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약해서 간추린 내용, 경과하는 시간을 통한 모든 것, 자신이 이야기하는 걸 적절히 통제하고 있다는 호언 장담을 불신한다. 이해하고 있다...
 주장하면서 아주 고요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 평온한 가운데 떠오른 감정을갖고서 글을 쓴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바보거나 거짓말쟁이이다. 이해한다는 건 전율하는 것이다. 회상한다는 건 과거의 그 순간으로 다시 들어가 갈갈이찢기는 것이다.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 앞에서 겸허하게 한쪽 무릎을 품는 대가를 존경한다.
—— 해럴드 브로드키, 『속임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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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 천재 작곡가의 뮤직 로드, 잘츠부르크에서 빈까지 클래식 클라우드 7
김성현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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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했던 천재, 모차르트

음반가게에서 일할 때 모차르트 음반을 유독 많이 찾는 고객은 임산부들이었다.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적인 아이를 꿈꾸는 엄마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를 눈치 챈 음반사는 ‘모차르트 음악과 EQ와 IQ를 높이세요.’라는 음반 시리즈를 수십 장 내 놓았다. 모차르트 이펙트의 신화처럼 우리는 그에게 ‘음악신동’이라는 간판을 일찌감치 달아줬다. 하지만 화려할 것만 같은 그의 삶은 끝없는 노력과 성공, 좌절, 고통의 여정이었다.

4살 반부터 곡을 만들어 내는 모차르트의 음악적 재능을 아버지, 레오폴드는 단번에 알아본다. 그는 아이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유럽순회공연에서 찾았다. 4개월간 뮌헨과 빈의 연주를 시작으로 유럽 전역의 궁정에서 모차르트는 피아노 연주를 했다. 3년 5개월 20일, 88개 도시과 마을에서의 공연. 그 장거리를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고 하니, 6살 모차르트가 안쓰럽게만 느껴진다. 저자는 이 그랜드 투어를 아이의 재능을 조기에 발견한 부모의 전문가적 식견과 아이가 충분히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마련해 주는 추진력의 결과라 평가했다.

잘츠부르크에 돌아온 모차르트는 10살이 되었다. 더 이상 ‘신동 피아니스트’라는 타이틀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제 작곡가로 변모할 때가 되었다. 모차르트는 이탈리아로 떠나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베네치아, 나폴리, 로마의 음악 조류에 대해 공부를 한다. 이는 모차르트가 오페라로 작곡범위를 넓혀 기악과 성악을 넘나드는 작곡가로 서게 되는 토대가 되었다.

모차르트는 마지막 10년을 오스트리아 빈에서 보낸다. 빈에 도착한 1782년부터 4년간 150여 곡을 쓴다. 빈에서 모차르트는 당대 내로라하는 음악가들과 교우했다. 클레멘티와는 피아노 연주대결을 펼치고 하이든과는 현악 4중주를 함께 연주했을 정도로 가까웠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라이벌로 그려진 살리에르는 실제로는 모차르트와 <오펠리아의 회복을 위해>라는 작품을 공동 제작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무엇보다 작가 다 폰테를 만난 모차르트는 귀족사회의 위선과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 <피가로의 결혼>,<돈 조반니>, <코시 판 투테>를 완성하게 된다.

모차르트 시대의 음악가는 시종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모차르트는 궁정 귀족들 앞에게 피아노를 치고 곡을 발표했으나 그가 받는 차별은 구직활동을 하는데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자신만의 독창성으로 곡을 쓰는데 매진하였다.

봉건적 도시 잘츠부르크에서 자란 모차르트가 빈의 중심 작곡가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저자가 안내하는 모차르트의 음악 공간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모차르트의 생애를 만나볼 수 있다. 모차르트의 삶을 균형 잡힌 시선에서 생생하게 전하고자 저자는 사진, 음악학자, 신문기사, 편지글 등 다양한 자료들을 담아놓았다. 하스킬과 니콜라예바의 명음반도 소개를 하고 있어 책을 읽다가 잠시 모차르트의 음악에 빠져들게 한다. 그렇다. 1791년의 모차르트가 여기 우리 곁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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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남긴 책 한권

언론인 이용마 기자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50세. 팔순 노모와 열 살 된 쌍둥이 그리고 아내가 남겨졌다. 이용마 기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영화 <공범자들> 에서였다. 공영방송이 몰락하게 된 주범과 언론의 공정성을 찾고자 하는 내용 속 영화 중간, MBC파업노조에 참여했던 그가 카메라에 잡혔다. 해고된 그는 복막 중피중 판정을 받아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다. 과거 노조현장에서 풍채 좋은 얼굴로 마이크를 잡았던 그와는 다르게 요양 중에 있던 그는 수척했다. 하지만 눈빛은 빛났다. 1년을 전후해 사망하고 길어야 5년을 살 수 있다는 희귀병을 선고받은 그에게 마음에 걸린 것은 아빠 없이 자라갈 아이들이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아빠가 그들의 곁에서 들려줄 이야기를 그는 미리 쓰고 있었다.

저자는 공직자가 되고 싶어 정치학과에 들어갔다. 1987년, 그는 공부만 할 수 없었다. 대학생들에게 군대가기전 입소해 휴전선 부근 군부대에 입소해 훈련을 시키는 전방입소 거부 투쟁, 전두환, 이순자 체포결사대 활동, 남북통일 운동 등. 그는 학생운동에 끊임없이 참여하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다. 군사정권하에서 공무원이 된다면 권력의 하수인밖에 되지 않겠느냐 반문하며 그는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알기 위해 공부를 해나간다. 맑스와 사회주의, 해방 전후사.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 관한 모임을 결성하고 정치학과에서 조차 한국 현대사를 배우지 않는 데에 비판한다. 대학 졸업할 때, 그에게 생긴 꿈은 “우리 사회를 더욱 자유롭고 평등하게 만드는 것, 그러면서도 인간미가 넘치는 사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사회 초년생의 꿈은 너무 이상적였을까? MBC 수습기자로 경찰서에 드나들면서 그는 경찰위에 군림하는 출입기자, 조직 내 최고 인사권 자리에 특정 대학출신이 오르면 주요 직책을 장악하는 일, 그리고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파벌주의에 행태를 겪으며 저항한다. 그가 말하는 좋은 언론은 사회적 다수와 약자를 중심으로 해야하고 소수 권력자에 대해서는 엄격한 시작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삼성의 불법상속, 재전축 사업 관련한 삼성물산의 회피적 수사 등 삼성비판 기사를 기회가 되면 썼다. 삼성에 불리한 기사를 쓰면 광고를 주지 않기에 언론사들을 삼성기사화를 꺼렸다. 삼성관련 기사를 쓰면 회사 선배들, 주변의 아는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전화가 온다. 뉴스의 꼭지에 잡혔던 뉴스는 다음날 아침 6시~6시 반에 시청률이 1~2퍼센트 그칠 데 내보내진다. 그는 삼성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기도 하다.

이명박 절친인 김재철 사장이 임명되자 낙하산 투입과 퇴진 요구 파업에 들어갔다. 그 사이 시사프로그램이 사라지고 한미 FTA 반대 시위도 삭제 등 편파적인 방송으로 변질되어 2012년 1월부터 노조는 170일간 파업에 돌입한다. 노조 위원장 해고와 다수의 해고설에도 저자는 다들 꺼려하는 노조에 또 가입한다. “내가 노조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나의 삶이 나았을까? 내가 노조에 가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가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더욱 힘들어하지는 않았을까? 결국 우리 모두는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는 대리인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저자는 적폐청산의 출발을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으로 보았다. 검찰과 언론이 제대로 된 역할을 못하는 이유는 그 인사권을 정치권력 즉 대통령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사권을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권이 공영방송 임원진 선임과정에서 손을 떼야지 언론의 공정성을 확보되기에 말이다. 그는 현행 정치제도에서 대의제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으나 국민이 직접 뽑을 수는 없어도 추첨을 통해 뽑힌 국민 대표에게 투표권을 주는 국민대리인단 제도를 제안한다.

재벌 위주의 경제정책에서 벗어나고 국민의 참여를 늘리는 방향으로 언론의 개혁을 바랐던 그.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웠던 그가 말한다.˝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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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알렉상드르 타로 지음, 백선희 옮김 / 풍월당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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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개의 알약과 여행 가방

피아노 독주회는 숭고하다. 조명이 꺼지고 온 정신을 가다듬고 무대에 나타난 피아니스트.무대 아래 관객들도 숨을 죽인다. 피아노의 모든 음을 놓치지 않으려는 침묵과 집중의 시간. 하지만 이내 피아노 연주에 이끌려 꿈꾼다. 피아니스트가 조절하는 음의 깊이와 길이는 우리를 전율케 하기도 하고 울게 하기도 한다. 길 잃은 개별은 맘껏 그림을 그려 나간다.

프랑스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로 타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대에서 살아야만 했다. 스무 살 때부터 지난 30년간 살롱, 카페, 클럽, 작은 음악 홀 오라는 곳에는 어디든지 갔다. 이제는 무대가 커졌다. 6천석이 꽉 찬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 물위에 떠 있는 암스테르담의 프린센그라호트 콘서트 홀, 분장실에서 나오면 흰 고래들이 머리를 내미는게 보이는 캐나다의 단풍나무 공연장에서 선다.

타로는 극장, 호텔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산다. 일 년에 손꼽을 만큼 들르는 프랑스 파리의 집에는 서로 크기가 다른 8개의 여행 가방이 항상 대기 중이다. 공연일정에 따라 가방을 선택하고 악보와 수백 개의 알약을 담는다. 배, 코, 목, 허리, 머리, 근육 그리고 예민한 피아니스트를 달래주고 잠재우는,강한 효력을 내는 알약도 포함된다.

그의 집에는 피아노가 없다. 대신 친구들 집 열쇠 꾸러미를 가지고 수십 채의 집을 들락거리며 피아노 연습을 한다. 그는 서로 다른 집의 벽들이 들려주는 분위기를 느끼며 내면의 자극을 받는다. 24시간 곁에 없는 피아노를 만나면 그는 달려든다. “강요된 격리는 욕구불만을 낳고 욕망을 돋운다. 그래서 재회는 크게 기뻐할 일이 된다. 나는 피아노를 다시 만나면 탐욕스레 덤벼들고, 우리는 미친 사람들처럼 함께 작업한다.”

어느 날 피아니스트의 기억에 공백이 생겼다. 그는 장 프랑세의 협주곡의 1악장 녹음을 하다가 같은 지점, 같은 박자에 번번이 멈춘다. 여러 번 시도를 해서 겨우 녹음을 마쳤지만 그날 이후 그는 악보를 기억하지 못했던 순간의 기억이 자꾸 그를 두렵게 했다. 스물여덟 살 때 콩쿠르에서 또 한 번 기억의 공백을 겪은 후 그는 피아노 연주 때마다 사형대를 가는 심정으로 무대에 올랐다. 고심 끝에 그는 기억력으로 연주하는 콘서트를 그만둔다. 대신 페이지 터너를 선택한다. 피아노 연주자로는 드물게 그는 페이지 터너와 함께 독주회를 연다. 무대에 자유롭게 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의 전화기에는 이름과 도시, 각 항구마다 페이지 터너의 이름이 있다. “나의 소중한 도우미들이여, 그대들이 없다면 나는 하찮은 존재입니다.”

완벽한 연주를 갈망하는 피아니스트의 대가는 혹독했다. 철저한 고독 그리고 증폭하는 긴장과 두려움을 끊임없이 다스려야 하니까. 수년 전 타로의 내한 공연 때 나는 무대 뒤에서 그를 기다렸다. 무사히 무대를 마치기를, 관객들의 호응이 좋기를 바랐다. 더 크고 더 많은 관객이 올 수 있는 장소를 섭외하지 못했기에 나는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다시 한국에 찾아온다면 오롯이 그가 이끄는 연주에 손을 잡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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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농촌의 모든 것들 눈에 담고 따라 그렸다. 짚신 만들기, 가마니 짜기, 집짓기 구경하기,명절날 먹었던 음식, 놀거리 등 볼거리가 풍성했다. 학교에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려던 차에 한국전쟁이 일어나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전후 먹고살기 위해 ‘희망사’라는 출판사에서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삽화료는 40원. 당시 쌀 두 되 값이란다.

 

선생은 1960,70년대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형극을 받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사회적 소외감, 열등감이 작용하여 마음고생도 많았다. 그래도 꾸준히 잡지, 신문, 동화책, 위인전 등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최대한 현실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고자 하였다. 8등신이 아닌 한국인의 골격을 세밀히 관찰하여 등장인물을 그리고 갈빛 흙냄새 풍기는 투박한 서정을 담아냈다.

 

 

<재미네골>

중국 길림성 조선족 마을 중 ‘재미네골’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예부터 서로 돕고 마음이 고운 사람들만 모여 살기로 소문만 이 마을에 용궁 나라 용왕이 사신을 시켜,마을 사람들 중 한명을 제물로 데려오라 한다.마을 사람들은 서로 자신이 가겠다고 나선다. 책 장을 넘길때마다 사신이 데려갈 사람이 이 마을에서 얼마나 소중한지를, 남아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대며 서로가 자기가 대신 가겠다고 한다. 뒤로 갈수록 점점 인원이 불어나는 부분은 재미를 더한다. 판소리 CD가 같이 딸려 있어 판소리로 듣는 재미네골은 더욱 흥겹다.

 

 

<여우난골족> 

백석의 시 ‘여우 난골족’을 풀어쓰고 그렸다. 그림 속 배경은 백석의 고향인 평안도 정주다. 작가는 중국 연변에서 설을 지내고 실향민들과 만남을 가지며 최대한 북방의 정서를 담으려 했다. 설날에 오랫동안 못 만났던 친족들의 안부를 묻고, 아이들끼리 전통놀이를 하고, 음식을 나눠먹고. 등장인물들의 표정마다 사연이 실려있다.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따스한 공동체를 그려낸다. 백석의 원시 (原詩)도 실려 있느니 낭독의 맛도 느껴보자.

 


<선비 한생의 용궁 답사기>

북녘 땅 천마산에 용신이 살고 있었다. 한생이라는 선비가 글솜씨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데려오게 한다. 한생은 혼인을 앞두고 있는 딸의 집에 들보에 올린 축하 글을 써준다. 용궁나라에서 게춤과 거북이춤도 구경하고 인간세상의 날씨를 다스리는 방에도 가본다. 인간이 서로 이기심으로 싸우려 할 때 북, 방울, 빗자루를 이용하여 천둥, 번개,바람,비를 만들어 인간 세상으로 보낸다. 용왕님은 인간 세상이 용궁보다 못할 것이 없다며 자연과 벗 삼아 살라며, 선비를 다시 지상으로 내려 보낸다. 한생이 눈을 떠보니 방에 누워 있었다.

 


<할아버지 시계>

붓과 물감이 아닌 볼펜을 들었다. 볼펜으로 그리면서 거친 터치와 그 안에서도 명암을 살려냈다. 당시 당뇨병으로 인해 시력을 점점 잃어갈 때였으나 벽걸이 시계의 변화에 따라 아이에서 노년까지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할아버지의 출생에 한 가족이 모인 옛 마루에 괘종시계가 마루에 걸린다. 걸음마도 배우고,똑딱똑딱, 고모 할머니 결혼식도 치르고 ,똑딱똑딱. 초등학교 입학하는 날에도 시계는 지켜본다. 이제 나이가 들어 할아버지가 되어 신문을 들고 꾸벅꾸벅. 똑딱똑딱


 


<토끼의 재판>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다. 당시 시력을 거의 잃어가고 치매를 앓고 있어 아내분의 도움을 받아가며 2년만에 완성된다. 허방다리에 빠진 호랑이가 나그네를 잡아먹으려 하자 나그네는 여러 동물들에게 판단을 구한다. 하지만 나무, 멧돼지, 닭, 소, 염소, 곰, 여우, 사슴들은 인간이 해온 악행을 떠올리며 모두 호랑이에게 나그네를 잡아먹으라 한다. 마지막에 토끼의 지혜로 호랑이를 허방다리로 다시 빠지게 만들어 나그네는 목숨을 건진다. 작가는 아이들에게 약한 동물의 입장에 서보며 생명을 바라보라 한다.

 

다양한 색채와 재료, 상상력이 풍부한 이야기가 담긴 오늘날의 그림책은 개성과 강조를 내세운다. 이런 작가들 속 홍성찬 선생의 작품은 오히려 새롭다. 멋부리지 않는 투박함이 독보적이다. 시각적으로 클로즈업하여 확대한 그림 한 컷없이 그의 모든 책은 배경과 사람이 항상 같은 눈높이에서 존재한다. 마치 '나'를 보라는 게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를 말하려는 듯하다. 옛 사람들의 정취를 담으려는 노력과 과장되지 않는 한국인만의 골격미, 매 작품마다 고증을 거쳐 하나하나 세밀하게 그리려는 우직함이 선생만의 세계다. 담백한 매력이 맛깔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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