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농촌의 모든 것들 눈에 담고 따라 그렸다. 짚신 만들기, 가마니 짜기, 집짓기 구경하기,명절날 먹었던 음식, 놀거리 등 볼거리가 풍성했다. 학교에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려던 차에 한국전쟁이 일어나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전후 먹고살기 위해 ‘희망사’라는 출판사에서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삽화료는 40원. 당시 쌀 두 되 값이란다.

 

선생은 1960,70년대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형극을 받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사회적 소외감, 열등감이 작용하여 마음고생도 많았다. 그래도 꾸준히 잡지, 신문, 동화책, 위인전 등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최대한 현실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고자 하였다. 8등신이 아닌 한국인의 골격을 세밀히 관찰하여 등장인물을 그리고 갈빛 흙냄새 풍기는 투박한 서정을 담아냈다.

 

 

<재미네골>

중국 길림성 조선족 마을 중 ‘재미네골’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예부터 서로 돕고 마음이 고운 사람들만 모여 살기로 소문만 이 마을에 용궁 나라 용왕이 사신을 시켜,마을 사람들 중 한명을 제물로 데려오라 한다.마을 사람들은 서로 자신이 가겠다고 나선다. 책 장을 넘길때마다 사신이 데려갈 사람이 이 마을에서 얼마나 소중한지를, 남아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대며 서로가 자기가 대신 가겠다고 한다. 뒤로 갈수록 점점 인원이 불어나는 부분은 재미를 더한다. 판소리 CD가 같이 딸려 있어 판소리로 듣는 재미네골은 더욱 흥겹다.

 

 

<여우난골족> 

백석의 시 ‘여우 난골족’을 풀어쓰고 그렸다. 그림 속 배경은 백석의 고향인 평안도 정주다. 작가는 중국 연변에서 설을 지내고 실향민들과 만남을 가지며 최대한 북방의 정서를 담으려 했다. 설날에 오랫동안 못 만났던 친족들의 안부를 묻고, 아이들끼리 전통놀이를 하고, 음식을 나눠먹고. 등장인물들의 표정마다 사연이 실려있다.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따스한 공동체를 그려낸다. 백석의 원시 (原詩)도 실려 있느니 낭독의 맛도 느껴보자.

 


<선비 한생의 용궁 답사기>

북녘 땅 천마산에 용신이 살고 있었다. 한생이라는 선비가 글솜씨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데려오게 한다. 한생은 혼인을 앞두고 있는 딸의 집에 들보에 올린 축하 글을 써준다. 용궁나라에서 게춤과 거북이춤도 구경하고 인간세상의 날씨를 다스리는 방에도 가본다. 인간이 서로 이기심으로 싸우려 할 때 북, 방울, 빗자루를 이용하여 천둥, 번개,바람,비를 만들어 인간 세상으로 보낸다. 용왕님은 인간 세상이 용궁보다 못할 것이 없다며 자연과 벗 삼아 살라며, 선비를 다시 지상으로 내려 보낸다. 한생이 눈을 떠보니 방에 누워 있었다.

 


<할아버지 시계>

붓과 물감이 아닌 볼펜을 들었다. 볼펜으로 그리면서 거친 터치와 그 안에서도 명암을 살려냈다. 당시 당뇨병으로 인해 시력을 점점 잃어갈 때였으나 벽걸이 시계의 변화에 따라 아이에서 노년까지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할아버지의 출생에 한 가족이 모인 옛 마루에 괘종시계가 마루에 걸린다. 걸음마도 배우고,똑딱똑딱, 고모 할머니 결혼식도 치르고 ,똑딱똑딱. 초등학교 입학하는 날에도 시계는 지켜본다. 이제 나이가 들어 할아버지가 되어 신문을 들고 꾸벅꾸벅. 똑딱똑딱


 


<토끼의 재판>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다. 당시 시력을 거의 잃어가고 치매를 앓고 있어 아내분의 도움을 받아가며 2년만에 완성된다. 허방다리에 빠진 호랑이가 나그네를 잡아먹으려 하자 나그네는 여러 동물들에게 판단을 구한다. 하지만 나무, 멧돼지, 닭, 소, 염소, 곰, 여우, 사슴들은 인간이 해온 악행을 떠올리며 모두 호랑이에게 나그네를 잡아먹으라 한다. 마지막에 토끼의 지혜로 호랑이를 허방다리로 다시 빠지게 만들어 나그네는 목숨을 건진다. 작가는 아이들에게 약한 동물의 입장에 서보며 생명을 바라보라 한다.

 

다양한 색채와 재료, 상상력이 풍부한 이야기가 담긴 오늘날의 그림책은 개성과 강조를 내세운다. 이런 작가들 속 홍성찬 선생의 작품은 오히려 새롭다. 멋부리지 않는 투박함이 독보적이다. 시각적으로 클로즈업하여 확대한 그림 한 컷없이 그의 모든 책은 배경과 사람이 항상 같은 눈높이에서 존재한다. 마치 '나'를 보라는 게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를 말하려는 듯하다. 옛 사람들의 정취를 담으려는 노력과 과장되지 않는 한국인만의 골격미, 매 작품마다 고증을 거쳐 하나하나 세밀하게 그리려는 우직함이 선생만의 세계다. 담백한 매력이 맛깔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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