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를 리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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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노서아 가비>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새벽 2시가 좀 안 된 시각이었다. 난 커피를 두고 까탈스럽게 구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찬장에 있는 일회용 믹스 커피나 편의점 캔 커피로 채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주인공 따냐가 가장 아끼는 사이폰 커피포트로 내린 커피를 아주 뜨겁게 한 잔 마시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잠들지 않는 열대야의 뜨거운 숨이 뻬쩨르부르그의 백야처럼 잦아들 것 같았다. 커피 얼룩이 남은 메마른 잔에서 올라오는 커피향을 타고 에스프레소 커피처럼 검은 잠이 찾아오길 바랐다.
커피포트의 알코올램프에 성냥불을 댕긴 듯 열기가 치받쳐 올라오는 밤, 3시간가량 꼬박 <노서아 가비>에 홀렸으니 목이 메마른 게 당연하다. 하지만 정말이지, 이 갈증을 차가움으로 해결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에 서른 잔의 커피를 마시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커피중독자 발자크의 심정은 몰라도 암울한 조선의 현실을 고통스런 불면의 밤으로 지새우기 위해 일부러 노서아 가비차(러시안 커피)를 사약 마시듯이 가까이했다는 고종의 타는 갈증이 알 듯도 모를 듯도 했다.
제길, 냉장고에서 물병째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책에서 커피향이나 정말 나나 싶어 코를 킁킁대는 우스꽝스러운 짓거리를 방금 내가 하디니! 제길! 불면증 때문에 머리가 몽롱해진 탓이다. 김탁환을 시류를 타고 역사 인물을 끄집어내는 몇몇 통속 팩션(faction) 작가들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신윤복이 여자라는 식으로 교과서 속 인물들의 이름을 따와서는 그 이름에 기대어 책임지지 못할 짓을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김탁환의 소설은 이전까지 읽어보지 않은 채였다.
<노서아 가비>는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이자 희대의 사기꾼인 따냐를 가공으로 빚어서 고종, 민영환, 이완용, 베베르 등 실제 역사 속 인물들과 절묘하게 뒤섞은, 비유하자면 김탁환이라는 이름을 내걸은 블랜딩 커피이다. 길지 않은 소설인 탓에 역사적 사건들은 무리 없이 묘사되었고, 시기가 다른 부분은 작가의 말에서 밝혔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청나라와 러시아를 돌아 다시 조선 황실을 거쳐 미국 뉴욕에 이르는 굴곡진 여정을 후일담으로 따냐가 썼다는 식이어서, 애초에 피했다. 후일담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되는데다 손꼽이는 사기꾼이 한 얘기이니 부담 없이 재밌게 즐기기만 하면 된다.
시대 배경이 조선 후기이고, 커피를 소재로 했다는 특이점을 걷어내면, 미워할 수 없는 사기꾼들의 속고속이는 모험담은 익히 영화로 익숙한 패턴이다. 세밀한 묘사나 자세한 설명 대신 대화와 사건으로 빠르게 푼 소설은 영화와도 잘 맞는다. 출간하고 바로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노서아 가비>의 장점은 맛깔스러운 문장에서 나온다. 읽으면 읽을수록, 혀에 올리고 굴리면 굴릴수록 오미(五味)가 돌았다.
똘스또이의 소설에서 따온 이반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 그는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서 단연 살아 꿈틀거리는 최고의 옴므파탈이다. 관노비의 아들, 정도령, 갈범 사기단 두목, 러시아 통역관, 한성부 판윤 김종식, 떠돌이 중… 그러나 그에게 매혹된 이유가 다채로운 이력 때문은 아니었다. 고종을 암상하려다가 잡혀서도 당당한 그의 혀, 일류 사기꾼 따냐의 마음마저 흔들어 놓은 세치 혀에 덩달아 뻔히 거짓말을 하는 줄 알면서도 스르륵 끌리게 된다.
의사소통에서 대화가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7% 정도이고, 억양, 표정, 몸짓, 자세가 나머지라던데, 짧게 주고받는 대화에 이반은 홀연히 살아난다. 이 역할을 영화에서 어떻게 보여줄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내 인생에서 단 하나뿐인 남자, 이런 식으로 거창하게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확실히 그는 내 삶을 흔들고 찢고 흩어놓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할 까닭도 없다. (232쪽)
고종을 염려하는 마음이나, 이반을 두고 갈팡질팡 하는 애증을 보면 ‘따나’의 마음 한구석 온기가 있음이 분명하나, “아이는 아이고 사기는 사기죠”라고 말할 때는 정이 뚝 떨어진다. 이반에게 매료된 바, 좀 더 신파여도 좋겠다는 들뜬 바람 탓일 것이다. 어쩌면 땨나가 스스로 쓴 글이니, 고종이나 이반을 향한 마음을 내비칠 때는 과장과 상상을 덧붙였는지도, 또 이 대사가 유일한 진실인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