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스티븐 런치만 경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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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한시대의 마감을 의미하는 해로 여겨진다. 로마의 전통 원형을 가장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함락으로, 비로소 유럽이 고전고대문화로부터 탈피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와 근대를 구분짓는 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분분한 의견이 있지만,  비잔티움제국의 함락을 그 기준으로 삼는데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은 말그대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는 그 정황을 서술한 책이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중심으로 그전의 비잔티움제국의 쇠락과 오스만 제국의 성장, 그리고 아직 전혀 사태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서유럽국가의 상황에서부터 함락후의 서유럽의 반응와 그리스정교회의 생존등을 다루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 :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시오나 나나미의 책에서 나오는 주요 인물들이나 이 책에서 나오는 주요인물들이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이 주요 인물들을 관점과 중심으로 소설처럼 공방전의 상황을 서술해 나아간 것에 비하면, 이 책은 더 거시적으로 인물들이 다루어진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읽고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똑같은 이야기를 참 재미없게 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재미있을 수 있었던 것은 시오노 나나미의 책에 비해 보다 객관적이고 거시적으로 공방전을 다루고 있고, 그러면서도 저자의 관점(역자의 말대로 열악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방어했던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잔티움제국은 유럽사에 있어서도 소외받는 위치에 있었다. 동서로마의 분열과 서로마의 멸망과 더불어 분명 로마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문화적인 이유로 그 정통성이 부정되고 외면되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결국에는 함락되는걸 바라보기만 했던 서유럽의 당시 상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러한 경향은 최근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최근에야 지금까지의 태도에 대한 반성적인 자세와 연구가 시작된것이다.

 이 책이 최근 이러한 경향이 반영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면도 없지는 않은 듯 하다. 하지만 시작부터 완벽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이러한 책이 더 많이 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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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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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절벽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렸지만 떨어져 죽기 직전에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떨어져 내리는 두려움이 줄어들지는 않았더라도 그 두려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새로운 조망을 얻은 것이었다. 나는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렸지만 마지막 순간에 뭔가가 팔을 뻗쳐 나를 허공에 걸린 나를 붙잡아 주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사랑이야말로 추락을 멈출 수 있는, 중력의 법칙을 부정할 만큼 강력한 단 한가지 것이다.

풀 오스터, 달의 궁전 중에서

 소설을 보기전에 이 글을 어디선가 먼저 읽었다. 그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는데, 선입견으로 작용된 것일까, 소설속의 이 구절은 꽤나 색다르게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우연에 우연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면서도 이야기의 가장 저변에 깔린 생각은 이 이야기인것 같다.

 제목대로 차고 기우는 것이 반복되는 달처럼, 주인공은 결코 순탄치 못한, 우연에 우연 겹친 삶을 달과 같은 곡선을 따라 덤덤하게 걸어나가고 있다. 마침내 최종부에서는 파국으로 순환이 끝난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이전과 같이 덤덤하게 달의 순환곡선을 따라 살아갈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

 나는 세상 끝까지 온 것이었고 그 너머로는 바람과 파도, 중국 해안까지 곧장 이어진 공허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가 내 출발점이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여기가 내 삶이 시작되는 곳이야.

 나는 마지막 남은 석양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이나 그 해변에 서 있었다(....)다음에는 언덕 뒤에서 달이 떠올랐다. 달아오른 돌처럼 노란 둥근 보름달이었다. 나는 그 달이 어둠 속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눈 한번 떼지 않고 밤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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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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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시신을 따라 공동묘지로 갔던 순간까지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는 또한 회상 속에서도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는 충실이 모든 덕목에서 최고의 것이라는 감정이 생겨났다. 충실은 우리들 삶에 하나의 통일성을 부여한다. 충실이 없을 때 우리의 삶은 수천의 순간적 인상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프란츠는 사비나에게 종종 그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어쩌면 무의식적인 타산에서 그랬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자기가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이 사비나의 마음을 매료시킬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녀를 자기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사비나를 매혹시킨 것이 충실이 아니라 배반임을 알지 못했다. <충실>이란 말은 그녀로 하여금 그녀 아버지를 회상시켰다. 소도시의 청교도였던 그의 일요일 취미는 해지는 숲의 모습과 화병에 꽂은 장미꽃다발을 그리는 것이었다. 아버저지 때문에 그녀는 벌써 아이 때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었다. 열네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동갑내기의 소년에게 반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걱정이 되어 일 년 내내 그녀가 혼자 외출하는 것을 금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그녀에게 피카소의 복사물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것들을 웃음거리로 보고 재미있어 했다. 자기 동급반 소년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적어도 피카소의 이 입체파 그림을 사랑했다. 고등학교 졸어 후 그녀는 이제 드디더 자기 집을 배반할 수 있다는 즐거운 기분으로 프라하로 갔다.

배반. 그것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혐오스런 것이라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선생님으로부터 들어왔다. 그런데 배반이란 무엇인가? 배반은 대열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배반은 대열에서 이탈하여 미지를 향해 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비나는 미지를 향해 출발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미술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그녀는 피카소처럼 그려서는 안되었다. 그때는 의무적으로 소위 사회주의사실주의에 충실해야 했고 초,중,고등학교에서는 공산주의 정치가들의 초상화를 그렸던 시기였다. 아버지를 배반하려는 그녀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다른 아버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사랑을 금했고(당시는 청교도적인 시기였다) 피카소를 금한 아버지와 꼭같이 엄했고 편협했다. 그녀는 어느 프라하 극단의 형편없는 배우와 결혼했다. 그것은 그가 행패부리는 사람으로 소문 나 있어 그녀의 두 아버지에게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하루 뒤에 그녀는 전보를 받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슬픈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아버지가 장미꽃다발이 꽂힌 화병을 그렸고 피카소를 싫어한 것이 그토록 나빴단 말인가? 열네살 먹은 자기 딸이 임신하여 집에 오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했던 것이 그토록 비난스런 것인가? 그가 부인 없이 살 수 없었다는 것이 그토록 우스꽝스러운가?

다시금 배반에 대한 욕구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남편에게(남편에게 그녀는 더이상 행패꾼을 볼 수 없었고 다만 성가신 술주정뱅이를 보았다) 자기가 그를 떠날 것이라고 통보했다.

B를 위해 A를 배반했던 사람이 B를 배반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이 그렇게 함으로써 A와 화해했음을 반드시 일컫는 것은 아니다. 이혼한 이 여류화가의 삶은 배반당한 그녀 양친의 삶과 같지 않았다. 최초의 배반은 보상될 수가 없다. 그것은 일종의 연쇄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이때 각 배반은 우리를 원조배반의 시발점으로부터 점점더 멀리 떨어지게 한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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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북
워싱턴 어빙 지음, 박경서 옮김 / 문학수첩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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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민담의 구조는 선하고 약한자 - 주로 평범한, 가난한 민중층 - 가 꾀를 써서 악하고 강한자 - 역시 대칭적으로 권력층 - 를 물리치고 원하는 것을 얻는 것 - 대부분 평생 먹을 것 걱정 없이 행복하고 오래살았다라는 지극이 평범하고 소박한 것 - 으로 끝나게 된다.

카트리나를 둘러싼 브롬과 이카보드의 대립이 주를 이루는 어빙Washington Irving의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The Legend of Sleepy Hollow'를 이러한 민담의 틀을 통해서 바라볼 때 (다소 거칠지만) 브롬과 이카보드를 누가 '선하고 약한자'이고 누가 '악하고 강한자'로 구분하기는 약간 애매한 감이 없지 않다. 소설 속의 화자는 이카보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아가고 있고, 이카보드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긍정적이다. 또한 이카보드는 마을의 신참자이며, 약하고, 순진하고, 비교적 지적이며, 마을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 있다. 반대로 브롬의 경우는 마을의 터주대감이고, 강하며, 이카보드에 비해 지적이지 못하고, 마을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는 만큼이나 경외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카보드의 카트리나에 대한 애정을 눈치챈 브롬은 이카보드에게 창피를 주는 등의 짖궂은 장난을 하지만 이카보드는 이에 큰 저항을 하지 않고 견뎌낸다. 또한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마을에서 사람들의 두려움의 대상인 유령인 목 없는 기사마저 조롱하고 무시하는 브롬에 비해 이러한 이야기를 믿고 또 즐기는 이카보드가 더 마을 분위기에 익숙하고 친숙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일반적인 민담의 구조와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이카보드와 브롬에 대한 서술을 보면 카트리나와 결혼해서 행복한 결말을 맺는 사람은 이카보드가 될 것 같지만 결과는 오히려 브롬이 이카보드가 영적인 것을 잘 믿는다는 점을 이용해서 이카보드를 마을 밖으로 내쫓고 카트리나와 결혼을 하게 되는 것으로, 민담이 뒤틀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브롬과 이카보드는 각각 마을 안과 밖에서 혼인과 법률가가 되는 - 두 사람 모두 '현실'의 길로 가는 -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하지만 두 사람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 속에서 '현실'을 선택한 것과 대조적으로 마을에서는 이카보드가 쓰러져 사라진 장소가 유령이 나오는 전설의 장소로 새로이 추가되어 마을이 갖고 있는 환상적인 이미지를 한층 더 강화시키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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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가면의 제국 - 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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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한국 사회의 지상과제중 하나는 바로 근대화였다. 식민통치와 동족상잔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근대화는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표였던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물질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민주화라는 정치적인 면에서의 근대화도 동시에 - 비록 전자에 비해 그 과정이 많이 더디긴 했지만 - 이루어졌고,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어느정도의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된’ 지금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지난 근대화를 위한 움직임을 반성할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근대화에 대한 반성은 선진국의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우리와 비교해볼때 비교적) 완만한 근대화 과정이나 비교적 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성장을 이룩한 제 3세계국가의 근대화 과정과의 비교를 통한 우리의 근대화의 절차와 과정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우리의 근대화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반성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 없이 지난 반세기의 역사가 식민통치와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전쟁, 그리고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진한 군사독재정권라는 과정을 통해 심하게 왜곡되었고, 그러한 왜곡에 대한 반성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일 것이다.

박노자의 ‘하얀 가면의 제국’은 제목에서 드러나는 대로 ‘흰색(=서구)’, ‘제국’, ‘가면’이라는 세가지 요소를 통해 우리 사회의 근대화에서 나타나게 된 ‘하얀 가면이 진짜 얼굴이 되기를 간절히 비는 광적인 맹종’에 대해 비판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우선 그는 우리가 귀감으로 삼고 있는 서구 제국에 접근한다. 미국이 국내의 다양한 인종과 계급에 따른 내부 모순을 기독교 근본주의적 선민의식에 바탕한 ‘명백한 운명’라는 백인우월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인 논리로 무마하여 넘어갈 뿐만 아니라 제 2차 세계대전부터 최근의 이라크전쟁에 이르기까지 대외전쟁을 정당화시키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당화 과정을 통해서 전쟁중에 발생한 나치 포로의 반인권적인 대우, 태평양전쟁과 한국전, 베트남전에서 발생한 인종주의에 입각한 학살, 그리고 결코 민중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전쟁이 아닌 이라크전의 실체를 왜곡시키고 있다.

<2004년 1학기 서울대 서양사를 보는 시각>
이와 같은 제국의 모습은 서구 선진국, 즉 중심국가들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향을 받은 주변국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 주변국가들은 중심국가들과 같은 반열에 오르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 비해 못한 집단과 국가들에 대해서는 중심국가가 자신을 보는것과 같은 시각을 가지고 - 다시말해 ‘가면을 쓰고’ - 대한다. 앞서 말한 미국의 제국적인 모습은 서유럽에 비해 한걸음 늦게 근대화가 진행되고 국민국가가 형성된 그의 조국 러시아 - 구 소련 - 에서도 드러난다. 공산화의 붕괴이후 급속도로 자본화가 진행되면서 공공서비스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극히 악화되고, 대기업의 정경유착 심화에 따른 시장경제의 불안한 상황이 러시아에서 지속되고 있으나, 근본적인 대책보다는 극우단체를 선동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사회내부를 억누르고 대외적으로는 대(對)체첸전쟁을 수행함으로써 모순을 무마하고 있다.

한국 사회와 비교해보았을때 그의 모국인 러시아는 우리나라와는 이념적으로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고, 그 과정에서 매우 큰 차이를 보이고 있긴 하지만 국가주도의 후발 근대화가 추진되었고 이에 따른 비슷한 유형의 문제를 안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과 러시아는 서로 서구의 ‘가면’을 쓰고 바라봄으로써 왜곡된 인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러시아는 우리나라를 미국의 후광으로 발전한 위성국가중 하나로, 우리는 러시아를 망해버린 공산주의의 맹주국가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면’의 왜곡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서 문화적인것에까지 이르는데, ‘전향(?)한 기독교적 보수주의자’인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전향 전적과 전향 이후의 정치적 행동에 대해서 비판없이 서유럽이 하는 그대로 따라서 우리가 세계문학의 거장으로 추켜세우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러시아 뿐만 아니라 폴란드와 이스라엘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유럽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진 서유럽’의 대열에 끼어들지 못한 ‘주변국가’ 폴란드는 중심국가로 편입하기 위해 자국의 농민과 노동자를 희생시키는 모습이나 이라크전에 참전하는 등 중심국가에 대해 과잉충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중심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바른 시각을 통한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러한 시각을 그대로 적용해 이슬람세계는 물론 아직 주변국가로 남아있는 동유럽국가들을 바라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경우에 있어서도 중부유럽과 동부유럽에 거주하던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온건좌파성향의 유태인인 이슈케나지나 오래전부터 이스라엘땅에 살던 아랍세계와 많이 뒤섞이게 된 유태인인 세파르디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영국등의 중심국가들의 후원을 업고 시오니스트들이 교회층에서만 사용하는 히브리어를 국어로 하는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건국배경은 다수를 차지하는 이슈케나지나 세파르디를 포용하지도 못하고 - 그들의 문화가 곧 유태인의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정식 역사에는 포함되지 못한다 - 이전부터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과의 오늘날까지의 끝없는 분쟁을 야기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랍과의 분쟁은 미국과의 이해관계와도 일치가 되어 이전까지는 언급되는 것조차 터부시돼었던 홀로코스트가 ‘20세기 최악의 사건’가 되면서 시오니즘을 오히려 정당화시키고 있다.

이야기는 제국, 혹은 제국의 가면을 쓰고 바라본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보이는가라는 문제로 돌아온다. 전통적인 가치를 복원하고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해야했던 박정희와 서구의 근대화가 지상 과제인 사람들에게 근대지향적인 민중혁명으로 탈바꿈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 역사마저 있는 그대로가 아닌 서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평가하는 작업은 남한사회뿐만 아니라 북한사회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면서 정국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신속한 국가 발전을 위해 북한은 유교적인 요소를 채택한 것이지만, 서구에서는 오히려 유교적인 것을 기본적으로 하고 공산주의가 덧붙여진 것으로 간주하여 북한 정치의 특수성을 찾는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을 북한 자신이 받아들여 자신을 ‘유교적 사회주의’사회로 정의할 뿐만 아니라 남한 사회 역시 자신들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유교적 자본주의’사회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두 사회의 민족주의는 근대화와 제국주의와 맥락을 같이 하게 되면서 정말 그럴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자민족 중심적이고 폭력적이고 팽창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가면을 벗어던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의 문제가 남게된다. 지금까지의 방법대로 ‘가면’이 ‘피부’가 되도록 노력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게되면 우리의 역사를 우리 자신이 있는그대로 보지 못할뿐더러 그 과정에서 민중이 겪게 되는 피해가 지금까지의 근대화에서 겪었던 것보다 더 심해질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거꾸로 중심과 주변의 위치가 역전되게끔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다는 것은 주변부의 열등감의 표출이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이것이 거꾸로 중심부의 권위와 위상이 강화될 뿐이다. 중심과 주변이 변증법적인 관계를 거쳐 섞이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러한 방법도 결국에는 또다시 새로운 중심을 만들게 될 것이다. 남은 것은 결국 중심과 주변을 구분짓는 요소들의 기준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갖고 그러한 중심과 주변의 구별자체를 해체시켜 ‘가면’을 벗어던지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방법일 것이다. 다시 말해 서구의 근대화는 우리의 지상과제도 아니고, 역사 발전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아닌,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생겨난 한 단계일 뿐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얀 가면의 제국’은 분명히 한국 사회의 근대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서구 중심주의적 사고를 비판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우리의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드러난 모순들을 단순히 일일이 열거하기보다는 중심부의 제국을, 그리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중심부로 편입하고자 가면을 쓴 채 제국인 양 하는 주변부 국가들의 사례를 많이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러한 다른 나라의 예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근대화에 내재되어있는 문제점의 근본적인 원인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발생되는 모순을 군사주의와 제국주의의 폭력적인 성격이 다분한 민족주의를 통해 무마시키고 정경유착이 유난히 심한 러시아의 모습에서 지난 시절의 우리 사회의 일면이 떠오르고, 국민국가 수립과정에 있어서 다수의 동포를 문화, 역사적으로 완전히 배제해버리고 아랍에 대해 끊임없는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시오니스트들의 나라 이스라엘에서도 우리사회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은 우리의 문제가 단순히 한국의 특수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지 않은 국가들이 안고 있는 문제로서 이러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연대를 통한 해결방안의 모색이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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