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대왕에 관한 책은 읽을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데, 그의 행적을 현대적 리더십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이다. 대개 세종대왕께서 그 누구보다 공부도 열심히 하시고, 남의 이야기는 잘 들으시며, 천재적인 학습 능력으로 한글까지 만들어냈다는 서술에 그치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이 위대하다는 사실은 잘 알겠다. 잘 알겠는데, 사실 그 정도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만 따라 부를 줄 알아도 꿰고 있는 사실 아닌지.
아쉬운 걸 넘어 ‘불호’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책들도 있으니, 그에게서 회사 경영의 리더십을 발견하는 책들이다. 세종대왕이 이윤 창출을 위해 권력을 쓰는 모습을 상상해봤는데, 그려지질 않는다. 유교와 비즈니스는 세계관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 내 생각에 후손들이 그런 모습을 그려봤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세종대왕이 ‘불경하다’며 불같이 화를 낼 것 같다.
『세종대왕실록』 또한 앞서 읽었던 세종의 책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실록 요약에서 세종의 행적을 상세히 다뤘다는 것은 장점이었지만, 신하들의 일대기와 논평이 정작 책의 주인공인 세종의 분량보다 더 많은 것이 그 장점을 상쇄하고 말았다. 이 책 역시 내가 읽고 싶었던 ‘그 책’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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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마음에 박시백 화백의 『조선왕조실록』 세종·문종 편을 급하게 꺼내 읽었는데, 단순 나열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세종대왕실록』보다는 좋았던 것 같다. 청소년을 위한 학습 만화임에도 한글 창제나 과학기술 발달, 궁중음악 정비 등의 성과가 무엇을 계기로 어떤 과정을 거치며 이루어졌는지 상세히 서술했는데, 이 점이 세종의 통치에 입체성을 더했달까. 개인적으로는 이 책 덕분에 만원권 지폐 밖에서 살아 움직이는 세종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에도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는데, 일단 청소년 학습 만화인 탓인지 세종의 업적이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부각되었다는 점이 그랬다. 대군 시절부터 책벌레로서 유교 경전을 꿰고 살았던 임금이라기엔 너무나 단순한 설명이었달까. 게다가 부민고소금지법 관련 대목에선 현대적 관점을 지나치게 투영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유교적 상하관계의 수립이란 관점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하극상으로 인해 극심했던 고려사회의 혼란,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이 지방 출신 아전을 통제하지 못했던 배경까지 아울렀다면 그 서술이 입체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 식민사관을 넘어
그래서 대체 어떤 책을 읽고 싶어서 이러는 거냐고 묻고 싶은 분들께 드리는 답변은 이런 것이다. 나는 세종의 업적이 그의 통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 업적을 그 철학에 기반해 해설하는 책을 기다렸다. 재위 후반기에 불교 친화적인 모습이 잦아지면서 신하들과 충돌하기도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유교적 이상 국가를 완성하는 것이 세종의 최종 목표였다. 그렇다면 그의 업적은 유교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는 없는지 궁금해졌고, 그의 통치를 통해 유교를 지금과는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어떤 분들은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굳이 지금 유교의 다른 면모를 고민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 반문에 나는 이런 답을 내어놓고 싶은데, 하나는 세종의 시대와 유교를 더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인 대부분은 유교를 청산해야 할 구시대의 유물 정도로 취급하지만, 사실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존경받는 세종의 사상적 기반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런 취급이 꽤나 부당해 보인다. 게다가 세종이 유교를 기반으로 한글 창제,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과학기술 발달, 국방력 강화 등을 일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 유교 때문에 망한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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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유교의 전근대성과 경직성을 이유로 조선의 존재(또는 정통성)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유교의 후진성이 민중의 부양을 방해한 동시에 그들을 억압했으며, 그것을 국시로 삼은 조선은 비문명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중 몇몇은 이런 논리로 근대화 실패, 나아가 한일합방의 책임까지 유교와 (세종을 포함한) 조선 왕조에 추궁한다. 이들에게는 유교가 제국주의 이상의 적폐였던 것이다. 마치 식민 지배를 피지배민족의 무능 탓으로 돌리는 것과 같은 논리인데, 혹시 이거, ‘식민사관’으로 부르기로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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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육강식의 세계질서가 재현될 조짐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런 식민사관을 내면화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이 어이없어서, 마시던 커피가 비강으로 넘어올 지경이다. 양보해서 ‘유교=구시대 유물’이란 고정관념까지야 이해할 여지가 있다 치더라도 말이다. 세종과 유교가 시대에 미친 영향을 보다 정확하고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노력이 더욱 필요해진 것도 그래서다. 힘의 논리가 전부였던 시대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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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쓰다 보니 읽은 책보다 다른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책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정리한 셈 치려고 한다. 만원권 지폐 밖에서 살아 있는 사유의 대상으로서 세종과 유교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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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 이어서 『세종의 선택』이란 책을 읽고 있다(대체 병렬로 몇 권을 읽는 건지). 이런저런 정책의 시행 배경을 두 책보다 깊게 파고든 덕분에 당시의 조선과 세종이란 사람이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리고 다른 수확 하나는, 세종 치세의 조선이 결코 태평성대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다는 것이다. 기후 이상으로 인한 흉년, 전염병 등등 별별 자연재해가 정말 잦았고, 세종은 끊임없이 대처하는 와중에 나라의 기틀까지 세워갔다. 이러니 조선 왕들이 장수할 리가 있겠나 싶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