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알렉상드르 타로 지음, 백선희 옮김 / 풍월당 / 2019년 7월
평점 :
수백 개의 알약과 여행 가방
피아노 독주회는 숭고하다. 조명이 꺼지고 온 정신을 가다듬고 무대에 나타난 피아니스트.무대 아래 관객들도 숨을 죽인다. 피아노의 모든 음을 놓치지 않으려는 침묵과 집중의 시간. 하지만 이내 피아노 연주에 이끌려 꿈꾼다. 피아니스트가 조절하는 음의 깊이와 길이는 우리를 전율케 하기도 하고 울게 하기도 한다. 길 잃은 개별은 맘껏 그림을 그려 나간다.
프랑스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로 타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대에서 살아야만 했다. 스무 살 때부터 지난 30년간 살롱, 카페, 클럽, 작은 음악 홀 오라는 곳에는 어디든지 갔다. 이제는 무대가 커졌다. 6천석이 꽉 찬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 물위에 떠 있는 암스테르담의 프린센그라호트 콘서트 홀, 분장실에서 나오면 흰 고래들이 머리를 내미는게 보이는 캐나다의 단풍나무 공연장에서 선다.
타로는 극장, 호텔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산다. 일 년에 손꼽을 만큼 들르는 프랑스 파리의 집에는 서로 크기가 다른 8개의 여행 가방이 항상 대기 중이다. 공연일정에 따라 가방을 선택하고 악보와 수백 개의 알약을 담는다. 배, 코, 목, 허리, 머리, 근육 그리고 예민한 피아니스트를 달래주고 잠재우는,강한 효력을 내는 알약도 포함된다.
그의 집에는 피아노가 없다. 대신 친구들 집 열쇠 꾸러미를 가지고 수십 채의 집을 들락거리며 피아노 연습을 한다. 그는 서로 다른 집의 벽들이 들려주는 분위기를 느끼며 내면의 자극을 받는다. 24시간 곁에 없는 피아노를 만나면 그는 달려든다. “강요된 격리는 욕구불만을 낳고 욕망을 돋운다. 그래서 재회는 크게 기뻐할 일이 된다. 나는 피아노를 다시 만나면 탐욕스레 덤벼들고, 우리는 미친 사람들처럼 함께 작업한다.”
어느 날 피아니스트의 기억에 공백이 생겼다. 그는 장 프랑세의 협주곡의 1악장 녹음을 하다가 같은 지점, 같은 박자에 번번이 멈춘다. 여러 번 시도를 해서 겨우 녹음을 마쳤지만 그날 이후 그는 악보를 기억하지 못했던 순간의 기억이 자꾸 그를 두렵게 했다. 스물여덟 살 때 콩쿠르에서 또 한 번 기억의 공백을 겪은 후 그는 피아노 연주 때마다 사형대를 가는 심정으로 무대에 올랐다. 고심 끝에 그는 기억력으로 연주하는 콘서트를 그만둔다. 대신 페이지 터너를 선택한다. 피아노 연주자로는 드물게 그는 페이지 터너와 함께 독주회를 연다. 무대에 자유롭게 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의 전화기에는 이름과 도시, 각 항구마다 페이지 터너의 이름이 있다. “나의 소중한 도우미들이여, 그대들이 없다면 나는 하찮은 존재입니다.”
완벽한 연주를 갈망하는 피아니스트의 대가는 혹독했다. 철저한 고독 그리고 증폭하는 긴장과 두려움을 끊임없이 다스려야 하니까. 수년 전 타로의 내한 공연 때 나는 무대 뒤에서 그를 기다렸다. 무사히 무대를 마치기를, 관객들의 호응이 좋기를 바랐다. 더 크고 더 많은 관객이 올 수 있는 장소를 섭외하지 못했기에 나는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다시 한국에 찾아온다면 오롯이 그가 이끄는 연주에 손을 잡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