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에 관한 책은 읽을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데, 그의 행적을 현대적 리더십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이다. 대개 세종대왕께서 그 누구보다 공부도 열심히 하시고, 남의 이야기는 잘 들으시며, 천재적인 학습 능력으로 한글까지 만들어냈다는 서술에 그치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이 위대하다는 사실은 잘 알겠다. 잘 알겠는데, 사실 그 정도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만 따라 부를 줄 알아도 꿰고 있는 사실 아닌지. 


아쉬운 걸 넘어 ‘불호’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책들도 있으니, 그에게서 회사 경영의 리더십을 발견하는 책들이다. 세종대왕이 이윤 창출을 위해 권력을 쓰는 모습을 상상해봤는데, 그려지질 않는다. 유교와 비즈니스는 세계관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 내 생각에 후손들이 그런 모습을 그려봤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세종대왕이 ‘불경하다’며 불같이 화를 낼 것 같다.


『세종대왕실록』 또한 앞서 읽었던 세종의 책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실록 요약에서 세종의 행적을 상세히 다뤘다는 것은 장점이었지만, 신하들의 일대기와 논평이 정작 책의 주인공인 세종의 분량보다 더 많은 것이 그 장점을 상쇄하고 말았다. 이 책 역시 내가 읽고 싶었던 ‘그 책’은 아니었다. 


-----


아쉬운 마음에 박시백 화백의 『조선왕조실록』 세종·문종 편을 급하게 꺼내 읽었는데, 단순 나열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세종대왕실록』보다는 좋았던 것 같다. 청소년을 위한 학습 만화임에도 한글 창제나 과학기술 발달, 궁중음악 정비 등의 성과가 무엇을 계기로 어떤 과정을 거치며 이루어졌는지 상세히 서술했는데, 이 점이 세종의 통치에 입체성을 더했달까. 개인적으로는 이 책 덕분에 만원권 지폐 밖에서 살아 움직이는 세종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에도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는데, 일단 청소년 학습 만화인 탓인지 세종의 업적이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부각되었다는 점이 그랬다. 대군 시절부터 책벌레로서 유교 경전을 꿰고 살았던 임금이라기엔 너무나 단순한 설명이었달까. 게다가 부민고소금지법 관련 대목에선 현대적 관점을 지나치게 투영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유교적 상하관계의 수립이란 관점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하극상으로 인해 극심했던 고려사회의 혼란,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이 지방 출신 아전을 통제하지 못했던 배경까지 아울렀다면 그 서술이 입체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 식민사관을 넘어 


그래서 대체 어떤 책을 읽고 싶어서 이러는 거냐고 묻고 싶은 분들께 드리는 답변은 이런 것이다. 나는 세종의 업적이 그의 통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 업적을 그 철학에 기반해 해설하는 책을 기다렸다. 재위 후반기에 불교 친화적인 모습이 잦아지면서 신하들과 충돌하기도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유교적 이상 국가를 완성하는 것이 세종의 최종 목표였다. 그렇다면 그의 업적은 유교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는 없는지 궁금해졌고, 그의 통치를 통해 유교를 지금과는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어떤 분들은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굳이 지금 유교의 다른 면모를 고민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 반문에 나는 이런 답을 내어놓고 싶은데, 하나는 세종의 시대와 유교를 더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인 대부분은 유교를 청산해야 할 구시대의 유물 정도로 취급하지만, 사실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존경받는 세종의 사상적 기반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런 취급이 꽤나 부당해 보인다. 게다가 세종이 유교를 기반으로 한글 창제,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과학기술 발달, 국방력 강화 등을 일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 유교 때문에 망한 조선?

최근 들어 유교의 전근대성과 경직성을 이유로 조선의 존재(또는 정통성)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유교의 후진성이 민중의 부양을 방해한 동시에 그들을 억압했으며, 그것을 국시로 삼은 조선은 비문명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중 몇몇은 이런 논리로 근대화 실패, 나아가 한일합방의 책임까지 유교와 (세종을 포함한) 조선 왕조에 추궁한다. 이들에게는 유교가 제국주의 이상의 적폐였던 것이다. 마치 식민 지배를 피지배민족의 무능 탓으로 돌리는 것과 같은 논리인데, 혹시 이거, ‘식민사관’으로 부르기로 하지 않았던가?

약육강식의 세계질서가 재현될 조짐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런 식민사관을 내면화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이 어이없어서, 마시던 커피가 비강으로 넘어올 지경이다. 양보해서 ‘유교=구시대 유물’이란 고정관념까지야 이해할 여지가 있다 치더라도 말이다. 세종과 유교가 시대에 미친 영향을 보다 정확하고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노력이 더욱 필요해진 것도 그래서다. 힘의 논리가 전부였던 시대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서평을 쓰다 보니 읽은 책보다 다른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책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정리한 셈 치려고 한다. 만원권 지폐 밖에서 살아 있는 사유의 대상으로서 세종과 유교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 덧. 이어서 『세종의 선택』이란 책을 읽고 있다(대체 병렬로 몇 권을 읽는 건지). 이런저런 정책의 시행 배경을 두 책보다 깊게 파고든 덕분에 당시의 조선과 세종이란 사람이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리고 다른 수확 하나는, 세종 치세의 조선이 결코 태평성대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다는 것이다. 기후 이상으로 인한 흉년, 전염병 등등 별별 자연재해가 정말 잦았고, 세종은 끊임없이 대처하는 와중에 나라의 기틀까지 세워갔다. 이러니 조선 왕들이 장수할 리가 있겠나 싶어지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권력과 진보 - 기술과 번영을 둘러싼 천년의 쟁투, 2024 노벨경제학상 수상작가
대런 애쓰모글루.사이먼 존슨 지음, 김승진 옮김 / 생각의힘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AI로 인한 일자리 감소 때문에 온 세계가 난리인데, 이 책에 따르면 이런 사태가 처음이 아니라고 한다. 산업혁명기의 고용 충격은 지금보다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산업혁명 시절부터 자본가는 노동자를 가능한 한 배제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산업혁명기는 이 노력이 결실(?)을 맺은 (아마도) 최초의 시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 자본가들의 성향은 이제나 저제나 한결같은데, 자본가가 노동자와 함께 부흥했던 60~7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는 대체 어디서 뚝 떨어진 황금알이었을까? 그냥 지구인, 아니 노동자의 운세가 좋았던 걸까? 그렇다면 AI 시대에 우리 노동자들의 운은 이대로 다해버린 걸까?

그럴 리는 당연히 없고, 책에서 제시하는 대답은 ‘기술 발전의 방향’이다. 예를 들어 생산성의 혁명을 불러온 1910년대 ‘포드 혁명’은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을 사회가 ‘노동 친화적’으로 합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후 60~70년대에 맞이한 (너도 나도 잘 사는) 자본주의의 황금기는 기술의 발전이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게 책의 주장이다. 참고로 그 사회적 합의의 주체 중 하나는 ‘노조’이며, 저자는 귀에 못이 박힐 때까지 노조의 필요성을 반복한다(세상의 모든 책이 그런 것처럼, 저자는 수백 년 동안 축적된 역사적 자료를 발굴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저자 선생님 이야기 잘 알겠고, 그래서 AI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는 대체 뭘 해야 할까? 사실 위의 언급이 거의 해답지 수준으로 답을 내어놓아서 굳이 생각할 필요조차 없어 보일 지경인데, 문제는 사회적 환경을 떠올릴 때마다 명치 한가운데서 깊은 한숨만 나온다는 것이다. 이 한숨 때문에 더 많은 분들, 아니 정말 많은 분들과 함께 읽어보고 싶은 책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럴 앰비션 - 이기적 야망의 종말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이정민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사계절 내내 한강공원을 덮어버릴 기세로 쏟아지는 자기계발서 홍수 속에서 나는 다짐한 적이 있다. 언젠가 자기계발서 말고관계계발서같은 걸 써보면 어떨까? 나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꼭 자기만 계발하라는 법은 없을 뿐 아니라, 관계를 계발한다면 무려 연대나 평화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 신경과학계의 석학인 로버트 새폴스키도평화학(peaceology)”의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인간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능력에 교역, 인구 통계, 종교, 집단 간 접촉, 화해, 기타 등등이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 말이다. 이 지적 시도는 세상에 크나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행동』, p.780)고 말했으니, 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을까?

 

문제는 내가 A4 열 장 이상의 글을 써본 경험이 없다는 거였고, 아이디어만 품은 채 하염없이 보내고 있었는데, 『모럴 앰비션』 출간 소식을 들었다. 꽤나 화제를 모았던 『휴먼카인드』의 저자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후속작이라고 한다. 본능적으로 이 책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내가 (쓰려고) 상상만 했던 그 책이었기 때문이다. 읽어보지 않을 이유가 있나? 마침 서평단을 모집하기에 일정 다 제쳐두고 신청했다.

 

-----

 

책을 요약해보면 매우 간단한 이야기다. 선한 야망을 가질 것, 그리고 그 야망을 실현시킬 것. 책은 강한 어조로 독자에게 세상을 바꿀 것을 주문하면서, 동시에 성과를 반드시 거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냥 강조하는 게 아니라, 거의 강박적으로 강조하는 바람에 솔직히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가뜩이나 나는 실패에 관해 긴 글을 쓰고 있는데(혹시 궁금하신 분은 프로필 링크를 참고해주시길!), 이렇게 성공해야 한다는 노래를 부르면 대체 어쩌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이런 저자의 조급함을 이해 못할 것도 없는 것이, 정말 많은 일들을 지금 당장해결하지 않으면 진짜 위기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기후변화 문제만 봐도, 국제사회는 2015년 파리 기후 협정에서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내 상승 수준에서 관리하기로 합의했지만, 이미 (2015년 대비) 지난해에 1.58℃가 상승했다고 한다. 저자가 언급하는 또 하나의 위기, 핵무기 위협도 다르지 않은 것이, 미국 역사상 가장 정서가 불안해보이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15일이면 끝난다던 이란 전쟁은 무려 4개월이나 이어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저자는 무턱대고 성공을 주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계발서처럼 다양한 성공 사례를 소개하면서, 그들이 성공에 이를 수 있었던 방법을 분석한다. 그 방법들을 내 나름대로 요약해보면 더 큰 성과가 필요한 일에 나설 것, 성과를 수치화하여 공유할 것(KPI), 더 많은 사람의 관심(또는 공감)을 살 것 등이다. 성과 없이는 보상도 없다는 자본주의적 논리 같지만, 그 방법을 고스란히 자본주의의 부작용을 청소하는 데 사용하자는 것도 나름 신선하면서도 대담한 주장이었던 것 같다.

 

책에서 소개된 역사적 사실도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로자 파크스 사건(백인에게 버스 좌석을 양보하지 않았던 사건)이 몽고메리의 버스 보이콧 운동의 시발점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흑인 민권단체들이 이전에 벌어진 갖가지 인종차별 사건에 섣불리 반응하지 않은 것은, 그 사건들에서 최대 다수를 동원할 상징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로자 파크스 사건이 터졌을 때에야 버스 보이콧 운동을 시작했고, 시내버스 인종 분리 규정의 위헌 판결을 이끌어냈다.

 

-----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럴 앰비션』은 도덕적 혹은 이타적 야망을 가지고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꽤나 선동적인 책이다. 동시에 각자 자신의 소명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리해놓은 이성이 녹아 있는 책이기도 하다. 내가 막연하게 구상했던 관계계발서의 모습을 대략 83% 정도 구현했다는 점에서 읽지 않았다면 큰 일이 났을 법한 반가운 책이기도 했다.

 

다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실현할 수 있는 이타적 욕구에 대해 등 떠밀리듯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강박에 가깝도록 반복되는 저자의 독려 때문이기도 했지만, 관계계발서 단락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을 읽기 전부터 고민해왔던 일이기도 했기에 속 편하게 책만 읽을 수는 없었다. 공존에 관한 책을 소개하고, 설득하기 위한 서평을 계속 써왔던 것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고 생각하지만, 첫 발의 보폭이 이제 만 세 살이 된 엄지발가락 길이 수준이어서 크게 내세우기는 어려울 것 같고, 소개할 만한 성과까지 없다는 게 문제다. 그나마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구상을 구체화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선물 같은 경험이었달까.

 

그래서 이 책 또한 더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나와 같은 독서 경험을 한 이들이 많아지고, 그만큼 새롭고도 좋은 일을 많이 시도할수록 세상은 더 빠르게 변할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 때문에 불안하다는 착각 - 경제적 불안을 권하는 사회에서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법
다우치 마나부 지음, 김정환 옮김 / 부키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바야흐로 불안의 시대다. 나도 (아직 오려면 한참 남은) 노후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한숨을 쉴 지경인데, 주변에서 틈만 나면 몇 억은 모아둬야 한다고 떠들어 댈 때면 뇌 한 구석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한국의 중위소득과 중위자산 모두 세계 상위 10~15% 수준에 이르는 상황에서 불안이 얼마나 합리적인 건지 의문이 들 때면, 머리가 블랙홀 강착 원반에 진입한 것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버린다. 혼돈의 카오스.


막연했던 의문이 풀린 것은 『돈 때문에 불안하다는 착각』을 읽은 후였다. 책의 제목이 이미 결론을 내렸듯이, 돈 때문에 느끼는 불안은 착각인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근거들을 매우 합리적이면서도 명쾌하게 풀어간다.


-----


그래서 왜 우리는 항상 돈 때문에 (헛된) 불안을 느끼게 되는 걸까? 책에 소개된 여러 가지 이유를 나는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개인이 해결하기 어려운 사회적 과제가 그들에게 전가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폐 경제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오히려 새로운 부의 창출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전자부터 살펴보자. 지난 2019년, 일본에서는 금융청에서 발표한 “노후 자금이 2,000만 엔(26년 환율 기준 약 1억 9천만 원) 부족할 것”이란 보고서가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 보고서는 일본 사회에 작지 않은 변화를 일으켰다. 미래에서 불안을 느낀 개인들이 본격적으로 투자에 나섰고 기업이 이 수요에 대응하면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불안이 훌륭한(?) 마케팅 소재가 된 것이다. 


후자는 좀 더 문제가 심오해지는데, 화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때문에 정작 진짜 부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소개한 예시를 살펴보는 게 좋겠다. 시장에서 첫날 만 원짜리 판매되던 주스가 다음 날 오천 원, 그 다음날에는 삼천 원에 할인 판매되었고 고객 A와 B, C는 주스를 각각 만 원과 오천 원, 삼천 원에 구매했다. 이 경우 제일 큰 이익을 본 사람은 누구일까? 많은 분들이 자신있게 정답을 외치겠지만, 사실은 알 수 없다. 주스를 가장 맛있게 즐긴 사람, 즉 그 주스에서 가치를 느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불안의 기원을 두 가지로 정리했지만, 둘은 사실 떼어놓고 생각하기에 관계가 지나치게 긴밀하다. 가령 이런 것이다. 노후 불안은 화폐 가치로 변환되어 설명하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화폐를 불리는 데 최선을 다한다. 문제는 화폐만으로 가치를 만들 수는 없다는 데 있다. 이 문제는 특히 일본 같은 심각한 노령화 사회에서 더 심각해진다(우리는 더 심각할지도 모르겠다). 가령 돌봄 서비스 인력이 심각하게 부족한 경우에, 잔뜩 쌓아놓은 화폐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이런 의문은 자연스럽게 투자 문제로 이어진다. 2024년 일본의 주식 거래액 1,300조 엔 가운데 기업이 신규로 조달한 자금은 1.4조 엔에 불과했다고 한다. 즉, 주식 거래액의 0.1%만이 가치 투자에 동원되었다는 이야기다. 만약 주가 상승이 통화량 같은 금융 요인에 따른 결과라면, 내가 1년 전에 목표로 했던 자산 1억은 1년이 지난 지금의 1억원과 가치가 같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화폐가 늘어난 만큼 돈의 가치가 하락했기 때문이다. 


-----


저자의 제안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보유한 화폐를 늘리기 보다는 가치를, 사회가 함께 창출하는 것이다(더 자세한 내용은 책에서 확인하시기를!) 이 결론에서 나는 아쉬움과 반가움을 동시에 느꼈는데, 아쉬움은 이미 전 세계 나라 대부분이 이 가치 창출에 사활을 걸었기 때문이다. 말인 즉, 이 제안이 이 책 고유의 인사이트라고 보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에게 주목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코로나19를 기점으로 ‘투자만 답’이란 인식이 확고해지면서 투자 행위의 가치는 수직 상승한 반면, 노동의 가치는 그 인식 속에서 추락에 가까운 하락을 거듭했다. 그 와중에 가치의 진짜 기원을 상기시켜주었다는 점에서 무척 반가운 책이었달까. 물론 인식의 전환을 몇몇 개인이 해낼 수는 없는 일이고 그래서 실질적인 변화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가능하겠지만, 일단 반전의 계기로 삼을만한 책을 만난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나는 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함께 읽으시면 좋겠다. 『돈 때문에 불안하다는 착각』은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감의 시대 - 다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것
프란스 드 발 지음, 최재천.안재하 옮김 / 김영사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유명한 『침팬지 폴리틱스』의 저자이자 동물행동학의 권위자인 프란스 드 발이 쓴 책이다. 제목 그대로 ‘공감’에 관한 이야기인데, 저자는 사람 의 행동이 아닌, 자기 연구 분야인 동물의 행동에서 그걸 찾았다. ‘공감’이란 말 때문에 홀린듯 들여왔고, 읽는 내내 매우 공감했지만, 시차를 두고 생각해보니 저자의 주장에서 꽤 많은 부분 공감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이래서 생각도 시간을 가지고 다듬어야 하나보다).



📚 적자생존을 향한 카운터 어퍼컷


마치 내 의지와는 관계 없이 내 공감을 강탈해간(?) 부분부터 시작해보자. 내 생각에 이 책이 남긴 가장 중요한 성과는 자연계(또는 과학)에서 공감의 지위를 회복시켰다는 것이다.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또는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이없도록 많은 사람들이 자연 선택을 부자나 권력자, (더 이상하게는) 근육을 부풀린 개체들이 생존 경쟁에서 이긴다며 착각하는데, 드 발은 시작부터 “삶에 대한 투쟁이 자연의 본질이니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도 믿지 마시라”라고 못을 박는다. 다시 말해 포유류나 영장류의 행동을 보면 생존을 위해 협력하는 경우가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사실상 전체가 이 주장에 대한 증거라고 봐도 좋을 정도인데, 그러다 보니 책을 읽다 보면 적자생존 광신도들을 신나게 비웃게 된다. 과학책 읽으면서 이런 카타르시스를 느낄 줄이야. 


이런 카타르시스도 좋았지만, 적자생존 신도들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난 힘 자랑을 ‘과학의 탈’을 쓰고 할 수 없다는 게 더 좋았다. 이전까지는 ‘자연주의 오류’ 같은 어려운 말을 써가며 길게 반박해야 했는데(당연히 상대방은 이런 말도 모른 척했지만), 이 책이 좋은 레퍼런스가 되어준 덕분에 그건 ‘네 희망사항’이라거나 ‘미신’이라고 자신 있게 반박할 수 있으니까. 사실 과학자 입장에서 이런 책을 쓰는 게 쉽진 않았을텐데, 반대 진영에서 날을 세워가며 논쟁을 위한 논쟁에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그러나 프란스 드 발은 용기를 냈고, 좋은 과학 레퍼런스를 안겨주었다. 이러니 의미 있는 책이 될 수밖에. 



📚 과학도 껴줄 때가 되었다


기억하고 싶었던 또 다른 대목은 “법학, 경제학, 정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객관성을 가지고 자신의 사회를 볼 방법이 없다”면서 과학이 확인한 협동 “경향을 간과하는 사회는 이상적인 사회가 될 수 없다”는 드 발의 주장이었다. 과학이 발견한 협동-친화적 성향을 사회과학 연구자들, 나아가 정치인들이 모른 척한다는 이야기다. 가령 경제학은 인간을 아직도 최대한 자신의 목표을 실현시키기 위해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존재로 간주하고 논리를 펼치는데, 과학자들은 이런 인간관을 흡연 호랑이 연구하던 시절에 내다 버렸다는 걸 알고 계시는지. 문제는 손가락만 가져다 대도 먼지 날릴 것 같은 경제학의 영향력이 사회과학 중에서도 끝판왕이라는 거다. 한정된 재화의 효율적 분배를 목표로 한다는 경제학이 목표를 잘 수행해냈을까? 아니, 설명은 잘 해냈을까? 책에서 소개한 앨런 그린스펀의 사례를 보면 전혀 안 그런 것 같다. 


드 발은 호모 사피엔스가 마냥 친절한 종은 아니더라도, 반대로 폭력적이기만 종 또한 아니라고 말한다. 포유류 대부분이 협동이 필요한 상황에선 언제든 뭉치고, 심지어 연대감까지 발휘한다는 것이다. 인류 또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렇기에 정치는 기존의 사회과학에 더해 과학적 발견을 보태야 한다는 게 이 책의 요지다. 드 발의 주장을 내 방식대로 읽어보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적어도 사람이 세상을 모두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점, 사람의 뇌가 열량을 최대한 아껴 쓰다보니 편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신경과학의 발견 감안한다면, 인간이 받아들이기에 ‘편안한’ 사상 또는 제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 모듈론 vs 구성론


하지만 이 책의 몇몇 대목은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내 마음에 남았는데, 공감의 기원을 ‘진화’라고 못 박은 대목이었다. 아니 대목이란 말도 맞지 않는 것이, 진화가 공감의 기원이라는 말은 책의 논지를 세우는 철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의 몸과 마음은 사회적 삶에 맞게 만들어져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희망을 읽고 낙담하게 된다.”(p.26)는 말이나, “공감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 인간 종보다도 훨씬 더 이전에 진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p.100)는 발언이 그 예시인데, 처음엔 공감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나도 모르게 실눈을 뜨거나 고개가 자꾸만 한쪽으로 기울이게 된 것이다.


내 의문은 인간의 협동이 생물학적 진화에서 유래했느냐는 것이다. 『위어드』의 저자 조지프 헨릭은 유전자 진화에 문화가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의 대표 주자인데, 전작인 『호모 사피엔스 - 인류를 지배종으로 만든 문화적 진화의 힘』에서 그 이론을 아주 잘 정리했다. 짧게 요약하자면, 인간이 지배종이 된 것은 ‘학습 능력’ 덕분이고, 생존에 필요한 지식은 문화의 형태로 전수된다는 것, 그리고 문화가 생물학적 진화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다. 헨릭은 후속작인 『위어드』에서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의 실제 사례를 소개한다. 유럽이 산업혁명을 전후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은, 2000여년 전 유럽에 자리 잡은 이러저러한 문화(여기에 대해선 서평 작성 예정)을 학습한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 2000년 동안 자리를 잡은 문화 때문에 유럽 바깥의 사람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관찰되었는데, 헨릭은 이걸 문화가 생물학적 유전에 영향을 미친 사례로 생각한다.


헨릭의 논의를 거드는 또 한 명의 학자가 있으니, 바로 심리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리사 펠드먼 배럿이다. 배럿은 구성된 감정 이론(theory of constructed emotion, TCE)의 대표 주자 중 한 명인데, 구성된 감정 이론의 요지는 대략 이런 것이다. 기존 심리학은 사람이 즐거움, 기쁨, 슬픔, 공포 등을 뇌에 장착한 상태로 태어난다고 설명했는데(basic emotion theory, BET)(이 이론이 만약 사실이라면, 이걸 가능하게 한 것은 진화일 것이다), 우리(뇌)가 학습 능력을 타고난 탓에 이러한 감정 또한 태어난 후에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배운다는 것이다(감정을 구성하는 복잡한 절차는 생략). 이 경우에도 학습이 주요한 화두인데, 드 발이 협동, 나아가 (협동을 이끌어내는) 공감이 내재된 본능으로 간주한다면 배럿은 그게 다 태어나서 학습한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드 발이 『공감의 시대』에서 공감에 관해 펼친 논리는 헨릭-배럿의 입장과 대척점에 놓인 셈인데, 드 발이 협동의 기원을 진화, 더 정확하게는 공통 조상으로부터 찾고 있으며, 이는 협동이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관련해서 헨릭은 『위어드』에서 “문화적 진화 과정은 유전자에 작용하는 자연선택에 비해 빠르고 강력하다”고 주장하면서 근거로 20세기 동안 교육 제도(문화)와 자연선택이 유럽 청소년들의 학업 성취도 향상에 기여한 수준을 들었는데, 아니 글쎄 교육이 9~11년 향상, 자연선택이 8개월 퇴보라는 압도적 차이를 기록한 것이다. 


내 생각에 이는 문화와 유전자 중 사람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는데, 여기에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람의 행동에서 문화의 영향이 이 정도로 크다면, 협동의 기원을 ‘진화’에서 찾은 드 발의 주장이 얼마나 설명력을 지닐 수 있을까? 드 발이 후천적 학습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완전히 무시한 것 같진 않지만, 이러나저러나 논지가 목에 걸린 생선가시 같을 수밖에. 그렇다고 누굴 지지하네 마네 선언(?)하기도 어려운 것이, 두 입장이 각각 모듈론(Modularity / Nativism)과 구성론(Constructionism) 진영으로 나뉘어 한창 논쟁중이었던 탓이다. 전혀 없는 일개 서평러로서 누굴 지지하기엔 학술적 배경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열혈 지지자가 된다면 그것도 우스운 노릇이니까. 어쨌든 책을 덮고 나서도 마냥 후련하기만 하진 않았다는 게 책이 남긴 약간의 아쉬움이었다.


-----


이런저런 의문이 남았어도 의미 있는 독서 경험을 남겨준 책인 걸 부인하진 않으련다. 요즘 사회가 바닥을 드러낸 호수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그만큼 협동, 공감 같은 걸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감의 시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곤 해도, 충분히 단비 같은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책은 무조건 추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