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XX 새소설 14
김아나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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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다른 이야기지만, 전부 같은 데서 비롯한 하나의 이야기다. 그들은 각자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건 하나의 목소리면서 동시에 무수히 다양한 목소리다. 1990XX』는 그 이야기를 각기 존재하는 고유의 목소리들로 들려주기도 하고, 하나의 목소리로 들려주기도 한다. 1990년에 XX 염색체를 갖고 태어났어야 할 아기들과, 1990년에 XX 염색체를 갖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았던 사람들과, 1990년에 XX 염색체의 아기를 임신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백말띠 여자는 드세다는 속설 때문에 1990년 많은 여아가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고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 속설의 유래를 찾는 데서 소설은 시작한다.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0년 경오년 백말띠의 해에 모리 오이치라는 일본인 여자가 충무로에 있는 자기 집에 방화를 저질러서 일대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그래서 백말띠 여자는 태어나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속설은 특정 인물이 만들었다. 하지만 사회가 만든 것이기도 하다. 속설은 여자 아기를 낙태해야 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아기들은 속설 뒤에 숨은 사회의 여성 혐오로 인해 희생되었다. 속설로, 아니 여성 혐오로 뒤덮인 세상에서 누구는 죽었고 누구는 살아남았다.

 

소설에서는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등장한다. 한데 뒤얽히기도 하고 같이 살아가기도 한다. 각 장은 전부 다른 화자가 등장하며, 모두 다른 방식으로 비현실과 현실을 넘나들며 진실을 이야기한다. 인물들은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하지만 모두 하나의 이야기로 모인다. 살아남은 여자들이 싸워서 그 이야기들을 얻어내고 간직한다. 실제로 일어났으나 모두가 아는 모종의 이유로 소거되었던 그 이야기들에 다시 목소리를 부여한다.

 

“1990XX”. XX는 여성의 성염색체를 뜻하는 과학 용어이지만 마치 사라져야 하는, 그래서 X표 쳐져야 하는 존재였다. XX. 부정당하고 조각난 존재들. 1990XX』는 XX에 가려졌던 XX 존재들의 이름들을 호명한다.

 

고수현, 지혜, 소리, 엄지나, 강은주, 오한별, 현아, 박이현, 지안이, 새롬이,

목소리를 되찾은 존재들이 세상을 조각내고 다시 돌아온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그 여자들은 각각 말띠, 호랑이띠였다. 말띠와 호랑이띠 해에 태어날 여자아이들은 모두 과거에 살았던 미친 여자들의 운명을 닮을 것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날들은 기억에서 완벽히 소거한 채. - P43

뉴스에 따라 내가 내린 결론이 하나 있다. 인간에게 도덕이란 우리 짐승에게처럼 지켜야 할 규율이 아닌, 상대방을 비난하기 위한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 P62

"불완전한 여자아이들이 더 이상 버려지지 않고 짐승들이 배척받지 않는 순간 우리 왕은 모두 소멸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고양이 시민들이여. 소멸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소멸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소멸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P86

아무것도 안 해. 아무것도 안 하기 위해 투쟁했어. - P233

왜 양대기와, 양대기의 이론에 동의하는 자들은 여자아이를 제거해야만 후손의 기를 세울 수 있다고 여기는 걸까. 그들이 말하는 기는 얼마나 나약하기에 여자아이에게 지는 걸까.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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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회 - 일상을 파고든 마약의 모든 것
양성관 지음 / 히포크라테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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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약을 못 먹는다. 그래서 웬만한 사소한 감기 증상으로는 약을 먹지 않는다. 코로나19 백신 1차 접종 전에도 약을 준비해 놓지 않았다가 생고생해서 그다음에는 미리 약국에 타이레놀을 사러 갔다. 그런데 알약을 못 먹으니 갈아달라고 말씀드렸더니 못 간다고 그냥 주셨다. 그와 같은 성분의 다른 약을 권해 주지도 않았다. 이유도 듣지 못했다. 결국 집에서 절구로 빻았다.


서방정은 특수 코팅을 해서 약효가 서서히 나타나고 오랫동안 지속되며, 일반적인 알약보다 용량이 1.3배가량 많다고 한다. 타이레놀도 서방정인 게 있다고 한다. 상자를 버려서 내가 산 타이레놀이 서방정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맞다면 모든 의문점이 풀린다. 그리고 나는 용량이 많은 약을 먹은 게 된다. 다행히 타이레놀은 비마약성 진통제로 내성이나 중독성이 거의 없다고 한다. 실수로든 고의로든 만약 비마약성 진통제가 아닌 마약성 또는 향정신성 약물을 오남용하게 된다면 타이레놀처럼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저자는 진통제나 다이어트 약과 같이 특정한 약을 처방해 달라고 요구하는 환자 등 의사로 일하면서 대면했던 약물 중독자들을 책의 프롤로그에서 소개한다. 물론 친구나 가족 등 가까운 사람의 권유로 마약을 시작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어쨌든 어떤 경로로든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결국 중독된다.


『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회』는 먼저 1부에서 개인이 마약에 빠진 뒤 겪게 되는 감정과 변화 양상을 설명한다. 그러고 나서 2부에서는 마약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시스템과 그 역사를 이야기한다. 마약의 시작과 끝을 개인과 사회라는 두 차원에서 다뤄서 마약이라는 대상과 마약을 둘러싼 사람들을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게 책을 구성했다.


SNS를 통해 마약을 구하기가 쉬워졌다지만 내게 마약은 아직은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특히나 2부의 내용은 더욱 낯설고 새로웠다. 아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한국은 이제 마약을 생산하는 국가가 아니라 소비하는 국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약을 생산하는 일은 위험 부담이 크기 때문에 주로 가난하고 정치가 부패한 국가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니 말이다.


대표적으로 콜롬비아의 파블로 에스코바르와 미얀마 샨족의 쿤사가 있었다. 그들은 지역 주민의 민심을 얻기 위해 마약을 팔아 번 돈으로 학교와 같은 시설을 만드는 등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선행을 베풀기도 했다. 그들을 영웅 대접하는 주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자기들의 범죄 행각을 가리기 위해 그랬을 뿐이었다. 경제 개발이 독재를 정당화할 수 없듯이 그들의 범죄 또한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이렇게 생산된 마약은 그 지역에서 소비되기도 하지만 해외에 팔리기도 한다. 공급과 수요가 맞물리기에 마약은 국경을 넘어간다. 그리고 국경 너머에서 마약을 찾는 사람 중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많다고 한다. 힘든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마약을 시작하는 것이다. 부와 가난의 대물림은 마약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본주의의 세상에서는 마약도 자본의 논리를 따른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마약 중독자를 범죄자로만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마약사범을 처벌하고 교도소에 수용하는 것보다 중독을 치료하는 게 돈이 더 적게 든다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다 보면 한국 사회가 치르고 있는 마약과의 전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실효성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약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자꾸만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려고 한다. 사회든 마약 중독자 본인이든 마찬가지다. 자기를 지나치게 믿는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그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스로 기대를 저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건 본인이 더 잘 안다. 그럼에도 자기를 과신하고 잘못된 선택을 한다. 그렇게 마약에 중독된다. 자기는 언제든 마약을 끊을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치료 없이 마약을 끊는 건 불가능하지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관은 턱없이 부족하다. 저자는 끝까지 경고한다. 그러니 애초에 시작도 하지 말라고 말이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향정신성 약물을 처음 접한 후 자의로 약을 복용하다가 약이 마약이 되거나 처음부터 마약을 찾는다.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사람이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것처럼, 마약에 빠져드는 것이다. - P46

한국에서도 마약 투약자의 대부분은 비정규직이거나 무직이다. 정규직은 30.9%에 불과하다. 마약 투약자 중 가족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는 비율은 54.4%에 이른다. 게다가 지난 한 달간 수입이 50만 원 미만인 비율은 절반이 넘는 52.2%에 달한다. 가난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마약만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더 아프고 알코올 등에도 더 취약하다. 가난하면 치료를 받지 못해 더 아프고, 아프니까 일을 할 수 없어 더 가난해진다. 뭐가 먼저인지 알 수 없는 악순환이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가난해서 마약을 하고, 마약을 하니 가난해진다. - P95

더 센 약을 하면 진짜 중독될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에 자신은 끝까지 안 한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처음에 마약을 할 때도 그랬다. 친구들이 하면 나도 안 할 수가 없다. 다들 담배를 피우는데 나만 안 피울 수 없고, 다들 술을 마시는데 나만 안 마실 수 없다. 다들 마리화나를 하는데, 다들 코카인을 하는데 나만 빠질 수 없다.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은 있어도 한 가지 술만 마시는 사람은 없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 P109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는 ‘의지’로 뛰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에 문제가 있으면 ‘의지’, ‘결심’, ‘마음’만으로 나을 수 있다고 여긴다. 업 계열의 코카인이나 메스암페타민 중독자들이 특히 그렇다. - P117

마약으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옆에서 다른 누군가가 죽어가는 것도 모른다. 마약은 둘이 하다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 그렇게 약을 하다 자신이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목숨을 잃는다. - P146

1ha당 코카 잎 6.4t을 수확하는 것만으로도 커피를 재배할 때보다 2.1배 높은 매출을 올린다. 여기에 코카 반죽까지 만들면 코카 잎을 재배하는 것보다 5배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콜롬비아 농부가 불법임을 알고서도 코카를 재배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 P187

마약중독자에 대한 언론의 보도와 사람들의 관심조차도 차별적이었다.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이미 ‘좀비 거리’와 같은 곳이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06

다른 마약은 왠지 불량한 이들이나 하는 것 같아 꺼려지는 게 있었다. 하지만 의사가 처방한 마약은 달랐다. 기존의 더럽고 불결한 마약에 비해 깨끗하고 청결해 보였다. 또한 기존의 코카인이나 헤로인 따위를 파는 ‘위험한’ 마약 딜러가 아니라 ‘안전한’ 병원과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약을 하는 이들도 ‘특수한’ ‘소수의’ ‘범죄자’가 아니라 ‘평범한’ ‘다수의’ ‘보통 사람’이었다. FDA가 의사에게 믿음을 준 것처럼 의사는 환자에게 믿음을 주었다. "(전문가인) 의사가 병원에서 처방한 약이라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기존의 마약보다 훨씬 더 쉽게 옥시콘틴에 빠져들었다. - P263

마약중독자를 1년 동안 치료하는 데는 1만 8,000달러(2,300만 원)가 들지만, 죄수를 1년간 수감하는 데는 3만 9,158달러(5,090만 원)가 든다. 마약중독자 치료비가 수감자 비용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마약중독자는 치료를 받으면 50%가 약을 끊는다. 하지만 치료 없이는 거의 끊지 못한다. 마약중독자를 감옥에 가두는 것은 비용 측면이나 재발 방지 측면에서 모두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미국은 마약과의 전쟁에서 대부분의 예산을 체포와 처벌에 사용하면서 마약중독자의 재발을 막는 데 실패했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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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릴 수 없는 미래 - 사라진 북극, 기상전문기자의 지구 최북단 취재기
신방실 지음 / 문학수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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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또다시 북극이다. 작년에 극지연구소 대학생 기자단 활동을 하면서 자료를 볼 만큼 봤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이상하게 극지 이야기는 질리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만은 않다. 극지를 들여다볼수록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의 환경이 왜 이렇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지금껏 살아온 대로 계속 살아가지 않고 무언가를 바꾸고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져서 내 생활 방식도 주기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아무튼, 결국 나는 극지연구소 연구원분의 추천사를 보고 이건 꼭 읽어야 한다며 홀린 듯 서평단을 신청했다.

『되돌릴 수 없는 미래』는 작년에 방영한 KBS 《시사기획 창》의 〈고장난 심장, 북극의 경고〉 프로그램 제작기, 즉 기자의 북극 취재기다. 북극으로 출발하는 여정에서부터 시작해서, 기상전문기자의 눈으로 본 북극의 변화와 취재 뒷이야기를 들려준 뒤, 다큐멘터리 편집 과정과 기상전문기자의 일에 관해서도 설명한다. 방송에는 분량상 넣지 못한 인터뷰도 중간중간에 실려 있다. (다큐멘터리 풀영상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 제목을 짓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북극은 우리 몸으로 얘기하면 심장하고 같은 역할”이라는 남승일 박사님의 인터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기후위기의 핵심이 북극에 있다는 것이다. 북극은 현재 지구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표다. 다른 지역에 비해 평균 기온이 더 많이 올라 빙하도 급속도로 녹고 있다. 하얀 빙하는 햇빛을 반사하는 역할도 하므로 빙하가 사라지면 기온 상승 속도도 가속화된다. 악순환이다. 심지어 빙하가 녹으면서 퇴적물이 피오르에 쌓여 갯벌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고도 한다.

그뿐만 아니다. 인간이 배출한 미세플라스틱은 지구를 돌고 돌아 극지에까지 다다랐다. 노아의 방주에 비유되는 스발바르 국제 종자 보관소 입구가 눈이 녹아서 침수되는 사건도 있었다. 북극에 모기도 등장했다. 또한 해빙에서 물범을 사냥하던 북극곰이 육지에서 바닷새의 알을 훔쳐 먹거나 순록을 잡아먹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다. 환경이 변하면서 서식지도 이동하고 있다. 인간으로 인해 비인간 동물도 피해를 보는 것이다.

작년에 자료 조사를 하다가 극지연구소는 대체 뭐 하는 데냐, 세금이 아깝다는 누군가의 항의성 문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저자도 책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것처럼 북극은 전 지구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폭염과 한파, 초강력 태풍까지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은 북극이 보내는 경고다. 그래서 누군가는 북극을 연구해야 하고, 누군가는 취재해야 하며,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바렌츠를 죽음으로 몰고 간 북극의 해빙은 이제 여름이 되기도 전에 대부분 녹아버린다. 쇄빙선 없이도 북극 탐험이 가능해지는 미래는 축복이 아니라 비극이다. 기후학자들은 앞으로 10년 안에 해빙이 없는 북극의 여름이 찾아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 P52

실제로 북극을 오가는 과학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북극의 빙하를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면 온실가스와 오염물질 배출이 늘고 빙하와 영구동토층, 생태계에 영향을 줄 테니 말이다. 관광객이 늘어날수록 주민들은 돈을 벌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북극이 정체성을 잃고 결국 북극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질지 모른다. - P57

산이 있으니 당연히 눈사태가 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북극에서 어떤 거대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어요. 기온이 상승하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눈이 쌓이는 각도가 변하고 있습니다. 체감하기 힘든 사소한 변화, 예를 들면 어느 시기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왔는데 갑자기 남쪽에서 불어온다거나 하는 현상이 눈사태 같은 예기치 못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죠. - P78

역설적으로 빙하 주변 바다는 온통 시뻘건 흙빛이었다. 산 정상의 빙하가 후퇴하면서 쓸고 온 흙과 모래 때문이다. 콸콸 솟구치는 흙탕물 주변에는 엄청난 양의 자갈과 모래가 쌓여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면 섬이 하나 생겨날지도 모른다. 빙하가 녹으면서 해안가의 지형을 통째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 P88

북극의 변화는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이라는 가속도를 더하며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북극의 온도 상승이 해빙을 더 많이 녹이고, 해빙이 사라진 검은 바다는 더 많은 태양에너지를 흡수해 더 많은 해빙을 녹인다. 플러스(+)가 플러스(+)를 불러오는 공포의 양의 되먹임 현상으로 사소해 보이는 변화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는 것이다. 북극의 기후변화는 전 세계 나머지 지역보다 2~3배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북극 증폭Arctic Amplification’이라고 부른다. - P111

우리의 삶은 북극과 연결돼 있다. 수천 km 떨어진 곳의 기후가 서로 영향을 주는 현상을 기상학 용어로 ‘원격 상관teleconnection’이라고 부른다. 지구는 대기권과 수권, 지권, 빙권, 생물권으로 연결돼 있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언젠가는 마주치게 된다. 이런 걸 필연이라고 해야 할까. 오늘 내가 마시는 물 한 잔은 아주 오래전 지구 반대편에서 증발한 호수일지도 모른다. 지구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상 모든 것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 P115

남극과 북극으로 향하는 여행객 수에 비례해 유람선 운항도 증가했고 빙산과 충돌하는 등 아찔한 사고도 끊이질 않았다. 비행기와 보트, 차량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가 빙하의 수명을 단축하고 있다는 진실은 뒷전이었다. 어쩌면 마지막 빙하를 나만 보겠다는 이기심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여행객들을 위해 만든 도로 덕분에 편의성과 접근성이 좋아진 만큼 운명의 날doomsday로 향하는 속도 역시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빨라지고 있다. - P126

일방적으로 육식 대신 채식을 하라고 요구할 수 없으므로 음식을 기후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대중의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선 2014년부터 ‘기후 미식 축제’가 열리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 감소와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위해 기후 미식가가 되자는 의도에서 시작됐다. 육식주의자도, 채식주의자도 아닌 기후 미식가라니 좋지 아니한가. - P226

기상청도 학계, 언론, 시민과 함께 한국형 우기 도입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현실판 장마는 더 이상 소설 속 장마가 아니다. 기후위기로 인해 우리는 전통적인 장마와 작별하고 새로운 우기에 적응해야 하는 첫 세대가 됐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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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은 창백한 손으로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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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 타인을 희생시킬 수 있다. 방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양심은 폐기하고, 그 자리에 순도 100%의 이기심을 주입하면 된다. 타인을 철저히 수단으로써만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그런 자기를 철저히 숨길 수 있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자기가 충분히 지배할 수 있는 공간까지 갖추면 거의 완벽하다.


『낙원은 창백한 손으로』는 그런 이야기다. 선양의 다섯 아이들은 호기심 때문에 잔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진실은 그들에게 “창백한 손”을 내민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이후 각자의 삶을 살다가 선양 에덴병원 병원장이 살해되면서 다시 선양으로 돌아가 15년 전 사건을 돌이켜 본다.

그들을 지켜보는 화자가 반복해서 진술하듯 선양은 너무 좁은 동네다. 무엇이든 은폐할 수 있어서 어떤 욕망이든 실현할 수 있는 동네, 악을 실행하는 데 최적의 동네, 그래서 악과 악을 숨겨 주고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악이 결합하여 거악(巨惡)이 생겨날 수 있는 동네인 것이다. 악으로 인해 악이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그렇지만 악을 감추고 있던 거대한 벽에도 균열을 낼 수 있다. 그 틈으로 진실을 목도한 뒤에 일어날 일은 어느 정도는 목격자에게 달려 있다. 그들이 진실을 마주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미래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은 악을 마주했을 때 그 악에 대항하기 위해 본인도 기꺼이 악을 체화하는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고. 자기만의 “낙원”을 만들기 위해서 “창백한 손”을 타인에게 뻗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어쩌면 악인이 되지 않은 사람은 살면서 자신이 통째로 잡아먹힐 만큼 거대한 악을 직접 대면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일지도 모른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그 실체를 캐내면 통쾌할 줄 알았다. 그러나 기대와는 정반대의 기분에 휩싸였다. 무서웠다. 그 사실을 알기 전의 삶으로 다신 돌아갈 수 없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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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새와 소년에 대해
장아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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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선별적이다. 소중하게 여기는 기억일수록 쉽게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에 과거에 잠시 내 삶을 스쳐 지나간 것들은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너무 많은 걸 쉽게 잊었다. 어렸을 때 이 동네로 이사 오기 전에 어울렸던 친구들의 얼굴과 이름을, 그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공간의 구조를, 그들과 했던 놀이를. 유년의 대부분을.


그러니 일주일이면 모두가 준후를 잊을 거라는 새별의 말과, 그 말처럼 바로 전날까지도 사라진 준후를 걱정하던 친구들이 준후를 잊고 준후가 누구냐고 되묻는 장면은 판타지라는 장르적 설정 아래 감춰진 현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자기 삶에 준후가 남긴 흔적이 선명한 사람들만이 준후를 잊지 않고 되찾으려 애쓴다.

정확히 말해서 준후는 실종된 게 아니라 새로 변한 것이다. 희미는 신목(神木)에게 준후가 자신을 좋아하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빈다. 그러고 돌아가던 중 민진과 함께 있는 준후와 우연히 마주치고 준후에게 묻는다. 자기를 좋아하냐고. 명쾌하게 답하지 않는 준후에게 희미는 당장 사라지라고 화를 낸다. 그 직후 준후는 새가 된다. 그것도 손만 한 곤줄박이로. 희미, 민진, 새별 세 소녀는 준후를 다시 사람으로 되돌리기 위해 머리를 맞댄다.

그들이 해결책을 찾아 다니면서 잊혔던 과거의 풍습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저기에 깃들어 있는 신과 혼들이 삶의 세계로 다시 소환된다. 신도시에서 그들은 파괴된 환경과 사라진 마을의 조각들을 모아 맞춘다. 신도시가 밀어낸 그 땅의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다시 준후를 기억하는 일과 연결된다. 이 모든 것은 자신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대상을 잊지 않고 지키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새별의 말마따나 “나를 지킨다는 것은 우리를 지킨다는 것과 같은 의미”(p.179)가 된다. 세 소녀는 아무도 지키려 애쓰지 않는 것들에게서 가치를 발견하고 지켜내고자 하는 인물들이다. 희미는 자기가 준후에게 사라지라고 말해서 준후가 새로 변해 날아가 사라져 버릴 뻔한 데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민진은 새, 특히 곤줄박이를 좋아하고, 새별은 그들의 거주지인 새별시의 모든 것에 애정을 느낀다. 준후가 새로 변하는 광경을 목격한 그들은 준후가 다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마음들이 모여 큰 힘을 발휘한다. 잊음으로써 잃지 않기 위한 그들의 분투는 모두를 지키는 힘이 된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기원하는 마음이란 그랬다. 빛이자 온기였다. - P107

그러니까 제가 정말로 소망하는 건요, 준후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거예요. 잊지 않는 거예요. 상처 입은 일까지 계속 기억하는 거예요.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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