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글을 쓰고 책을 읽고, 텃밭에서 일하며 소박한 삶을 살고 계시는 박홍규 선생. 그에게 그림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려왔고 학창시절에는 학교 앞에 아뜰리에를 차리기도 했다. 대학에서 법학과 학생들을 가르치며 ‘법과 예술’ 강의를 열었고 교내에서 개인 전시회도 열었다. 그가 지금까지 쓰고 번역한 200여 권의 서적 중에서 클림트, 고흐, 밀레, 오노레 도미에 등 미술관련 책에 눈길이 간다.
1950년, 열 살이 되던 해 박홍규 선생은 한 화가의 집에서 고야의 화집을 처음 보게 된다. 그 후부터 고야는 선생에게 화가의 원형이 되었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고야가 그린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를 실제로 본 그는 어릴 적 자신이 시달렸던 악몽의 원천이 그 괴물이 아니었을까,라고 회상한다. 그 괴물은 고야를 평생 지배한 "윤리, 도덕, 종교, 그리고 국가라는 괴물"이었다. 박홍규 선생은 현실도 고야가 고발한 괴물이 지배함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고야가 그렸던 괴물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고야는 30년간 스페인의 수석 궁중화가로 일했다. 그는 주로 장식 직물의 밑그림 작업인 칼톤을 그렸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 여성의 자립으로 지위가 약해진 남성, 그리고 프랑스 혁명 세력의 승리를 그림에 담았다. 궁중화가로 일하면서 고야는 아이러니하게도 개인 판화작품에 반체제 내용을 담았다. 범죄, 처형, 폭력적인 죽음을 주제로 삼았다. 그는 그리스 석고상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기존의 미술 전통을 거부하고 있는 그래로 사물과 사람을 관찰하는데 집중했다. 고야의 관심사는 미술적인 기교와 독창성이 아닌 ‘사회정의’를 표현하는데 있었다.
저자는 고야의 작품을 스페인 역사와 나란히 두고, 역사적 사건이 어떻게 고야의 작품에 영향을 줬는지 살핀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고야는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로스 카프리초스>는 1797년부터 고야가 작업한 동판화로 사회의 악폐, 인습, 어리석은 남녀관계의 내용을 담고 있다. 고야는 권력층을 비판하고자, 무능한 집권자와 허영에 젖어있는 귀족을 당나귀로, 무지에 의해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민중을 노새로 빗대었다. 또한 인간이 가진 비이성적 본성을 비판하며 인간을 반동물로 타락한 마녀의 형상으로 풍자하기도 했다. 고야의 작품 속 마녀와 기형적 괴물은 인간의 이성이 사라질 때 고개를 드는 ‘추악성’과 ‘폭력성’을 말한다.

1808년 스페인 독립전쟁 중 고야가 작업한 판화집 <전쟁의 참화>에는 체제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기근과 전쟁으로 인해 시민들이 겪는 불안감과 비참함, 그리고 전쟁의 참혹한 야만성을 인간과 동물이 합체된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묘사했다. 고야가 그린 정치범들과 죄수의 인권을 고발하는 그림은 미술사에서 보기 드물다. 고야는 판화를 작업하면서 전장에서 투쟁하는 여성들과 짓밟히는 민중의 모습을 그리며 그들과 연대하고자 했다. 저자는 고야가 하층을 구성하는 농부나 일용노동자에게 “인간의 얼굴을 부여”했으며, “민중으로부터 단결이라는 새로운 연대의 삶을 발견했다"며 고야를 높이 평가했다.

이 책은 2002년에 나왔던 <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의 증보판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고야의 판화와 소묘를 중심으로 고야의 그림을 펼쳐 보인다. 스페인 역사 속 권력과 욕망에 맞선 고야의 저항을 역사적 사건의 전개와 촘촘히 엮어냈다. 고야의 그림은 그림 자체만으로 느끼고 감상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스페인 역사와 더불어 그림 속 배경을 이해해야 비로소 고야를 읽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저자는 주로 평론가 홋타 요시에의 주장에 반하는 의견을 내며, 고야의 작품을 해석했다. 책에는 두 명 정도의 다른 평론가의 의견도 짧게 언급은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고야의 작품을 평할때 요시에의 평론만을 주된 예시로 다루고 있어 다양한 평론가들의 의견도 있었으면 더 균형있는 시각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고야를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저자는 고야 시대를 전후하여 정치, 문화, 역사, 문학 등 스페인에 전반에 걸친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담아내고 있다. 이 책을 고야를 따라 떠나는 스페인 인문 기행, 혹은 고야의 그림으로 읽는 스페인 역사기행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스페인 여행을 꿈꾸는 이들에게 관광가이드 서적과 <저항하는 지성, 고야>를 나란히 챙기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