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쁜 기억을 지워 드립니다 - 기시미 이치로의 방구석 1열 인생 상담
기시미 이치로 지음, 이환미 옮김 / 부키 / 2020년 2월
평점 :
나쁜 기억은 없다.
제목부터 매력적이다.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라니! 누구나 인생에서 없어졌으면 하는 기억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이 책의 저자는 철학자다. 그 철학자가 한국인들을 위해서 저술한 인생상담서다. 상담의 방식은 독특하다. 총 5부로 주제를 나누고, 총 19편의 한국영화의 주인공들이 철학자와 대담을 나누는 방식이다. 유명한 영화들이 포진해 있어서 대화내용을 공감하기 쉬웠다.
책 제목처럼 이 책이 '나쁜 기억'을 지워주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삶은 어차피 고통이며, 다만 이 고통스러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거는 지울 수 없는 것이지만, 과거에 대한 의미부여가 달라진다면 과거는 바뀌는 것이며, 또는 지금의 나 자신이 바뀌는 것이 과거를 바꾸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결국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차이가 '나쁜 기억'을 만드는 것이다.
'엄마'라는 자리에 대한 고민
이 책은 연인과 부부/ 가족과 부모/ 나와 인생 / 세상에 대해 / 사회 속 인간관계 등 총 5개의 주제로 영화를 다룬다. 그대로 쭉 읽어도 좋았지만, 내게 필요한 상담 주제를 골라 읽는 방법도 좋을 것 같다.
읽으면서 가장 공감이 많이 되고, 와 닿았던 부분은 '가족과 부모' 였다. 이 부분에서 다루고 있는 영화는 똥파리, 수상한 그녀, 마더로 총 3편이다. 이 중 '마더'가 가장 인상이 깊었다.
'마더'에는 품 안의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엄마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4살이면 그래도 많이 큰 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내가 아이를 키워보니 4살은 커녕 초등학교 학생들도 다 아기였다. 도무지 품에서 떼어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러다 사춘기가 와서 부모에게 독립하기를 원할 때, 나는 이 미션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의문에 깔린, 가장 문제적인 부분을 철학자는 '도준이 엄마'를 통해 보여준다. 그건 아이와 나를 동일시하는 태도였다.
"자신이 누구의 아이라고 생각하나요?”라고 질문을 받은 한 아이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부모님의 아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을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다. 아이는 분명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그렇다고 '부모의' 아이는 아니다. 이처럼 부모나 자식이나 서로 일심동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많다.
p.135
이 영화의 엄마는 누구에게든 '어머니'나 '도준이 엄마'라고 불린다. 아이가 부모의 아이가 아닌 것처럼 부모는 아이의 '부모가 아니다.
나는 아이 때문에 힘들어하는 부모에게 부모가 먼저 행복해져야 한다고 늘 말하곤 한다. 아이는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부모를 행복하게 한다.p.138
행복한 엄마가 되려면?
아이를 키우면서 나도 내 이름을 잃어버렸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건 극단적으로 말하면 친정엄마와 택배아저씨 그리고 병원에 갔을 때 나를 부르는 간호사님 뿐이다. 아이로 인해 맺어진 인연들이 늘어나면서 "~엄마"로 소개하고, 소개받는 일이 익숙해졌다. 그러면서 내 자아정체성도 '엄마'에 맞춰지는 것 같다.
엄마라는 정체성이 자랑스럽고,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온전히 '나만의 영역'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든지 과함은 좋은 게 아니다. 아이에게 사랑을 쏟아야 할 때는 아낌없이, 언제든 둥지를 벗어나 날아오를 때는 '엄마'가 아닌 '나'를 소개할 수 있도록 나만의 일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를 오롯이 믿어주는 태도도 중요한 것 같다.
부모가 아이를 대신해 문제 해결에 나서는 것은 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럴 때 부모는 애초부터 자식을 신뢰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p.136
행복한 엄마가 되는 길은 '아이'를 믿어주는 것 그리고 '엄마'가 아닌 '나만의 행복'을 찾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내 아이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아울러 행복하게 사는 아이를 행복하게 지켜볼 수 있는 엄마로 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다.
나만의 작은 방구석 상담소
살면서 수많은 고민과 의문을 만난다. 수없이 흔들리고, 상처받고, 길을 모를 때는 이 책을 펼쳐보면 좋을 것 같다. 영화 주인공과 나누는 철학자의 대화 속에서 내 고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