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 몸에서, 이 생에서>를 리뷰해주세요.
-
-
바로 이 몸에서, 이 생에서 - 티베트에서 보낸 평범한 삶, 그 낯설고도 특별한 일 년
쑨수윈 지음, 이순주 옮김 / 에이지21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작년 3월, 시짱 티베트 자치구 수도 라싸에서 자주 독립을 요구하는 티베트인들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중국의 유혈 진압으로 200여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한 비극(3·14 사태)이었다. 올해 신장 위구르 자치구 위구르족에서도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역시 유혈 참사가 벌어지면서 티베트 사태와 비슷한 양상이 반복되었다.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갈등은 중국이 안고 있는 가장 불안한 화약고로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티베트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작년 4월 즈음, EBS에서 영국 BBC가 제작한 5부작 다큐 '영혼의 땅, 티베트'(A Year In Tibet)를 방영했다. 티베트 사태가 벌어지기 1년 전, 2006년 7월부터 1년 동안 티베트에 머물면서 간체 현 팔코르 사원과 탕마이 시골마을을 중심으로 무당, 마을 의사, 청년 당원, 승려, 농부, 호텔 사장, 인력거꾼, 건축업자, 임산부 등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티베트 유혈 사태 이후 세계는 중국의 인권 유린을 문제 삼았고, 중국은 미국과 러시아와 인도의 사주라면서 언론 통제로 맞섰다. 티베트 내 공안 비율은 인구 20명 당 1명으로, 인구 1000명 당 1명인 중국 본토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위구르 사태로 더욱 높아진 정치적인 긴장 고조와 티베트인들 내면의 불안을 고려하면 짐짓 평화로워 보이는 일상을 담은 ‘영혼의 땅, 티베트’는 어쩌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촬영하기 힘든 의미 있는 자료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이 몸에서, 이 생에서>는 ‘영혼의 땅, 티베트’의 다큐멘터리 감독 쑨수원이 영상으로 담지 못한 뒷이야기를 써내려간 르포이다. 영국인 남편과 영국에서 살고 있지만 중국인인 그녀의 눈에 비치는 티베트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책을 읽고 나서 본 다큐멘터리는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1년의 긴 촬영 여정치고는 짧은 5부작인 점도 아쉽지만 전반적으로 어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지 헤매는 듯 했다. 각 부마다 각기 다른 인물과 소재를 삼았으나 40분 남짓한 영상에 담을 수 있는 한계란 뚜렷했다. 카메라는 무엇을 찍어야 할지, 아니 찍지 말아야 할지를 몰라 전전긍긍했다.
장례식이나 조장(鳥葬) 등 외부인의 발길이 부정을 탈 수도 있다는 민간신앙을 고려해 촬영을 접은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애써 정치적인 문제를 비켜가려다 보니 한계를 보인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티베트 인과 중국인 사이의 50년 넘게 응어리진 갈등은 다큐멘터리 곳곳에서 알게 모르게 드러나듯이 삶 전반을 움켜쥐고 있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또 방영을 앞두고 점차 고조되는 중국 내 긴장감을 고려해 더 신중하게 편집을 하느라 수많은 러시 필름을 창고에 묵혔을 것이다.
EBS는 ‘영혼의 땅, 티베트’를 방영하고 한 달 뒤인 2008년 5월에 ‘시사다큐멘터리 티베트를 가다 - 인권을 빼앗긴 사람들’(Undercover in Tibet)를 방영했다. 2008년 티베트 사태 이후의 상황과, 오래 전부터 중국의 인권 탄압과 박해를 박은 티베트인들을 긴박하게 취재한 내용이다. 이 역시 영국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인데, 개인적인 착각인지 모르지만 엇비슷한 제목을 통해 마치 ‘A Year In Tibet’이 진실에 눈 갚았다고 힐난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큐멘터리는 티베트인들의 삶을 농밀하게 풀어낸 책 속 등장인물을 화면에서 확인하는 정도였다면 심한 얘기일까. 아무려나 다큐는 그녀가 하고픈 얘기를 채 반도 담지 못했다. 그렇다고 책에서 그녀가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입장을 밝혔다는 의미는 아니다. 영국과 중국을 오가는 삶을 사는 그녀에게 정치적인 논란은 꽤나 고심했을 부분일 것이다. 허나 적어도 티베트에 있는 내내 그녀의 속에 새로운 변화가 인 것만은 분명하다.
대륙의 동쪽 베이징대를 졸업하고, 장학생으로 옥스퍼드 대학을 다닌 엘리트 중국인 쑨수원과 대륙의 서쪽 티베트 시골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아버지를 통해 무당직을 이어받은 체텐의 만남. 정치적인 거리만큼이나 살아온 문화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을 ‘중국’이라는 국가 개념으로 묶기가 힘들어 보인다.
이 둘의 만남과 우정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이승에서 만족스럽게 한껏 살아온 쑨수원은 양의마저도 자신의 병을 고치려고 무당을 찾는 영혼 치료, 다수의 형제가 한 명의 아내를 공유하는 일부다처제, 당사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모들이 결정하는 혼례 등 티베트의 시골 풍습은 현대인의 눈에는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다. 부엌이고 천정이고 마당이고 화장실이고 사방팔방 수많은 영혼으로 둘러싸인 채로 산다는 티베트 무당이라니!
“나는 그들의 믿음과 내 자신의 믿음 간의 격차를 좁혀보려 애쓴다. 저기 어딘가에 영혼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의식을 올리겠는가?”(76쪽) 어려서부터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공산주의 교육을 받은 신지식인 쑨수원은 체텐이 행하는 의식을 정중하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애쓴다.
반면, 가을 수확을 앞두고 율라 신을 달래는 ‘우박 방지사’인 체텐에게 구름에 포를 쏘아 우박을 예방하는 당의 고사포 도입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고사포로 우박을 예방한다? 체텐의 제사만큼이나 부질없어 보이지만 티베트 내 중국인의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지배와 변화와 갈등을 한눈에 보여주는 사례이다.
점점 좁아지는 체텐의 입지만큼이나 시골마을의 가난한 무당의 삶은 팍팍하다. 그렇다고 체텐이 불행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부질없는 이승보다 더 나은 삶, 환생에 대한 믿음이 충만하다.
“체텐은 내가 전생에 분명히 티베트인이었을 거라고 말한다. 그는 내가 고산병에 걸리지 않고, 티베트어를 상당히 잘 알아듣고, 중국인치고는 생고기를 잘 먹고, 불교와 친숙하다는 것 등을 증거로 들었다.”(113쪽)
쑨수원이 체텐의 신앙과 역할을 미개하다고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듯이 체텐도 쑨수원을 티베트를 억압하는 중국인 전체와 혼동하지 않는다. 체텐 추구하는 샹그릴라(유토피아)는 이승에 있지 않다. 전생과 후생에 대한 확실한 믿음은 이생에 대한 집착을 덜어주고 보다 높은 정신의 경지로 이끈다. 오체투지로 널리 알려진 티베트인들의 높은 신앙심은 티베트인들의 팍팍한 삶을 견디는 힘이자, 카메라를 들이대는 낯선 이방인, 더욱이 중국인 여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넉넉함이 된다.
사실, 티베트나 위구르 등 서남공정 뿐 아니라 고구려 역사 왜곡 논란을 빚은 동북공정 등 중국 내 소수민족 갈등에서 보듯 우리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티베트 사태나 위구르 사태를 조용히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다.
적어도 이 책에는 체텐을 비롯해 티베트인들을 만나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지배자의 입장에 선 쑨수원 개인의 정치적인 갈등과 고뇌, 그리고 영적인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는 복잡한 심정이 녹아 있다.
고도 3900m 고도, 영하 20도의 날씨, 산소 농도 50% 이하의 환경에서 오체투지로 사원을 찾는다면 원통의 마니차를 손으로 한 바퀴 돌릴 때마다 불경을 한 번씩 읽는 공적이 쌓인다는 믿음이 이해가지 못할 것도 아니다. 이 책은 척박한 만큼 역으로 삶이 충만해지는 신의 땅, 티베트 고원에서 나온 책이다. 1년 고행이라지만 그녀 역시 외부자이고 이질자이며 관찰자일 뿐이나 자신 내부의 변화에 주목한 책이다. 그래서 객관적인 시각과는 무관하다. 다시 말해 정치적인 상황을 외면했다는 지적을 비껴갈 수 있다. 그저 황량한 티베트 고원의 겨울을 배경으로 두었으나 쑨수원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변화를 짚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녀에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경험이자 기회, 성찰의 1년을 담은 좋은 책이다. 하지만 그래서라도 티베트 사태를 정치적인 ‘올바름’으로 봐야 하는 ‘인권을 빼앗긴 사람들’의 급박한 현실을 자칫 외면하게될 우려가 없지 않다. 그 2~3년 사이 그 신실한 사람들이 더 이상 달라이 라마의 평화적인 시위를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할 지경에 왔으니 말이다.
참고로 프리 티베트(www.freetibet.org)나 티베트 인권 독립 회의(www.tibet.or.kr)는 티베트 현실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