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40년대 부터 2000년까지 각각의 매개체를 통해 짧게 기술된 수 많은 기록들로 이루어진 한 남자의 일대기입니다. 제목만 봤을 때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도모하는 판타지라도 되는 것일까' 라는 추측을 해봤었는데 그렇지는 않더라구요.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할 때 '이쪽이 아니라 저쪽을 선택했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하곤 하잖아요. 그런 주인공의 마음을 담는 제목인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시작 전, 한 여자는 가난한 시대에 일을 하기 위해 런던에 머물게 되는데 그곳에서 임신을 하고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낳습니다. 그리고 아이와 헤어져 그 존재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행복하게 살아가지만 그 아이의 존재를 항상 그리워했다는 프롤로그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한 남자, 데이비드 카터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는 누나가 하나 있고 사랑을 듬뿍 주는 엄마와 엄마가 간호사일 때 함께 일했던 친한 아줌마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전쟁 때 군인이었지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가 함께 살게 되었고 일찍 돌아가십니다. 그는 행복한 시절을 보냅니다. 친한 아줌마에게 듣는 예전 이야기들이 너무도 큰 보물 같아서 매료되고 결국 박물관 큐레이터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만나게된 스코틀랜드의 한 박물관의 카페에서 일을 하는 엘리너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서로에 대한 감정을 키워갑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자신이 부모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그렇게 1부가 끝이나고 2부는 엘리너와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는 일이, 3부는 2부의 위기들이 조금씩 나아가는 과정들이 나옵니다.
이야기의 전반부는 상당히 행복한 이야기들인데도 어딘가 작가의 문장에서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이 고여있는 그런 감각이 있습니다. 자조적인듯한 회상을 읊조리는 그런 말투여서일까요.
데이비드는 이 이야기들을 정리하면서 가정을 해봅니다. 어떤 일이 있어서 그 박물관에 가지 않았다면, 엘리너가 그곳에서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식의 가정들이 비극적인 생활을 암시하지만 어느 순간 그 가정들도 없이 무거운 시간의 흐름이 이어집니다.
처음 이 소설의 소개를 봤을 때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하지만 그곳에서 또 다른 사실을 맞딱드린다는 표현에서 설마 엘리너와 배다른 남매이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하고 국내 막장 드라마에 나올 법한 이야기들을 상상해봤는데 그렇지는 않더라구요.
단순히 데이비드는 유물을 좋아한 것 뿐인데 자신의 부모를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마치 그것이 자신의 핏줄을 찾고 싶어한다는 무의식적인 갈망처럼 보여지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는 그저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인걸요. 엘리너의 불안과 무력감이 어머니에게로부터 왔다고 할지라도 결국 데이비드의 의문 덕분에 그녀의 어머니 또한 너무도 힘든 세월을 이겨냈던 것을 알게 되었고, 그렇다고 그것이 그녀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데이비드 같은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불안감과는 달랐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20년 넘게 너무도 사랑을 준 어머니 덕분에 엘리너와 케이트를 버리지 않고 지탱해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들이 좀 더 행복해지길 바랬지만 이런 결말이기 때문에 좀 더 그들이 삶에 더 애착을 갖고 생의 한 가운데 서서 의지를 버리지 않는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슬픈 이야기는 감정적으로 너무 휘둘려지는 것 같아서 좋아하지 않는데 이런 이야기도 차분히 풀어내는 작가의 필력에 놀랐네요. 추리 소설은 아니지만 그런 요소들를 깔아둬서 궁금증을 유발하는 면도 한 몫을 한 것 같습니다.
전작이자 처녀작인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으로 서머싯 몸 상과 베티 트라스크 상을 수상했고 부커상 최종 후보작에 최연소로 올라 화제가 된 작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바로 데이비드의 딸인 케이트의 관점에서 써진 소설이라고 하니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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