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조 가족>을 리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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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조 가족 ㅣ 카르페디엠 17
샤일라 오흐 지음, 신홍민 옮김 / 양철북 / 2009년 6월
평점 :
니체가 그랬다던가. 운명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두었다고. 그러니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행운들과 기꺼이 대면할 수 있는 배짱과 호기, 다만 그것뿐이다. 고미숙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중에서
2인조 가족이라니, 2인조 절도단, 2인조 복식팀, 2인조 혼성듀엣은 들어봤어도 2인조 가족은 왠지 좀 낯설다. 가족이라는 게 둘이건 스물이건 피로 묶인 끊을 수 없는 띠라는 인식이 워낙 강해서 그렇지 싶다. 그에 반해 2인조 조합은 이해타산에 따라 얼마든지 나뉠 수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긴다. 게다가 달랑 둘이라니 해체하면 말 그대로 끝! 뒷마무리가 너무 깔끔하다.
결합과 해체가 자유로운 ‘2인조’와 결속력이 단단한 ‘가족’의 이질적이면서도 특이한 조합 <2인조 가족>의 구성원은 서로 대략 60년 정도 나이 차를 자랑하는 할아버지와 손녀이다. 그 사이를 메워줄 세대들은 당최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이런 젠장! 그들이야말로 늙은 아버지와 어린 딸의 ‘2인조’를 ‘가족’으로 돌봐야할 중심축이 아닌가. 경제력을 상실했을 때 그 끈끈했던 ‘가족’이란 연대가 얼마나 빨리 알량해지는지 모르지 않다.
독거노인과 어린 손녀딸이라는 2인조 조합은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OECD 국가 중에서 비정규직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 비정규직 비율이 전체 50%가 넘는 나라이다보니 노동력을 갖춘 세대들마저도 비정규직 대란이니 어쩌니 하는 괴소문에 시달리다가 떠밀리는 판이다. 그러니 노동경쟁력이 거의 전무한 노인과 미성년자가 맨 뒤에 떨거지로 남는 현상이 당연할 수밖에. 참고로 우리나라 얘기다.
<2인조 가족>의 조합과 비주얼은 불우이웃돕기 방송에서 보던 모습과 엇비슷하다.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지하 임대주택에 바넥 할아버지는 폐지와 고물을 줍고 손녀딸 아냐는 신문을 돌린다. 주 수입원은 국가에서 나오는 얼마 안 되는 고아보조금, 연금, 장학금 등 사회복지연금이다(이마저도 사회복지가 우리보다 한결 나은 독일이니 가능한 얘기일지도).
그런데 둘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 보면 뭔가가 확실히 다르다. 2인조가 숨은 부자라거나 알고 보니 천재라는 뜻은 아니다. 사춘기 소녀 아냐가 가족의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부모에 대해 왜 궁금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바넥 할아버지는 아냐가 연꽃에서 솟아났다거나 교회 정문에 버려졌다거나 영국여왕의 혼외 자손이라는 식으로 엉뚱한 얘기만 늘어놓는다. 영감이 가난에 치여 절망에 빠졌다가 결국 미쳤구나, 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전혀 아니올시다, 이다. 단지 ‘그리스인 조르바’를 꼭 빼다 박은 엉뚱한 괴짜일 뿐이다.
그런데 하는 행동이나 말이 워낙 자유분방한 프리스타일이시다 보니 아냐의 속마음이 썩어 난다. 한창 이성에 눈을 뜬 16살 사춘기인데, 옷이라고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입던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운 낡은 셔츠에 “온갖 접착제 제품을 모아 놓은, 걸어 다니는 접착제 종합세트”인 신발을 신고 학교를 가려니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라는 위인이 고작 한다는 말이 “너니까 수제화를 신고 다니면서, 투덜거리는 거야”라니!
할아버지에게 가난은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돈이란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물건”이란다. 하지만 태어나서부터 할아버지와 둘이 살면서 한 번도 부자였던 적이 없는 아냐에게는 그야말로 해괴한 헛소리이다.
하지만 아냐도 모르지 않다. 할아버지의 말이 아주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쯤. 폐지 더미에서 주은 신문과 철학 책들을 두루 섭렵한 할아버지는 나름 뚜렷한 삶의 기준이 있다. 체계가 잡이지 않아서 탈이긴 하지만 할아버지는 자본으로부터, 소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일찍이 깨우치고 실천하는 인물이다. 넝마주이는 남들이 외면하는 일이지만, 할아버지에게는 직업이자 교육이자 놀이였다. 그러니 즐겁지 않을 도리가 없다.
“백수는 시간의 노예로 사는 게 아니라 시간을 ‘부리며’ 살아야 한다. 그러자면 자기 존재에 해로운 일일랑은(예컨대 쇼핑, 게임, 채팅, 하릴없는 수다, 기타 산만한 행동들) 줄이고 (…) ‘자유시간’은 신체적 능력을 확장하는 정밀한 훈련에 쓰여야 한다”는 고전문학박사이자 누구보다 현실비평가인 고미숙의 진단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다.
할아버지의 천상천하유아독존 경지(?)까지는 이르지는 못해서 옷차림부터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운 아냐지만, 명장 밑에 약졸 없다고, 내공이 장난 아니다. 수학실력으로는 반에서 따를 친구가 없는데다 체스실력도 수준급이다. 아기였을 때부터 철없는 할아버지와 살다보니 상대적으로 철이 제대로 들었다. 문학적인 감수성은 괴테를 읊을 정도이다.
호적상 서열로 보면 하늘과 땅 차이지만 이들 2인조는 말 그대로 친구이자 죽이 잘 맞는 짝꿍이다. 여기에 아냐에게 첫눈에 반한 전학생 이르카가 등장해서 아냐를 사이에 놓고 할아버지와 늘 티격태격 다툼으 벌인다.
이들이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삶을 풍요롭게 가꾼다고 해도 세상의 기준으로는 별종에 낙오자일 뿐이다. (이르카는 안짱다리에 오른다리를 저는 장애인이다.) 결국 할아버지는 양로원으로, 그리고 아냐는 국가위탁 기숙사로 끌려갈 판이다. 할아버지 없이 혼자가 된 아냐에게는 이제 의지할 사람이 없다. 이르카는 착하고 잘생겼지만 아직 어리고 순진하기만 한 소년이다. 한때 좋아했던 체스 선생 파벨은 아냐를 성추행한다.
할아버지는 양로원에서 풀이 죽기는커녕, 허생이 죽자고 7년 쌓은 공부로 한양을 활개치고 다녔듯이, 그동안 쌓은 내공으로 양로원을 주름잡으며 유쾌하게 잘만 지낸다. (소설에서는 양로원과 청소년 쉼터격인 기숙사를 열악하거나 강압적인 시설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양 섭취 등은 할아버지가 살이 3㎏이 찔 정도로 낫다는 식이다. 요양시설을 박차고 나와 ‘차라리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2인조의 심정은 알겠지만 우리나라 현실에서 볼 때는 이런 사회 안정망이 꽤나 절실하고 부럽기만 하다.)
자신이 없이도 양로원에서 너무 잘 지내는 할아버지를 본 아냐는 기가 막히다! 아냐도 기숙사로 들어간다. 이대로 끝일까. 물론 아니다. 할아버지의 거침없는 행동을 견디다 못한 양로원 원장의 사정사정으로 할아버지는 스스로 ‘강퇴’하고(정신병원은 아니지만 나올 권리가 시설에 없고 오로지 개인 선택이라니 이 역시 부러운 일이다), 마치 첩보영화를 보듯이 황당무계한 방법으로 아냐를 기숙사에서 빼낸다.
아냐는 기숙사에서 자신이 할아버지에게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알고 보니 2인조였을 뿐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었던 것이다! 꽤나 충격적인 일이지만 아냐는 마음을 고쳐먹는다. 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 할아버지의 양육권은 박탈당할 참이다. 이제 자기가 할아버지를 챙기리라.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기숙사에서 나온 아냐는 아무래도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1년 후면 성인이 된다. 이르카는 그때 결혼을 해서 아냐를 책임지겠다고 하지만 치기어린 얘기일 뿐이다. 아냐에게 대책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에게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둔 운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즐기고 만끽하는 삶을 배웠듯이 앞으로 그렇게 2인조 혹은 3인조로 살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