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마음>을 리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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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보 마음 - 시인 문태준 첫 산문집
문태준 지음 / 마음의숲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도시살이에 몸이 익숙해졌지 싶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더운 날씨 탓도 있을 게다. 조금만 허둥대도, 마음이 조급해도 쉬이 지쳐 떨어진다. 만사가 귀찮은 늘어진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내 주위에는 뭐 하나 느린 게 없다는 걸 알아챘다.
끓은 물만 부으면 되는 사발면이 박스 채 보이고, 몸집이 날렵한 노트북은 엉뚱하게 책 사에 깔려 있다. 무게가 가볍다고 해서 샀다가, 느린 처리 속도에 열불이 나서 대충 치워버린 애물단지다. 하지만 이도 어디에 있든지 쉬지 않고 빨리 빨리 뭔가를 하겠다고 부러 가벼운 걸 고른 것이다.
폭염 속에서 옥수수대가 근엄한 장수처럼 굵어지고 있습니다. 폭염 속에서 풀들이 허공의 계단을 한 뼘씩 올라서고 있습니다. 나 스스로에게 의지해서 마음이 퇴전하지 아니하고, 어지러워지지 아니하고, 깨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여름 햇살이 우리에게 소원하는 삶의 내용입니다. 그것이 풍성한 가을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이 여름을 멋지게 지내는 최고의 피서법입니다. <느림보 마음> ‘여름의 근면’(31쪽) 중에서
나는 문태준 시인의 당부와는 정 반대로 여름을 나는 중이다. 그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더참을성이 없이 빠르고 간편한 편의점식 도시생활에 길이 들 때로 든 탓이다. 참을성이 없다보니 가을 결실을 준비하는 자연의 이치를 견디지 못하고 에어컨 바람을 쫓아 건물 안에 틀어박혀 산다. 덜컥 이렇게만 살면 어쩌나 싶기도 하다. 그나마 책에 재미를 붙이면서 달뜬 마음을 가라앉힌다지만 것도 한참 멀었다. 쉽게 쉽게 읽히지 않으면 금세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문태준 시인의 첫 산문집 <느림보 마음>은 빨리 읽을 수가 없었다. 짧은 글 한바닥 읽을 시간이 딱 사발면 한 끓일 정도면 족하지 싶었는데, 어림없다. 두어 페이지 남짓한 곳곳에 시인이 길러 올린 빛나는 문장이 눈길을 불러다가는 붙잡고 놓질 않는다.
‘박무(엷은 안개)는 빗으로 공중을 한 번 빗겨주는 정도입니다.’, ‘나는 매병의 구멍에다 입김을 불어넣기도 했습니다. 한 줌의 안개 같은 소리가 매병 속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의 추위로 연못은 살얼음이 얼었습니다. 살짝 얼어서 천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 같습니다.’ 누가 시인 아니랄까봐, 시어로 적당한 구절들이 눈에 들어와 박혀서 한참을 깜박거리면서 머물렀다.
그렇대도 산문집에서 맑고 소박하게 풀어놓은 시인의 삶은 잔치국수처럼 평범하고 무난하다. 그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아내와 아이들이 산다. 시골에는 명절 때 찾아뵙는 부모님이 계신다.
시인이라고 왜 남들처럼 수상하게 돌아가는 세상 꼴에 타박하고 싶지 않고, 거들고 싶지 않겠냐만 그는 밖에서 온 것들의 나팔수로 떠들고 풀어버리지는 않는다. 다만 내면의 우물에 비치는 자신을 들여다본다. 깊은 우물물에 비치는 풍경은 눈이 익을 때까지 한참을 바라봐야 하지만, 한 번 보이면 거울처럼 좀처럼 흔들리는 법이 없다. 그 안에는 따뜻한 화로 같은 고향, 풀을 뜯는 소의 느긋한 담담함이 있다.
‘사실 가장 감동적인 말씀은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말씀’으로 ‘순하고 무던한 말씀들 앞에서는 머리를 깊숙이 조아리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소박한 말씀은 “남에게 폐 끼치지 마라”는 당부, “집안은 모두 편안하지?”라는 안부 인사, ‘이제 오느냐?’처럼 ‘입안에 넣고 굴리면, 첫맛은 쓰고 나중에는 단맛이 입안에’ 도는 말들이라는 데, 내 입에서도 굴려보니 참말이다.
나도 쓰지 않는 말은 아니지만 입치레로만 여기고 쉬이 흘러버리고 말아 쓴맛도 채 보기 전에 뱉어버렸구나 싶다. 느리게 산다는 것, 그것은 귀와 눈과 혀와 코로 이 우주를 만나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이 오래 내 안에 남길 바란다. 평범하다는 게 감당도 못할 욕망에 치어 신기루를 눈으로 쫓는 삶과는 좀 다른 것이라고, 꾸짖지 않고 좋은 말을 고르고 골라 머리를 쓰다듬듯이 조근조근 나누는 말에, 애초 다른 건 뭐든 반발부터 하고 나섰을 마음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말복이 지났다. 이 여름을 윙윙 기계 도는 찬바람 밑에서 코를 훌쩍일 게 아니라 왕성하게 몸피를 늘리는 나무 그늘이라도 찾아가 생명을 불어넣는 순하고 느릿느릿한 바람에 몸을 맡겨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