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속 한길그레이트북스 30
M.엘리아데 지음, 이은봉 옮김 / 한길사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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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인에게는 공간이 균질하지 않다. 즉 그들에게는 형태가 없는 넓은 공간 안에 실재적 현실이 존재하는 성의 공간이 있고 그것이 대립, 단절, 균열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성의 공간은 미래 방향을 위한 기초가 되는 고정점과 중심축을 산출하여 방향성을 제시한다. 종교인들은 이러한 성의 공간에 살고자 노력하며, 이를 통해 진정한 실존을 획득하게 된다. 속의 공간은 균질적이며 중성적으로, 종교성과 신성성을 부정한다. 이곳에서는 속된 생존만을 받아들이는 인간에게만 알려진 공간의 경험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탈신성화는 가능하지만 탈종교화는 불가능한데, 가령 다른 곳과는 질적으로 다른, 개인의 성지(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라는 곳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자신이 사는 영역을 신에 의해 정화되고 교류한 지역인 코스모스라고 여기고 그렇지 않은 지역을 카오스로 인식했다. 그렇게 때문에 자신들의 영역밖을 개척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정화의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에 편입하는 과정을 거친다(cosmosnicization). 즉 세계체계는 성스로운 장소는 공간의 균질성의 단절이고, 하나의 우주에서 다른 우주로 가는 통로로, 이 교류는 하나의 우주에 중심한다는 기둥이나 축등으로 형상화된다.

종교인에게는 시간 역시 비균질적이고 연속적이지 않다. 즉 성스럽고 축제의 시간이 있는가 하면 일상적 시간이 있다. 그리고 후자에서 전자로의 이행은 의례를 통해서 가능하다. 성스러운 시간은 신화적 과거인 태초(갑자기 출현함)에 생겨난 성스러운 사건의 재현을 통해 생겨난다. 즉 축제에서 신화적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일상적 시간에서 탈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무한 회복이 가능하고 반복이 가능한 행동으로, 또 비종교인들도 '인간사'가 개입된 점이 차이긴 하지만 성스러운 시간과 비슷한 시간의 단절성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시공간에 대한 비균질적인 의식은 사원에서도 세계의 중심에서 천지사이를 연결해주고 우주의 시간이 건물 양식을 통해 상징적인 방법으로 드러난다. 시간은 새로운 종류의 존재자가 출현함과 동시에 발생하고, 이러한 실재의 탄생은 신화를 통해 계시된다. 우주의 창조는 신적인 것의 최고의 현현이며, 이때에 신들은 최대의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따라서 종교인들은 이러한 것을 실재로 보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이러한 창조의 성스러움을 경험하고자 신년제의를 하는데, 이를 통해 과거의 시간을 폐지하고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의 이행을 반복하여 우주 창조를 재현한다. 이것은 의례적 정화와 개인과 전체의 죄와 과오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료의 의미 역시 이러한 창조의 시간으로 돌아가서 최대의 힘을 발휘하는 신의 힘으로 재생한다는 뜻이 있다. 즉 이러한 창조와 같이 신성한 행동을 모방, 반복하는 것은 그러한 성스러움이 실재에 머물도록 해주고, 이를 부단히 재현하여 세계가 성화되기를 바라는 욕구에서 기원되는 것이다.

신화는 시간의 최초에 일어난 원초적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새로운 우주적 상황과 원초적 사건의 출현을 알린다. 이것은 신들의 작업이 신성하다는 것을 계시한다. 신화의 가르침은 곧 신을 모방한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종교적 인간은 (자기 자신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진정한 인간이 된다.

신화나 신년제의 뿐만 아니라 종교인에게 있어서 자연은 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성스럽다. 가령 물의 경우 종교적 인간들은 그것을 우주적 총체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것은 일체의 존재 가능성의 원천 저장고로 모든 형태에 선행한다고 생각한다. 즉 물위에서 부상하는 것은 창조되는 것으로, 수몰하는 것은 해체되는 것(하지만 완전한 소멸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으로 생각하며 물과 접촉하면 부활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대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지는 자궁과 같이 인간이 태어나는 곳이면서 동시에 죽어서 돌아가는 곳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여성의 분만은 대지모의 일을 대신 행하며, 이것은 모범적 행위의 소우주적 표현법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신생아를 대지에 눕히거나 누군가를 자신의 집단으로 받아들일 때 신체의 일부 혹은 전체를 상징적으로 매장하는 행위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세례와 같이 우주적 어머니에 의해 새로 태어나며, 이 사람을 자신의 집단에 받아들이겠다는 재생과 가입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을 이룬 최고신은 어떤 존재인가? 최고신을 상징하는 각 민족의 언어를 보면 대부분 '하늘'이나 '지고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그는 너무 높은 존재라서, 혹은 너무나도 선한 존재라서 대부분의 경우 창조를 한 후에는 다른 신에게 인간사를 맡기고 '은퇴'하게 되고, 사람들도 찾지 않게 된다. 다만 사람들은 그가 그 누구도 대처할수 없는위기의 순간에는 구제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즉 의식적으로 이해하지 않아도 메시지를 교환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을 한다.

즉 종교적 인간에게는 모든 행동은 성적인 것으로 인식이 된다. 이들은 친숙한 일상생활에서 영적인 징표와 행위를 발견하고, 열린공간에 살면서 자신의 실존도 세계를 향해 열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유럽에서는 역사적 상황하에서 인식되는 인간의 상태 이외에는 어떤 종류의 인간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이들은 자연과 우주의 신성성을 상실하고, 이러한 탈 신성화에 의해 자유를 얻는 것이다. 통과의례를 볼때도 종교적 인간인가 혹은 탈신성화된 비종교적 인간인가의 차이에 의해 신가입자의 존재론적 상태를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진다. 즉 종교적 인간에게 출생은 공동체의 포용이고, 사망은 이승에서 저승으로의 거주지가 바뀌고 사자의 공동체로 받아들여짐을 의미한다면, 비종교적 인간에게 이러한 일은 단순한 가정과 개인의 일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2.
제목대로 이 책의 주제는 성과 속이다. 하지만 단순히 세계관을 성과 속으로 나눈 점은 나에게 상당히 낯설었다. 속이라니. 어딘가 저속하고 속물적인이라는 생각이 속이라는 단어에 자리잡혀있기 때문일까. 오늘날의 비종교적 인간에게 있어서 성이라는 것은 분명히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이 아닌 점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는 속된 존재입니다'라고 과연 얼마나 인식 혹은 인정을 할까. 여기서 인간은 아무리 속된 존재라 해도, 종교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어도 성스러움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성스러움이라는 것은 단순히 속이라는 개념에 대비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가역적인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추구되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성스러워지려고 하는 노력은 인간이 속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가 가족들을 따라 주말에 교회를 가지 않는 이유는 특정종교에 의해 그렇지 않아도 좁은 나의 세계관이 더 좁아질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근데 종교적 인간은 열린공간에 살면서 자신의 실존도 세계를 향해 열어놓은 것이라니! 읽으면서 앞으로는 가족들과 함께 교회에 나가야지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었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보니 이 책에서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려 비극적 실존이 되어버린 현대인이신 독자여러분께서는 책을 다 보는대로 종교를 가지시길 바랍니다'라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특정종교를 통해 이러한 종교적 인간이 되어 열린공간으로, 그리고 나의 실존도 열릴수 있을 것이다.(어쩌면 현대사회에서 그래도 종교성이나 신성성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잃어버린, 잊어버린 신성성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딛고 있는 땅에 대해서도, 흐르는 물을 보면서도, 그리고 푸른 하늘을 보면서도 조금 더 생각해보고 믿을수 있다면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의 수많은 예시를 통해서 알 수 있게 되었다. 결국은 내 자신이 내가 접하고 있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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