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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사나이 ㅣ 열림원 세계문학 5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24년 3월
평점 :
페터 슐레밀은 악마에게 그림자를 파는 대가로 계속해서 금화가 나오는 주머니를 얻는다. 슐레밀은 엄청난 부를 가지게 되지만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비난받는다. 얼핏 보면 재물을 향한 욕심을 비판하는 평면적인 교훈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그렇게 해석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림자 상실이 단지 부에 대한 탐욕의 결과라는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결말은 둘 중 하나였을 거라고 예상한다. 슐레밀이 영영 그림자를 잃은
채 사람들에게 비난받으면서 살거나, 아니면 악마를 이겨서 그림자를 되찾거나. 그러나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렇다면 그림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림자가 없는 세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또는 사물 등
모든 것)은 물리학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즉 그림자의 부재는
과학에서 벗어난 것, 세계가 작동하는 일반 법칙에서 이탈한 것이다. 슐레밀은
그림자를 잃음으로써 세상의 보편적인 것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 그가 세상의 일반 법칙에 구속되지 않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기에 그림자를 팔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일명 보편성, 정상성에서 벗어난 존재에게 사람들은 이질감을 느낀다. 다른 존재는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 사회 구성원들은 슐레밀이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타자화한다. 그는 그림자를 잃고 정상성의 범주 바깥으로 옮겨짐으로써 인간 사회에서 추방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슐레밀도 자신이
“이전의 죄로 인해 인간 사회로부터 차단되었”(p.118)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자신이 거래한 상대가 악마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으니 굳이 따지자면 그의 죄명은
무지의 죄 내지는 돌다리를 두들겨 보지 않은 죄 정도가 되지 않을까. 과연 그가 남들보다 더 큰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을까.
슐레밀에게 그림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저자 역시 작품에서 돈 자체를 멀리해야 하는 대상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러니 그림자를 둘러싼 사람들의 인식이야말로 이 작품에서 돈보다도 더 중요한 포인트이지 않을까 싶다. 슐레밀은 누구보다도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웠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내 마음에는 벌써 어떤 예감이 싹트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업적과 덕성보다 돈이 훨씬 중요할지라도 실은 그림자야말로 그런 돈보다도 훨씬 더 귀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 P32
자, 정말 제가 누군지 모르시나요? 저는 보잘것없는 악마입니다. 탁월한 기예를 주어도 친구들로부터 배은망덕만을 되받는 학자이자 물리학자처럼 보이는 그런 악마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약간의 실험을 즐기는 것 이외에는 이 지구상에서 다른 어떤 것도 즐기지 않는 악마입니다. - P75
우리는 단지 동일하게 수동적으로 작동되는 동시에 능동적으로 작동하는 수레바퀴로서 그 안에 물려 있을 뿐이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일어나는 것이고, 존재해야만 했던 것이 일어났던 것이며, 그러한 섭리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아. 마침내 내 운명에서, 그리고 내 운명을 공격하는 이들의 운명 속에서 나는 그러한 섭리의 수용을 배웠던 거야.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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