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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동물원의 행복한 수의사
변재원 지음 / 김영사 / 2024년 6월
평점 :
나는 동물원 반대론자였다. 대학교 1학년 때 동물원을 주제로 팀플 발표 과제를 한 적이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내게 동물권 이슈는 많은 사회 문제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발표 준비를 하면서 동물원의 기원과 그에 대한 비판을 들여다보다 보니 자연스레 동물권에 관심이 생겨났다. 동물원은 인간의 오락을 위해 처음 만들어졌으며, 동물의 권리는 철저히 짓밟히는 공간이었으니 당연히 사라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물원과 동물권 이야기라는 말에 혹했는지도 모른다. 동물원과 동물권은 지향점이 상반되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이 책은 나의 편견을 깨부쉈다. 사회적 비판에 동물원은 계속해서 인간이 아닌 동물을 위한 시설로 조금씩 변해왔다. 동물원에서 나고 자란 동물들은 지금 당장 동물원이 사라지면 생존할 수 없다. 다친 야생 동물도 다시 야생으로 돌아가기 전에 회복할 공간이 필요하다. 동물원은 동물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공간인 것이다. 물론 형태는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져야 하겠지만.
저자는 수의사로서 아쿠아리움과 청주동물원에서 근무하며 보고 느낀 점을 풀어낸다. 1장에서는 열악한 환경의 아쿠아리움에서 초보 수의사로 근무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당시 아쿠아리움에서 동물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저자 본인은 얼마나 부족했는지, 정말 이걸 다 밝혀도 되나 싶을 만큼 가감 없이 고백한다.
스트레스로 인한 자해로 꼬리를 잃은 알락꼬리여우원숭이가 잘 회복하도록 보살피기는커녕 “쓸모없어진 물건으로 취급”하고 방치한 아쿠아리움의 행태에는 정말 화가 났다. 하지만 동물과 저자의 교감이 드러나는 대목에서는 귀여운 장면이 상상돼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기도 했다. 저자는 동물 학대가 자행되는 환경에서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물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2장은 청주동물원에서 만난 동물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동물원이 집인 동물뿐만 아니라 동물원 안팎의 야생 동물의 이야기까지 담겨 있다. 3부에서는 저자가 바라는 이상적인 동물원의 모습을 그린다. 저자와 뜻을 함께하는 동료 수의사와 사육사들의 노력으로 동물원은 점차 동물을 위한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아프고 늙은 동물 등 약한 존재를 포용하고, 더 나아가 장애인도 동물원의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게 하고자 고민한다.
과거와는 달라진, 그리고 더 나아지고자 노력하는 모습에 동물원을 바라보는 내 시각도 조금 바뀌었다. 이상을 꿈꾸는 동물원 수의사의 이야기에 나도 함께 이상적인 동물원을 꿈꿔 본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지금의 청주동물원은 다치고 병든, 장애를 갖게 된 동물을 적어도 쓸모없어진 물건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인식과 제도가 급변하고 있는 만큼, 곧 다른 동물 시설들도 이런 흐름에 동참해 주면 좋겠다. 아픈 존재에 대한 포용까지 배울 수 있는 공간, 이것이 오늘날 동물원의 또 다른 존재 가치라고 나는 믿는다. 태일이도 그런 시설의 넓은 공간에서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내키지 않을 때는 사람들을 피해 내실에서 실컷 자면서 잘 지내다 가면 좋겠다. 다시 만나면 해주고 싶은 것이 많다. - P35
안전을 위해서라지만 멀쩡한 신체 일부를 훼손하지 않고는 전시하기 어려운 동물이라면 굳이 실내 사육을 고집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엄니를 갈거나 잘라내거나 발치한 바다코끼리가 그대로 건강하게 실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나는 회의적이다. 야생의 바다코끼리에게 엄니는 먹이를 찾고 천적 등으로부터 자신과 무리를 보호하는 수단이자 도구다. 특히 해변에 가라앉아 있는 먹이 생물을 캘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 P58
사람 의약품도 그렇지만 동물 의약품도 외국에서는 어렵지 않게 사용하는 제품을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상황을 자주 경험한다. 생리학적으로 완전히 다른 종의 특성에 맞춰 나온 약품이라도 국내에서는 쉬이 적용할 수 없는 실정이다. 외국의 야생에서 사는 동물을 데려다 전시하고는 있는데, 그 동물을 치료하기 위한 의약품은 사용할 수 없어 진료에 한계가 생기기도 한다. 적어도 특수 동물 진료에 필요한 약들은 제한적으로나마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 P72
수달사에 남은 먹이가 충분치 않은 날이면 왜가리는 물새장의 두루미 근처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때는 신기하게도 새장 안의 두루미들이 제가 먹고 남은 미꾸라지를 철망 밖의 왜가리 쪽으로 던져준다. 처음에는 철망 밖으로 떨어진 미꾸라지를 보고서도 그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왜가리가 긴 부리를 이용해 철망 사이로 미꾸라지를 꺼내 먹거나 두루미가 먹으려고 미꾸라지를 집어 흔들다 철망 밖으로 날아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반복되는 광경을 보면서 확신하게 되었다. 철망 안팎으로 내가 모르는 그들만의 연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 P139
동물을 건강하게 관리하고 치료하겠다고 수의사가 되어 동물원의 동물병원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동물병원 건물 때문에 다치고 죽는 새를 마주할 때마다 허탈감이 든다. 그럴 때면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과 책임감을 조금이나마 면피하고자 유리창에 충돌 방지 스티커나 붙여볼 뿐이다. 그 스티커마저 실제 효과보다 내 마음의 위안을 위한 게 아닐까 의심하면서. 인간이 이렇게나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 P153
따지고 보면 서식지 파괴, 외래종 밀반입 및 유기 등 문제의 원인은 전부 인간에게 있는데 또다시 인간에 의해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유해 조수 혹은 생태교란종으로 분류되어 인간의 손에 관리(라는 이름으로 제거)된다. 생태를 가장 교란하고 있는 종은 인간이건만 죄 없는 동물만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다하고 있다. 심지어 포획되는 방식까지도 잔인하기 그지없다. 포상금을 노린 인간들의 총에 맞거나, 틀이나 덫에 갇히거나, 산 채로 묻힌다. 다친 동물을 살리는 일을 업으로 하다 보니 좀 인도적인 처분을 고민할 수는 없는지를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 P170
이곳에서는 누구도 무슨 동물이 더 비싼지, 새로 수급하려면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안락사와 매매 중 어느 쪽이 더 경제적인지 같은, 듣기조차 싫었던 말들을 아무도 하지 않는다. 그 어떤 동물이건 청주동물원에 들어오는 순간 가격표가 사라진다. 그 누구도 동물에 값을 매기지 않는다. - P177
청주동물원에서는 장애나 질병이 있는 동물을 특별 관리 대상으로 삼아 더욱 지극히 보살핀다. 몸이 불편해진 개체이니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더 편안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신경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동물원에 장애인 관람객을 위한 편의 시설이 얼마나 설치되어 있던가? 장애 동물사 앞에 선 장애인 관람객을 마주한 순간, 부끄러움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숨기며 현장을 빠른 걸음으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인간과 동물 중 무엇이 우선하냐는 의문이 아니었다. 아프고 병든, 혹은 장애가 있는 약한 존재를 더 배려하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품는 그 마음이 동물을 보살피고 돌볼 때는 본능과도 같이 작용하면서 왜 인간을 향해서는 작용하지 못했던 것일까? - P186
추모관 안내판에도 적혀 있듯 동물원은 어쨌든 야생에서 살도록 진화한 동물을 좁은 우리에 가두어 기르는 곳이고, 그 우리에서 길러진 동물은 대부분 야생을 살아낼 수 없다. 동물을 위한 일이라 해도, 동물이 인간의 뜻을 이해할 리 없다. 그래서 우리는 동물에게 항상 빚진 마음을 가진다. 그 빚을 완전히 갚기란 요원한 일이다. 어쩌면 세상 어딘가에 동물원이라는 공간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한 영영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수십 개의 명패 앞에서 이제는 전시만을 위해 동물을 사 오지 않기로 했다고,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동물이 불편을 감내하도록 두지 않기로 했다고, 무분별한 번식으로 개체를 늘리지 않기로 했다고, 나아지는 동물원의 모습을 하나씩 말해볼 뿐이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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