채 영영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선배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여자는 예러우. 대학원생으로 대규모 인구이동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해 현지 답사 중에 망허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도 하루 밤의 정을 통하지만 그녀는 망허를 둔 채 급히 도망을 칩니다.




이야기는 주로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진행되지만 천샹의 부분에서는 천샹에게 촛점이 맞춰져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편이고 예러우와의 만남에서는 망허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런데 예러우의 이야기 속에서 망허는 전혀 '천샹'이라는 여자를 언급조차하지 않는, 예러우만을 원하는 순정남으로 보입니다.


 

사실 이야기의 이 트릭은 표지 뒷면에 소개된 면을 통해서 대충 파악을 할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추리 소설은 아니기 때문에 실망하거나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장윈이라는 소설가는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으로 순간적인 풍경과 마음을 표현해내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지 않을만큼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의 심정을 더욱 슬프게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소설이 '시인'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런 방식이 더욱 더 빛나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 여자는 처절하게도 다른 인생을 살아갑니다. 시인을 너무 갈망했고 그 인연이 축복이라 감격했던 한 여인은 그 바람 덕분에 처절하게 버림받습니다. 그리고 한 여인은 너무도 그것을 무서워했기 때문에 피하지만 결국 함께하는 방향으로 인생은 흘러가게 됩니다. 그토록 원했던 자에게서는 빼았아 갔고 다른 한 사람은 가졌지만 그로인해 자신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공통점이라면 너무나 행복했던 한 때는 분명 두 여인 각자에게도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요. 유랑의, 시인의 시대가 끝이나고 21세기의 망허는 자신의 이름을 버립니다. 그리고 너무도 비약적인 인생과 만남을 갖지만 어쩌면 그런 것이 되려 현실적일지 모르겠습니다.




시를, 시인을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망허는 너무도 시를, 시인을 사랑하는 한 여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이 그 시를 만들어냈던 사람이지만 그는 자신이 시인과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와 시인에게 유린 당한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이제는 그 시만은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비로소 이제 그 시는 되려 망허가 아닌 바로 자신의 시가 되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너무도 철저히 고통스럽고 괴로운 상황에 처하게 한 덕분에 별 4개만 매길까 고민을 했었는데 책을 끝내는 마지막 문장을 통해서 이 소설의 결말이 어찌나 훌륭한지 새삼 감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자들은 서로가 아닌 각자의 행복함을 찾을 것 같습니다.


 




 








책 정보




行走的年代 by Jiang Yun(蔣韻, 2010)

길 위의 시대

지은이 장윈

펴낸곳 자음과모음

초판 1쇄 인쇄일 2010년 12월 1일


초판 1쇄 발행일 2010년 12월 8일


옮긴이 허유영


 




* 오타 p. 147 각주의 '산시'가 두 번 쓰였습니다.










   p. 40


   해가 비스듬히 기울고 저녁놀이 나타났다. 괄게 달아오른 노을 한 자락이 절벽 위로 길게 걸쳐져 푸석한 황토를 핏빛으로 적셨다. 한없는 정적, 농밀한 고요함이 작은 산촌을 뒤덮고 깊은 골짜기 속으로 내려앉았다. 밥 짓는 연기가 망자의 혼백처럼 한 가닥씩 하늘로 피어올랐다. 순간 망허는 신을 만난 듯한 착각을 했다.


 





   p. 64


   눈사태라도 난 것처럼 무너지는 감정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것은 전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자신은 그걸 붙잡을 수 없다는 서러움이 그녀를 무너뜨렸다.


 





   p. 106


   그 여행객이 살던 시대에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번화한 도시든, 한갓진 시골 마을이든, 변두리 외딴 마을이든, 어디를 가든 멀리서 온 나그네 시인이 시를 매개로 생면부지의 또 다른 시인과 조우한다는 건 언제나 반갑고 기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 시대의 낭만이요, 고결함이요, 순수함이었다. 그때 시인들은 대부분 방랑객이었다.


 





   p. 180


   고개를 들어보니 빽빽한 별무리가 온 하늘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하늘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금시라도 와그르르 쏟아져 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숨 막히게 농밀하고 고요한 별빛이 땅 위의 모든 것을 압도했다.


 





   p. 271~2


   "그러시군요. 저도 예전엔 시를 좋아했었죠."

   "그런데 전 시인이었지만, 한 번도 시를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사실 시는 참 잔인한 거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그가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게 물으시는 건가요?"

   "네."

   그녀가 또 고요하게 웃었다.

   "원래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잔인하죠."








   p. 275


   그를 태운 차가 미끄러지듯 학교를 빠져나갔다. 그 순수했던 청춘을 황토 먼지 자욱한 산촌에 남겨두고. 천샹에게 남겨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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