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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평점 :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바움가트너가 알루미늄 냄비를 태운다. 그리고 탄 냄비를 만졌다가
손바닥을 덴다. 『바움가트너』는 그렇게 시작한다.
누구나 살면서 여러 번 보거나 들어 봤을 법한 아주 흔한 이야기로. 하지만 바움가트너의
기억이 이야기를 흔치 않게 해 준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오로지
자신만이 품고 있는 냄비에 얽힌 기억이. 냄비가 타 버려 못 쓰게 되면서 그 속에 담겼던 기억이 튀어나온다. 10년 전에 죽은 아내 애나의 이야기다.
바움가트너는 사고로 급작스럽게 아내를 잃고 혼자가 된다. 그때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애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며 자신은 애나를 말리지 못할 것이라고 애도 상담사에게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죽어요. 젊어서
죽고, 늙어서 죽고, 쉰여덟에 죽죠. 다만 나는 애나가 그리워요, 그게 전부예요. 애나는 내가 세상에서 사랑한 단 한 사람이었고, 이제 나는 애나
없이 계속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해요.”(p.41)
바움가트너는 심리적 환지통을 느끼며 살아간다. 애나의 상실 전후의
이야기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자연스럽게 옮겨 가며 전개된다. 어떤 때에는 바움가트너 의식의 흐름대로, 또 어떨 때는 그가 꺼내 본 애나의 글을 통해서. 애나의 유년 시절과
자신의 유년 시절, 바움가트너 자신도 몰랐던 가족의 이야기, 애나가
죽고 8년 뒤 만난 여성, 애나의 작품을 연구하겠다는 학생의
등장까지.
그의 삶은 한 편의 잘 짜인 영화가 아니라 우연의 연속으로 빚어졌다. 마치
원래 삶이란 그런 것이라는 듯이. 불행도 행복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고개를 내미는 게 원래 인생이라는
듯이. 『바움가트너』는 인간의 삶을 각색하지 않는다. 봐, 너도 그렇잖아, 라고
바움가트너가 말을 거는 듯하다.
바움가트너가 냄비를 태우고 손을 덴 뒤 자잘한 사건 사고가 쌓이고 쌓인다.
마치 그의 삶처럼. 즉, 냄비의 소실은 그의
삶을 은유한다. 냄비는 미처 치우지 못한 애나의 흔적이었다. 흔하고
사소하고 일상적인 냄비라는 물건은 소실됨으로써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촉매로 작용하게 된다. 냄비에 얽힌
기억을 공유하던 존재가 떠나고 그 냄비마저 까맣게 타 버린다. 일부러 치우지 않은 애나의 글만이 유일한
그녀의 흔적으로 남는다. 모든 것은 우연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들은 우연에 기댄 채, 우연이 겹겹이 쌓인
채 전개된다. 겹겹의 우연은 바움가트너라는 사람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를 짓누른다. 냄비로 시작된 기억의 촉발은 운전으로 이어진다. 거기에도 애나와의
기억이 얽혀 있고, 그가 ‘운전대의 신비’라는 책을 쓰고 있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이제 어떤 우연이 그를
맞이할지는 알 수 없다.
선생님도 그런가요, 네? 검침원이 말한다. 나도라니, 뭐가요? 바움가트너가 말한다. 좋아하지도 않는 이름을 계속 갖고 있어야 하는 거요. - P15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발을 바닥에 딱 붙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위태로운 내적 공간에 살고 있었고, 그로 인해 두 손에 감당할 수 없이 넘쳐 나는 시간을 들고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 P61
바움가트너는 지금도 느끼고 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고, 지금도 살고 싶어 하지만 그의 가장 깊은 부분은 죽었다. 그는 지난 10년간 그것을 알고 있었으며, 지난 10년간 그것을 알지 않으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 P66
어떤 사건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실제로 진실이어야 할까, 아니면 설사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어떤 사건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을 진실로 만드는 것일까?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느냐 아니냐를 알아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확실성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면 어떻게 될까? - P184
할아버지가 1백여 년 전에 떠난 도시를 찾아가려고 이 먼 길을 와서 거기 도착하기도 전에 죽고 말다니 이 얼마나 큰 아이러니이며, 나는 속으로 말했다, 또 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어울리는 일인가. - P187
웃음이 아니라, 적어도 웃음 자체가 아니라, 우리 둘 다 그 오래전 스치듯 지나간 짧은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는 이상한 사실, 그리고 그 순간의 기억을 우리가 공유했다는 이유로, 사실 아직도 서로 아는 것은 전혀 없는데도 우리 둘 다 우리 사이에 어떤 연결이 생긴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두 배로 이상한 사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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