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산드라 - 세계문학선 1
크리스타 볼프 / 작가정신 / 198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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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의 당연한 기정 사실로 여겨왔던 사실에 그 내면에는 정반대의 진실이 숨어 있던 적은 뉴스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우리의 생활에서도 자주 있는 일이다. 이 소설은 우리가 지금까지 어떠한 이의 없이 쉽게 받아들였던, 하나의 '신화'로 여겨왔던 신들과 영웅들의 '아름다운' 전쟁 이야기를 전체 이야기에서 소외된 입장인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또 다른 '진실'을 찾고자 하는 듯 하다.

아폴로의 사랑을 받아 예지능력을 받았지만 다시 그의 미움으로 인해 그가 사실을 예언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저주를 받은 - 어쩌면 이 소설이 그렇게도 어렵게 느껴졌던 이유가 나 역시 카산드라의 말을 믿지 못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 그래서 트로이에서 가장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왕궁에서 가장 소외 받게 된 카산드라를 통해 트로이 전쟁을 본다는 점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프리아모스는 나에게 설명했다. 전쟁 중에는 평화시에 유효한 게 모두 무효가 된다. 브리세스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곳에서 그녀에 관해 얘기하는 게 그녀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 그게 우리에게는 유용한 거야. - 언제까지요. - 그 여자의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의견의 차이가 있는 한에는 그런 거야. - 세상에, 무슨 사람들이 있지도 않는 사건으로 서로 갈라지겠어요. 그렇게 할 목적으로 일부러 사건이 날조된 겁니다. - 그렇다면 문제되는 거야. 세상에 퍼진 일은 사실인 거야. - 그렇군요. 헬레나의 사건처럼 사실이 되는군요. ...(소설중에서)

그녀의 독백 안에는 한 사람으로서, 한 여성으로서 그녀가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녀를 범하려는 남자들을 증오하고 있는 모습, 다른 여성들을 흠모하고 질투하는 모습들이 잘 드러나 있다. 그녀는 지극히 평범한 한 여성으로 살아가고 싶은 것으로 보여지지만, 그가 처한 정치적, 종교적 상황은 그녀가 '평범함'을 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쟁의 원인인 헬레나와 그를 데려오게한 파리스는 어떠할까. '오빠의 다정한 여자에게 그렇게 냉담하게 대할 수 있냐'라는 카산드라의 질문에 파리스는 '비웃듯이' '그녀는 있지도 않아'는다라고 대답을 한다. 있지도 않은, 아름다운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전쟁에 동원되어야 한다니. 그녀는 끊임없이 어전회의에서 전쟁을 어떻게 해서든 피하자고, 있지도 않은 헬레나 때문에 싸워야 하느냐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어전회의에서는 군부의 승리에의 확신과 '왕가의 명예'에 눈이 멀어 그녀의 합리적인 타협안에 거부를 하고, 그녀를 어전회의에 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전쟁 중에 차례로 출전했던 그녀의 형제들은 전사한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은 '죽은 자의 품위'와는 전혀 먼 방식으로 끝난다. '짐승같은' 아킬레우스에 의해 다 죽어가는 마당에 더 심한 고통을 받고 끝내는 목을 빼앗기게 된다거나, 아킬레우스의 잔인한 복수를 받지 않도록 그리스 군에서 '배려'해준다는 것이 시체를 심하게 훼손시킨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프라이모스가 그의 딸 카산드라에게 한 말대로 전쟁 중에는 평화시에 유효하였던 것이 모두 무효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있지도 않은 한 미인이 명분이 되는 전쟁이라는 것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인간성의 파괴. 카산드라는 신들과 영웅의 '남성'적인 이야기에서 여자라는 소수입장에서(물론 이런식의 단순한 남-녀의 이분법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긴 하나), 그리고 호전적인 트로이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주화론자라는 점에서, 왕녀와 사제라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소외된다. 그런만큼 그녀는 사실로부터 거리를 두며 '영웅'들이 볼 수 없었던 사실들을 철저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신화라는 이름으로 단순히 보아왔던 우리들은 그녀를 통해 또다른 진실을 볼 수 있게 된다. - 명분없는 전쟁과 그 속에서 많은 '유효'한 것이 '무효'화되어 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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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의 자유주의의 실험
민두기 지음 / 지식산업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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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중국 국민혁명기에서 장개석이 대만으로 옮긴 후 60년대까지 여러 분야에서 활동을 하던 호적의 행적에 대한 것이다. 미국 유학시절 듀이로부터 사사받은 그는 자유주의의 원칙을 바탕으로 중국 사회에 대한 비판을 끊임없이 했었다.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란 타인에 대한 용인 - 즉 관용 - 으로써 보장된 개인의 가치의 유지 발전을 사회적 정치적 진본의 근본목표로 삼고, 자유를 정치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다원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독재적인 방법이 아닌 민주주의적 법치의 방법으로 혁명이 아닌 점진적인 개혁을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자유주의자로 활동하는 동안 내내 공산당과 국민당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그의 주장은 그의 생전동안은 '실험'으로 그쳤었다. 그의 사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그의 사후에서부터였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와 같은 관용과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호적의 사상과 이에 충실하였던, 지행일치적인 그의 활동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지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살던 시대에서는 불행히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던 시대였다. 그는 국민당으로부터는 친공적이라 비판을 받았고 공산당으로부터는 미제국주의의 주구라는 비판을 받았다. 중국사회의 개혁을 위한 두가지의 정반대 길을 택해야 했던 시절에 그는 세 번째 길을 걷고자 하였기에 - 부득이하게 장개석의 편에 서있지만, 그는 언론활동을 통해 꾸준히 장개석에게 충과와 비판을 했었다 - 그것도 국민당과 공산당과 같이 갑작스런 혁명을 통한 사회변화가 아닌 점진적인 개혁을 통한 사회변화를 추구했기에, 양쪽에 비해 호응을 덜 받고, 또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것이었다. 그는 순수한 자유주의를 추구하기 위해 정치 일선에서는 가급적 물러나고자 했었다. 역사에서 가정을 하고 생각을 한다는 것에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도 하지만 만약 호적이 -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 정지적 야망이 조금 더 있어서, 국민당내 반장세력과 연합하여 장개석과는 또 다른 정부를 통해 그의 자유주의를 주장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도 중국인민들이 공산당을 택할 것인지말이다. 물론 이렇게 되었더라면 그는 그가 설정한 자유주의와는 엇갈리겠지만 그래도 호적이 언론과 교육을 통한 비판을 주로 한 점에 대해선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는 조금은 소극적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과 아쉬움도 든다.

그는 자유주의적인 입장에서 항상 주류 의견이나 공권력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와 그것을 인정하는 관용적 태도를 주장해왔고, 실제로 그것에 대한 문제가 생겼을 때는 언제나 펜을 들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정부와 사회에 대해 비판해왔다. 이러한 비판의 자유와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태도에 대한 논의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도 크게 일어나고 있다. 정계에서 흔히 색깔론을 들먹여 상대방을 제압하려 하고 있고, 이에 대한 지식인들의 시각도 천차만별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최상(best)의 것이 아닌 최선(better)의 것을 선택하는 사회이다. 그런 만큼 이런 사회에서는 한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자유가 확실히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조건이 만족되어야만 많은 사람들이 최대한의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살수 있는 것이다. 헌법상으로 이러한 것들을 보장한다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는 현실적으로 그러하지 못하다. 호적이 자유중국을 주장하던 당시의 환경과 비교해볼 때, 너무나 유리한데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사회에서는 호적과 같은 진정한 자유주의자가 더 늘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처한 시대와 환경이 지금과는 판이하다 할지라도, 오늘날의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더 이상 그의 자유주의 실험이 '실험'에 끝나지 않고 성과가 올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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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 한길그레이트북스 30
M.엘리아데 지음, 이은봉 옮김 / 한길사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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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인에게는 공간이 균질하지 않다. 즉 그들에게는 형태가 없는 넓은 공간 안에 실재적 현실이 존재하는 성의 공간이 있고 그것이 대립, 단절, 균열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성의 공간은 미래 방향을 위한 기초가 되는 고정점과 중심축을 산출하여 방향성을 제시한다. 종교인들은 이러한 성의 공간에 살고자 노력하며, 이를 통해 진정한 실존을 획득하게 된다. 속의 공간은 균질적이며 중성적으로, 종교성과 신성성을 부정한다. 이곳에서는 속된 생존만을 받아들이는 인간에게만 알려진 공간의 경험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탈신성화는 가능하지만 탈종교화는 불가능한데, 가령 다른 곳과는 질적으로 다른, 개인의 성지(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라는 곳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자신이 사는 영역을 신에 의해 정화되고 교류한 지역인 코스모스라고 여기고 그렇지 않은 지역을 카오스로 인식했다. 그렇게 때문에 자신들의 영역밖을 개척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정화의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에 편입하는 과정을 거친다(cosmosnicization). 즉 세계체계는 성스로운 장소는 공간의 균질성의 단절이고, 하나의 우주에서 다른 우주로 가는 통로로, 이 교류는 하나의 우주에 중심한다는 기둥이나 축등으로 형상화된다.

종교인에게는 시간 역시 비균질적이고 연속적이지 않다. 즉 성스럽고 축제의 시간이 있는가 하면 일상적 시간이 있다. 그리고 후자에서 전자로의 이행은 의례를 통해서 가능하다. 성스러운 시간은 신화적 과거인 태초(갑자기 출현함)에 생겨난 성스러운 사건의 재현을 통해 생겨난다. 즉 축제에서 신화적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일상적 시간에서 탈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무한 회복이 가능하고 반복이 가능한 행동으로, 또 비종교인들도 '인간사'가 개입된 점이 차이긴 하지만 성스러운 시간과 비슷한 시간의 단절성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시공간에 대한 비균질적인 의식은 사원에서도 세계의 중심에서 천지사이를 연결해주고 우주의 시간이 건물 양식을 통해 상징적인 방법으로 드러난다. 시간은 새로운 종류의 존재자가 출현함과 동시에 발생하고, 이러한 실재의 탄생은 신화를 통해 계시된다. 우주의 창조는 신적인 것의 최고의 현현이며, 이때에 신들은 최대의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따라서 종교인들은 이러한 것을 실재로 보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이러한 창조의 성스러움을 경험하고자 신년제의를 하는데, 이를 통해 과거의 시간을 폐지하고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의 이행을 반복하여 우주 창조를 재현한다. 이것은 의례적 정화와 개인과 전체의 죄와 과오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료의 의미 역시 이러한 창조의 시간으로 돌아가서 최대의 힘을 발휘하는 신의 힘으로 재생한다는 뜻이 있다. 즉 이러한 창조와 같이 신성한 행동을 모방, 반복하는 것은 그러한 성스러움이 실재에 머물도록 해주고, 이를 부단히 재현하여 세계가 성화되기를 바라는 욕구에서 기원되는 것이다.

신화는 시간의 최초에 일어난 원초적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새로운 우주적 상황과 원초적 사건의 출현을 알린다. 이것은 신들의 작업이 신성하다는 것을 계시한다. 신화의 가르침은 곧 신을 모방한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종교적 인간은 (자기 자신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진정한 인간이 된다.

신화나 신년제의 뿐만 아니라 종교인에게 있어서 자연은 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성스럽다. 가령 물의 경우 종교적 인간들은 그것을 우주적 총체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것은 일체의 존재 가능성의 원천 저장고로 모든 형태에 선행한다고 생각한다. 즉 물위에서 부상하는 것은 창조되는 것으로, 수몰하는 것은 해체되는 것(하지만 완전한 소멸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으로 생각하며 물과 접촉하면 부활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대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지는 자궁과 같이 인간이 태어나는 곳이면서 동시에 죽어서 돌아가는 곳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여성의 분만은 대지모의 일을 대신 행하며, 이것은 모범적 행위의 소우주적 표현법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신생아를 대지에 눕히거나 누군가를 자신의 집단으로 받아들일 때 신체의 일부 혹은 전체를 상징적으로 매장하는 행위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세례와 같이 우주적 어머니에 의해 새로 태어나며, 이 사람을 자신의 집단에 받아들이겠다는 재생과 가입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을 이룬 최고신은 어떤 존재인가? 최고신을 상징하는 각 민족의 언어를 보면 대부분 '하늘'이나 '지고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그는 너무 높은 존재라서, 혹은 너무나도 선한 존재라서 대부분의 경우 창조를 한 후에는 다른 신에게 인간사를 맡기고 '은퇴'하게 되고, 사람들도 찾지 않게 된다. 다만 사람들은 그가 그 누구도 대처할수 없는위기의 순간에는 구제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즉 의식적으로 이해하지 않아도 메시지를 교환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을 한다.

즉 종교적 인간에게는 모든 행동은 성적인 것으로 인식이 된다. 이들은 친숙한 일상생활에서 영적인 징표와 행위를 발견하고, 열린공간에 살면서 자신의 실존도 세계를 향해 열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유럽에서는 역사적 상황하에서 인식되는 인간의 상태 이외에는 어떤 종류의 인간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이들은 자연과 우주의 신성성을 상실하고, 이러한 탈 신성화에 의해 자유를 얻는 것이다. 통과의례를 볼때도 종교적 인간인가 혹은 탈신성화된 비종교적 인간인가의 차이에 의해 신가입자의 존재론적 상태를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진다. 즉 종교적 인간에게 출생은 공동체의 포용이고, 사망은 이승에서 저승으로의 거주지가 바뀌고 사자의 공동체로 받아들여짐을 의미한다면, 비종교적 인간에게 이러한 일은 단순한 가정과 개인의 일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2.
제목대로 이 책의 주제는 성과 속이다. 하지만 단순히 세계관을 성과 속으로 나눈 점은 나에게 상당히 낯설었다. 속이라니. 어딘가 저속하고 속물적인이라는 생각이 속이라는 단어에 자리잡혀있기 때문일까. 오늘날의 비종교적 인간에게 있어서 성이라는 것은 분명히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이 아닌 점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는 속된 존재입니다'라고 과연 얼마나 인식 혹은 인정을 할까. 여기서 인간은 아무리 속된 존재라 해도, 종교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어도 성스러움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성스러움이라는 것은 단순히 속이라는 개념에 대비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가역적인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추구되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성스러워지려고 하는 노력은 인간이 속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가 가족들을 따라 주말에 교회를 가지 않는 이유는 특정종교에 의해 그렇지 않아도 좁은 나의 세계관이 더 좁아질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근데 종교적 인간은 열린공간에 살면서 자신의 실존도 세계를 향해 열어놓은 것이라니! 읽으면서 앞으로는 가족들과 함께 교회에 나가야지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었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보니 이 책에서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려 비극적 실존이 되어버린 현대인이신 독자여러분께서는 책을 다 보는대로 종교를 가지시길 바랍니다'라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특정종교를 통해 이러한 종교적 인간이 되어 열린공간으로, 그리고 나의 실존도 열릴수 있을 것이다.(어쩌면 현대사회에서 그래도 종교성이나 신성성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잃어버린, 잊어버린 신성성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딛고 있는 땅에 대해서도, 흐르는 물을 보면서도, 그리고 푸른 하늘을 보면서도 조금 더 생각해보고 믿을수 있다면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의 수많은 예시를 통해서 알 수 있게 되었다. 결국은 내 자신이 내가 접하고 있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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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춤을 추다가
성석제 지음 / 강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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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석제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미 식상한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그가 진정한 이야기꾼이라는 것을 새삼스래 다시 깨달을 수 있는 책이다. 허구의 소설과 실제의 수필을 허구와 실제라는 애매한 기준으로 가르기는 분명히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허구가 아닌 실제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더욱 느낄 수 있는 책일 것이다.

 성석제의 글쓰기에서 가장 돋보이는것은 단순히 독자를 웃기게 하기 위해 전혀 이야기의 흐름에 관계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코 옆길로 새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치있게 글을 쓰려다보면 자칫하면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질 수 있지만, 성석제는 그 선을 충분히 지키고 있다. 재치와 위트를 가득 담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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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스티븐 런치만 경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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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한시대의 마감을 의미하는 해로 여겨진다. 로마의 전통 원형을 가장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함락으로, 비로소 유럽이 고전고대문화로부터 탈피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와 근대를 구분짓는 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분분한 의견이 있지만,  비잔티움제국의 함락을 그 기준으로 삼는데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은 말그대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는 그 정황을 서술한 책이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중심으로 그전의 비잔티움제국의 쇠락과 오스만 제국의 성장, 그리고 아직 전혀 사태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서유럽국가의 상황에서부터 함락후의 서유럽의 반응와 그리스정교회의 생존등을 다루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 :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시오나 나나미의 책에서 나오는 주요 인물들이나 이 책에서 나오는 주요인물들이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이 주요 인물들을 관점과 중심으로 소설처럼 공방전의 상황을 서술해 나아간 것에 비하면, 이 책은 더 거시적으로 인물들이 다루어진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읽고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똑같은 이야기를 참 재미없게 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재미있을 수 있었던 것은 시오노 나나미의 책에 비해 보다 객관적이고 거시적으로 공방전을 다루고 있고, 그러면서도 저자의 관점(역자의 말대로 열악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방어했던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잔티움제국은 유럽사에 있어서도 소외받는 위치에 있었다. 동서로마의 분열과 서로마의 멸망과 더불어 분명 로마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문화적인 이유로 그 정통성이 부정되고 외면되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결국에는 함락되는걸 바라보기만 했던 서유럽의 당시 상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러한 경향은 최근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최근에야 지금까지의 태도에 대한 반성적인 자세와 연구가 시작된것이다.

 이 책이 최근 이러한 경향이 반영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면도 없지는 않은 듯 하다. 하지만 시작부터 완벽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이러한 책이 더 많이 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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