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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웃음의 나라 - 문화인류학자의 북한 이야기
정병호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평점 :
중국과 남한 사이에 있는 나라, 툭하면 미사일을 쏘아대면서 지원을 요구하고, 인권유린이 일상화된 나라.' 이게 내가 가진 북한의 이미지였다. 초등학생 때 김일성이 죽었을 때, 얼마 안 가서 무너지리라 생각했지만 아득바득 이끌고 와서 벌써 손자 김정은이 집권하는 불가사의한 나라이기도 했다. 통일을 해야 한다고 묻는다면 나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쪽이었다. 이미 분단된 세월이 너무 길고, 양쪽의 경제적 격차는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그 갈라진 세월만큼 갈등이 빚어질 것이고, 아울러 경제적 격차를 감당하기 위한 남한의 경제적 부담도 엄청나게 늘어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는가? 이 책은 북한하고 우리하고 통일해야 한다고 우기는 책이 아니다. 북한이라고 하면 역사에서 38선 긋던 시기에서 멈춰있는 지식을 한단계 뛰어넘어서 핵을 개발하는 이면에 꽃제비가 국경을 넘나드는 북한의 실상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북한은 단연코 가난하다. 한 때 경제적으로 우리를 앞선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가난하며, 그 가난을 티내지 않으려 애쓰는 나라일 뿐이다.
기근 상황이 장기화되자 북한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들로 산으로 다니며 먹을 만한 것을 구했다...중략...이러한 민간 차원의 실험적 생존전략은 상당한 위험과 부작용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구토·설사와 기생충 감염은 그중 흔한 문제였다. 영양실조로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는 이런 사소한 증상조차 치명적인 질병이 되어 사망에 이르기도 했다...중략...자신감을 가지고 북쪽 대표들에게 구충제 공급계획을 설명했다. 바로 단호하게 안 받겠다고 했다...중략...비공식적인 자리에서 거듭 설명하고 진의를 파악해보니, 국가 체면을 손상시킬 수 있는 물품을 받으면 문책당할 수 있다고 한다. 기가 막혔다...중략...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제안 방법을 궁리해보았다. "영양증진제!" 1년에 한알 복용하면 12~15퍼센트의 영양증진 효과가 있는 새로운 약이라고 소개하기로 하고 샘플포장을 다시했다...중략..."이런 약은 받을 수 있지요!" 다음 해에 만난 북쪽 대표들은 활짝 웃으며 반색을 했다. p.242~243
기근과 가난, 그리고 인권유린의 문제들은 사실 뉴스나 인터넷을 통해 익히 보고, 들었던 내용이다. 이 책에서 처음 알게된 것이 해외로의 고아 파견과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북한의 지원이었다. 지금 상황이 어찌되었던, 왜 일본에 조선인 학교가 있고, 그들이 북한 국적을 포기하지 못하는 지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이런 지원을 먼저 했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든다.
김일성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편으로 고아들을 보내면서 조선의 교사들과 학교체계도 함께 보냈다. 루마니아 교사들에게 현지 언어와 교육내용을 배우면서도 조선의 역사와 언어를 잊지 않도록 교육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정기적으로 격려선물을 전달하는 장학사절단을 보내서 조국을 그리게 했다. 전쟁이 끝나면 조국으로 돌아올 사람들을 키우는 일시적 피난지 학교로서 기능하게 한 것이다. 그 모든 교육과정을 통해서 조국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로서의 김일성이란 존재를 느끼고 그리워하게 했다. p.110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남한은 '고아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피붙이를 중시하는 문화, 육아의 대부분을 부모가 떠맡는 구조이기 때문에 입양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똑같은 전쟁을 겪었던 당사자이면서도 북한은 선전과 외교, 그리고 체제 유지를 위해 남한보다 더 섬세하게 살폈던 것 같다.
일본 내에 최초로 대규모 민족교육체계가 만들어진 것은 해방직후였다....중략...이는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강제된 일본어 사용과 창씨 개명 등 문화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고, 당시 일본으로 끌려온 대다수 동포들에게는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로서의 민족교육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국의 분단과 정세 불안정으로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의 의무교육체계로 들어가라는 미국 점령국의 일방적 명령에 저항하다가 대부분의 민족교육현장이 폐쇄되는 위기를 겪었다....중략...이 곤란한 시기에 북한에서 김일성의 이름으로 보내온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은 민족학교를 재건하려던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 생명수 같은 것이었다. 1957년 4월 신학기에 맞춰서 당시의 금액으로 1억 2천만 엔이란 거액의 지원금이 도착해서 여러지역의 조선학교 건립자금이 되었다. 당시 전후 복구사업이 한창이어서 여유가 없는 와중에도 북한이 막대한 교육원조비를 보냈다는 사실에 재일동포들은 감동해서, '조국'이 자신들에게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경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조선학교에서는 그때의 감동을 표현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p.117
1억 2천만 엔이면 지금도 꽤 큰 금액이다. 북한이 왜 무리를 해서 저 금액을 보냈던 걸까? 북한은 여전히 이 재일 조선인들에게 꽤 섬세하게 신경을 쓰고 있다. 대기근으로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도 묘향산에 방문한 재일조선인 학생들에게 헬기로 선물을 보냈다고 하니 말이다. 이는 여전히 '백두혈통'에 의존하는 '극장국가' 북한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일 지도 모른다. 내부의 실속보다는 외부의 화려함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옛날옛적 단군신화 같은 백두혈통 스토리는 나로서는 어처구니가 없고, 웃음이 나는 이야기이지만, 아마도 북한에서는 신성시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신성한 존재, 백두혈통이 다스리는 나라, 북한은 행복해야 하고, 잘 살아야 하고, 멋져야 하기 때문에. 가난하면서도 가난을 티내지 않고, 오히려 목에 더 힘을 주게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북한'이라는 나라의 실체에 한발짝 더 가까워졌다. '기근이 들었고,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의 유입이 시작되었으니 언젠가는 무너지겠지.'라는 생각은 나만의 순진한 생각임을 알게 되었다. 북한은 아마도, 김정은이 갑자기 급사를 하거나 암살을 당하지 않는 한, 그대로 체제가 유지되어 갈 것 같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들이 누구인가'이다. 북한이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외부의 '신용도'를 높이는 국가여야 우리에게도 이득이 될 것이기에 우리는 '북한'에 대해 더 알 필요가 있다.
2005년 가을, 중국정부는 판유리를 생산하는 '대안친선유리공장'을 지어서 북한에 기증했다...중략...나는 남한 기업인들을 만날 때마다 방풍이 잘되고 난방에도 도움이 되는 경제적인 창호를 우선 탁아소, 유치원, 학교에 공급할 길은 없는 지 상의하곤 했다. 머지않아 각 가정단위까지 공급할 수 있는 엄청난 수요를 감지한 한 기업이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때부터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이제는 지나간 옛이야기가 되었다.
p.331
이 외에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이 책에는 많다. 문화인류학자가 본 북한은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온 마음을 다해 수령님을 모시는 광신도들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북한에도 'sky캐슬' 식 사교육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어딜가나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배고픔에 못 이겨 탈북하고, 탈북자 중 여성들은 탈북한 족족 인신매매를 당한다는 이야기는 참 서글펐다. 공안에 들켜서 북한에 강제북송되었을 때 중국인의 아이를 임신했을 경우 강제로 낙태를 당한다고 했다.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이미 아이를 낳았거나, 아이가 생겼겨나 해서 갈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평양을 제외한 외곽지역은 지원이 끊긴 지 오래이고, 그래서 가족이 해체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먹을 입을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큰 아이들은 나가서 자신들이 스스로 밥벌이를 한다고 했다. 이 아이들의 영양실조 실태를 다룬 이야기는 정말 마음이 아팠다. 국경접경지역 근처 지역, 평양에서 지원이 끊긴 지역에서 사는 아이들은 극심한 요오드 결핍에 시달린다고 했다. 요오드를 비롯한 필수미량 영양소의 결핍은 두뇌발달과 신체발달을 저해한다. 실제 2002년도부터 이 문제가 논의되었으나 정치적인 문제로 지원이 불가하게 되었다. 10년 후, 2012년에 탈북해서 하나원에 오는 아이들 중에 심각한 인지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평화'와 '공존'의 의미에 대해 다시 곱씹게 되었다. 여전히 우리나라는 휴전상태인 나라이고, 서로 언제든지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다. 실제로 외국에서는 이 점을 불안요소로 본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혹은 북한이 보기에 좀 아니어서 이랬다저랬다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평화로운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북한과 접촉면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접촉면을 넓히고 북한이 세계시민으로 자리를 잡도록 도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적인 지원은 자존심 때문에 그들이 받지 않는다. 아무리 뛰어난 설비를 지원해줘봤자 돌릴 능력, 유지능력이 되지 않으니 무용지물이다. 그럼 답이 뭔가? 북한의 개방을 유도해야 한다. 개방을 유도해서 그들이 핵을 포기하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스스로 우리와의 격차를 줄일 수 있도록 해야할 것 같다.
아울러 우리의 문제점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평화로운 부강한 나라'가 된다는 것은 국민들이 스스로 이 나라에 대해 만족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경쟁은 당연시되었고, '돈'을 최고로 아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보다는 '나'에 관심을 기울이고,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되었다.
북한과 남한이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통로가 하루빨리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북한과 남한의 사람들이 만나 서로 대화를 주고 받는 횟수가 늘어나고,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면 그만큼 우리 사이에 벌어진 간극들을 스스로 좁혀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가깝지만 너무나 먼 나라 북한과 남한이 아닌, 서로를 응원해주고 믿어주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우리의 다음 세대가 평화로운 한반도, 더 부강한 나라에서 살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