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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동물의 탄생 - 동물 통제와 낙인의 정치학
베서니 브룩셔 지음, 김명남 옮김 / 북트리거 / 2025년 2월
평점 :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비둘기한테 뒤통수 맞은 느낌이다.
기분이 상당히 더러울 일을 당했을 때 나는 그런 표현을 사용한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비둘기한테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다는 일화를 아는 친구들은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듣는다. 정말로 그때 기분이 더러웠다. 이후 나는
비둘기를 혐오하게 됐다.
아무 잘못 없이 뒤통수를 맞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러운 비둘기가
날개로 내 뒤통수를 때림으로써 내 뒤통수에 더러운 게 묻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어서였다. 더러운 것을
내 몸에 묻힌 존재에게 혐오감을 느낀 것이었다. 그전에도 비둘기를 좋아하지 않긴 했지만 혐오하지는 않았었다.
한국의 도시에는 비둘기가 깔려 있다. 여전히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인간도 있고 나처럼 비둘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인간도 있다. 비둘기는 인간이 만들어 놓았다고 여기는
세계에 침입했다. 비둘기는 인간과 너무나 가까이 있다. 아마
오늘도 나는 비둘기를 수십 마리 봤을 것 같다. 인간 다음으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척추동물이니까.
『나쁜 동물의 탄생』의 저자 곁에도 그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이 있다. 저자에게
‘망할 케빈’이라고 불리는 청설모다. 망할 케빈은 저자의 정원을 “무제한 뷔페로 이용”한다. 저자는 케빈에게 매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토로(내지는 고백)한다. 미국의
청설모는 그렇게 유해동물이 되어 저자에게 망할 케빈이라는 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비둘기와 청설모가 처음부터 유해동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해를 끼쳤기
때문에,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이 소유의 감각을 느끼고 보호하고 싶어 하는 대상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비둘기는 나’의’ 뒤통수를
가격했고, 청설모는 저자’의’ 토마토에 이빨 자국을 남겼다. 감각할 수 있는 위해이지만 막을 도리는
없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둘기와 청설모뿐만이 아니다. 저자는 쥐,
비둘기, 코끼리, 고양이, 참새, 곰 등 다양한 동물 종이 어느 사회에서 유해동물이 된 계기와, 그 사회 집단이 유해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취재하여 책에 담았다. 유해동물이라
일컬어지는 동물들을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유해동물로 여기지는 않았다. 유해동물은 사회적 맥락과 인간과의
관계에 의해 정해졌다.
고양이는 아주 단적인 예시다. 한국에서는 길고양이를 공격하면 (형량이 너무 낮긴 하지만) 동물 학대로 처벌한다. 한국 사회 구성원 대다수는 고양이가 인간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귀여움을 능가할 만큼은
아니라고 느껴서다.
반면 고양이를 유해동물로 지정하고 ‘제거’하는
사회도 있다. 고양이가 토착 동물을 사냥해서 멸절 위기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호주에서는 보호 구역 내에 있는 야생 고양이는 그냥 죽여도 된다고 한다. 그들’의’ 토착 생물
보호가 고양이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고양이가 참새와 쥐를 사냥해도 참새와
쥐의 개체수가 급감하여 생태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러한 지점에서 고양이를 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이다.
저자는 무지에서 비롯한 무력감이 특정 동물을 유해하게 여기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고양이로부터 호주의 토착 생물을 완벽하게 보호하는 방법을 몰라서, 고양이의 토착 생물 학살 앞에서 무력감을
느껴서, 무력감에서 수치심이 비롯되어서라고 설명한다.
즉, 내가 저 동물보다 약하다고 느낄 때 인간은 그 동물을 혐오하고 ‘유해동물’이라고 낙인찍는다. 그래서
저자는 ‘유해동물’이라는 말을 없애자고 제안한다. ‘유해동물’이라는 단어로 인해 해당 동물이 ‘유해’하다는 틀에 갇힌다고 말한다.
어차피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동물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 동물들은 그저 존재하고 생존하려 애썼을 뿐이다. 인간이 소유한다고 여기는
것들을 동물도 탐냈을 뿐이다. 동물은 그저 거기에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유해동물 관리에 온갖 방식으로 실패한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서로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 실패의 이유다. 인간 거주지에 유해동물이 들끓는 것은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깨끗하고 잘 지어지고 해충 없는 집에서 살 존엄성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유해동물에게 맞서도록 도울 수 있는 시스템을 정비하는 데 돈을 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회계약이 실패하는 곳에서 다른 종이 성공한다. - P38
유해동물은 자연이 우리를 못살게 군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연이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는 증거다. 자연은 우리 벽에서 살고, 우리 위에서 똥 싸고, 우리의 토마토를 먹어 버린다. 유해동물은 우리가 자연을 속속들이 이해한다고 자신할 때 자연이 우리에게 들어 올리는 가운뎃손가락이다. 이건 인간을 짜증나게 하는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동물이 승리하는 이야기다. - P42
생계를 지키고자 코끼리를 죽이는 사람들로부터 코끼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쌓이는 기부금은 코끼리와의 갈등에 시달리는 케냐인이 코끼리보다 덜 귀하다고 여기는 식민 체제의 잔재다. 한편 외부에서 케냐를 비난하는 일부 비정부기구와 비영리단체는 또 다른 메시지를 전하는데, 그것은 케냐인이 자기네 야생동물의 가치를 모른다는 것, 케냐인이 후진적 관점에서 벗어나도록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 케냐인은 자기네 야생동물을 알아서 잘 다룰 줄 모른다는 메시지다. - P233
우리가 지금의 방식대로 계속 사는 한, 그러니까 계속 새 공간과 새 쓰레기를 만들고, 새롭고 이국적인 반려동물을 들이고, 야생의 공간으로 이주하고, 우리가 귀하게 여기지 않는 공간은 싹 밀어 버리는 한, 동물들은 계속 우리를 이용하려고 찾아와서 우리 앞을 막아설 것이다. 계속 우리를 성가시게 만들 것이다. 유해동물은 늘 존재할 것이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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