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원작 <나생문> 초대 이벤트
라쇼몽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1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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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생문 - 한가지 사건, 그리고 남겨진 네가지 진실…
장르 : 연극
기간 : 2009년 9월 25일 ~ 2009년 11월 1일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4관(원더스페이스 동그라미극장)   
시간  : 평일 8시 / 토 3시, 7시 / 일 4시 (월 쉼)
원작 : 아쿠다카와 류노스케
연출 : 구태환
출연 : 박윤희, 이용성, 최필립, 박정길, 박초롱, 장원영, 김성철, 유우재, 이미화, 서강우, 인선호, 남궁민희
기획: 극단 수, 코르코르디움   







열린 문으로
2003년, 극단 수의 창단 공연으로 선을 보인 연극 ‘나생문(羅生門)’은 일본의 세계적인 명감독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동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 Rashomon, 1950)’을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일본 최고의 신인문학상인 아쿠다카와상이 기리는 일본 근대 문학의 정수 아쿠다카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나생문’과 ‘덤불속’을 각색한 영화 ‘라쇼몽’은 1951년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걸작이다. 

 

원작의 아우라에 영화의 무게가 더한 '라쇼몽'은 극단이라면 무대화를 욕심낼만큼 찬란하지만 자칫 빛에 올려 눈이 멀지도 모르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더욱이 인간의 내면을 예리하게 파고들은 주제에 독특한 구성을 더했다면 웬만해서 덤벼들 용기를 내기 힘들다.     

아무려나, 올해로 다섯 번째 공연이니, 성공적으로 안착한 연극 전환이 반가운 일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초연이든 재공연이든, 영화가 항상 우위를 점할 게 분명한만큼 항상 비교가 따를 것이고, 그때마다 무게에 짓눌릴 우려 역시 항상 존재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속성을 다룬 다양한 변주 가능성도 발견 할 수 있지만, 아직은 기대치도 가능성도 높지 않아 보인다.


오사카 인근 궁궐의 남문(南門)인 나생문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에고(ego)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을 상징한다. 나생문은 요즘 논란인 공항의 투시 X레이 검열대처럼 인간의 본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거울인 셈이다.

 

속살은 드러내도 속내는 드러내지 않는 인간 본연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로도 2010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의미로 ‘라쇼몽’의 헐리우드 리메이크 판이 나온다는 소식이 들린다. 스테디셀러인 소설은 물론, 영화도 클래식 마스터피스를 넘어서 새로운 방식으로 부활하고 있는 중이다.


 

바람이 부네
극단 수가 영화판에서 부는(혹은 불지도 모르는) 이슈에 기대 연극을 올리는 건 아니다. 1~2년 터울로 다섯 번째인 '나생문'은 극단 수의 대표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극단 대표이자 연출인 구태환의 의지라고 할 것이다. 내가 본 바로는 구태환이 원작을 두고 섣부른 실험을 시도하는 연출은 아니다.

 

피터 쉐퍼의 묵직한 작품 ‘고곤의 선물’ 연출을 통해 구태환의 힘을 확인한 바 있다. 정동환이 고곤으로 확실히 자리매김을 한 데에는 구태환의 연출이 분명 한 몫을 단단히 했다. 그의 연출 경험과 감성이 총동원되었을 ‘고곤의 선물’을 ‘나생문’보다 먼저 본 참이다. 그는 원작에 비교적 충실했다. 이름만으로도 관심을 끄는 작품이고, 작품성에 더해 흥행성을 갖춘 작품이니, 정기적인 무대화 작업이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한편으로 구태환이 뭔가 뛰어넘고 싶은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나무 숲을 흔들며
키 높은 대나무를 빽빽하게 세워 숲을 이룬 배경은 ‘고곤의 선물’에서 중극장 규모의 무대 배경을 세로로 극장 끝까지 길게 세운 거대한 접이식 창문들을 떠올리게 했다. 세로로 극장을 꽉 채운 무대는 가로 배경에 익숙한 눈에 한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관객의 눈높이와 배우들의 키를 넘는 배경은 인간을 미니어처 화한다. 넘어설 수 없는 운명 혹은 본성을 타고난 인간의 몸부림이 벌어지기에는 적합한 무대이다. 

 

영화에서 중심 포커스를 지배했던 나생문은 무대 구석으로 보잘것 없이 비켜나 있다. 게다가 숲에 가려 명패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숲이, 심연을 알 수 없는 그 깊이가 중심응 잡는다. 숲 안쪽에는 타악을 담당하는 고수가 버티고 있다. 하지만 대나무 사이로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고수는 숲과 물아일체가 된 상황이다. 북소리가 울리고 연극이 시작된다. 북소리는 숲의 소리다.

 

‘나생문’에서 진실은 오직 숲 만이 알고 있다. 이를 두고 인간들이 제멋대로 해석해낸다는 걸 연극은 무대와 소리로 드러낸다.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 시점 이동이 자유로운 영화보다는 숲이 그렇듯 터를 중심으로 모이는 연극에서만 가능한 강조점이다. 특히, 죽은 무사를 불러내기 위해 무녀와 혼령이 하나로 접신하는 굿판은 북소리가 정점에 달하하면서 화려하고 박진감이 넘치는 장면을 선보인다.

 

대사 없이 북소리와 하나 되어 무용과 가면극이 어우러진 퍼포먼스는 공인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무용수 출신 배우들은 조명의 변환, 암전에서도 숲을 넘나들며 좁은 무대를 최대치로 활용한 동선에 따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따로 떼어내도 손색이 없다. ‘고곤의 선물’에서 주인공 담슨의 내면을, 그리고 보는 관객의 가슴을 후비고 들어오는 인상적인 코러스 장면이 겹치는 대목이다. (나생문과 고곤이 서로 꼬리를 무는 구태환의 연출 교차점을 발견하는 재미를 더한다.)


숲만 아는 비밀을 품고
하지만 극 일관성을 허물고 과하게 강조한 빙의 장면은 영화와 확실히 차별을 두는 대목이다. 연극은 전반적으로 무사와 산적의 대결 구도 등 합이 잘 맞는 결투 장면을 선보이지만, 연극인데다 소극장이라는 한계에 확연히 드러나 답답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빼어난 솜씨로 사투를 벌이는 대목은  이후 나무꾼의 엇갈린 진술을 위한 복선의 의미가 크다. 

 

무당의 빙의는 무대극이 갖는 장점인 넌버벌 퍼포먼스 활용, 이승과 저승의 이원적이면서도 하나로 갈무리되는 동양적 세계관 강조 외에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산적, 무사 부인, 나무꾼, 무사 영혼의 진술을 등가로 놓지만, 연극은 무사의 진술에 비중을 높히기 위한 전제로 보인다. 
 

무사는 무녀의 입을 통해서만 진술을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죽은 인물이다. 앞선 산적과 부인의 증언에서, 무사는 보석이 박힌 검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탐욕스런 인물, 혹은 강간을 당한 아내를 보살피기는커녕 자결을 종용하는 경멸어린 시선을 던지는 냉혈한으로 그려진다. 죽은 것도 억울한데, 죽었다고 마구 난도질 당한다.

 

무당의 입을 통한 무사의 진술은 산적이 아닌 부인을 향해 칼끝을 겨눈다. 아내는 산적에게 강간당한 뒤에 오히려 산적에게 반해서 무사를 죽이라고 종용을 했고, 아내의 이런 태도에 질려버린 산적이 심지어 자신을 동정해서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무사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자결을 선택해 떳떳한 죽음읆 맞이했다고 항변한다.



기가 막힌, 혹은 귀를 막은 세상이여
세 사람 중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죽은 무사의 항변이 가장 애처로워 보이나, 나무꾼이 털어놓는 뒤이은 고백에서 무사의 가식과 허울이 벗겨진다. 나무꾼의 진술은 산적 한 명 이길 실력은 없고 체면만 내세우다가 어이없는 자기 실수로 죽는 무사의 허울과 그 허울에 기대어 종의 신분을 벗으려고 계급 상승을 택한 부인은 인간 본성이 가장 치사하게 구현되는 권력에 대한 완벽한 조롱으로 이어진다. 보잘것없는 남편의 실체를 확인하고도, 무사 부인이라는 가면을 벗지 않기 위해 남편을 180도 다른 인물로 묘사한 부인과 죽어서까지도 체면치레를 위해서라면 부인 따위, 한낱 종 출신의 과시용 인형 따위는 안중에 없는 무사의 실체가 드러난다. 

 

무사의 칼을 훔친 나무꾼이나 무사의 아내를 강간한 산적 역시 숨기려고 들거나 꾸미려 드는 인간 본성이 탄로나지만, 그들은 시체의 머리카락이라도 뽑아서 가발을 만들어 팔아야 하는 가발장수와 마찬가지로 최하층민이다. 에도 시대의 ‘88만원 세대’ 굴레를 기준으로 본다면, 지배층인 무사 부부의 허위와 가식을 이들과 등가로 놓는 게 과연 옳은지를 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두 배 차이를 보이는 오십보 백보는 사회 기준으로 보면 같을 수가 없다. 

 

 

구태환은, 재판관처럼 내내 진술을 들은 관객들에게 그 의문을 던진다. 아, 무리한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상관이 없는 건 이는 과거의 일이라는 것이다. 극중 이 사건의 객관적 관찰자인 가발장수와 스님, 중요한 건 이들의 선택이다. 

 

우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대신 옷을 벗겨가는 가발장수와 불법(佛法)보다 불법(不法)이 득세한 세상에 진저리를 치고 파계를 선택한 스님은, 진실을 마주섰을 때 일반적인 두 가지 선택지를 보여준다. 인정하거나 회피하거나, 둘 중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선택이자 극 중 대립각을 세우지만 결과적으로 이 둘이 보는 세상은 암울하다는 것, 동일한 세상이다. 그래서 두 가지 선택은 서로 꼬리를 물고 돌 수밖에 없는 하나의 굴레가 되고 만다. 파계승은 민머리를 감출 가발이 필요하고, 가발장수는 가발을 팔 수 있는 파계승이 필요하다. 


 

숲의 노래를 들으라
가발장수 역, 장원영은 탁월한 선택이다. 나무꾼과 스님의 이야기를 거드는 추임새 역할 정도일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느물느물하고 탐욕스러운 닳고 닳은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나무꾼의 허울을 벗겨내는 걸 보면 날카롭고 한편으로 삶의 이면을 들여보는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한다. '나생문'을 축약해서 보면 바로 가발장수다. 


 

이요성(이상 산적 분), 장원영 등 배우진을 비롯해 극단 수에 익숙한 작품이고 보면 극의 전개나 흐름이 영화에 충실한 점은 못내 아쉽다. 영화가 워낙 탁월하고 뛰어난 이야기 전개 방식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다섯 번째 무대라면 뭔가 다른 시도를 두고 자신과의 경쟁이 불붙을 만하지 않았을까 싶은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쩌면 보지 못한 네 번의 ‘나생문’에서 그 도가 있었고, 녹여낸 무대가 이번 작품인도 모르겠다. 

내내 강한 바람소리로 관객들에게 자신의 존재 환기시킨 숲은, 새벽을 깨우듯 아기의 울음소리를 빌어 부질없어 보이는 세상에 희망을 울린다. 분명 비루한 인생으로부터 시작된 저주받은 아기이고, 그 운명이 또 다시 숲 살인사건의 반복, 산적, 가발장수, 나무꾼일망정 처음부터 다시 시작을 하라는 지침이다.

 



 사진 출처 - 극단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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