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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 - 유목적 사유의 탄생
이정우 지음 / 아고라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요네하라 마리의 <대단한 책>을 보면서도 정치·역사·문학·언어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섭렵한 지은이의 넓은 시야에 감탄했는데, <탐독>을 읽으면서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문과와 이과를 가르는 우리나라의 교육 상황 때문인지, 나의 굳어버린 머리 때문인지 문학, 과학, 철학 분야의 책들을 두루 섭렵한 지은이의 폭넓은 시야와 깊이 있는 책의 세계를 구경하는 것은 아찔하면서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왜 어린 시절 컴퓨터 게임과 텔레비전에만 시간을 쏟았는지, 왜 공부한답시고 교과서에 똑같은 문장을 수동적으로 암기했는지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은 이정우 님의 삶과 그 삶과 함께 했던 책들에 대한 이야기다. 크게 문학, 과학, 철학으로 나누어진다. 저자는 어렸을 적에는 책보다는 자유롭게 시골을 뛰어놀았고 문자는 한글보다 한자를 먼저 접했다고 한다.(이로써 문학, 과학, 철학에 한문학, 역사까지 목록이 추가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시절로 문학으로 시작했다고 하는데, 벌써 그 때부터 한국 근현대 소설, 삼국지·수호지와 같은 역사소설, 세계문학을 거의 대부분 읽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중에 눈에 띄었던 것은 저자가 도스또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은 내용이었다. 내가 인상적으로 읽었던 이반의 물음, 즉 '신이 존재하는지, 그렇다면 왜 죄 없는 아이들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함께 러시아의 역사적, 사상적 배경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나는 책을 '읽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활자를 눈으로 쫓아갔을 뿐이고 제대로 알고 읽은 것,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에 읽었다고 생각했던 행위들에 대한 반성이 절로 일었다.
이어진 과학 책 이야기는 책을 읽은 지 얼마 안 지났는데도 어지러운 수식과 기호들, 양자역학과 열역학, 인간 내부에 크고 작은 회로와 같은 단어들만 떠오를 뿐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다. (읽으면서 반성하고 읽고 나서 바로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철학 책 이야기 역시 열심히 이정우 님이 소개해 주시는 책의 제목을 받아적을 뿐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실은 이렇게 많은 책 제목 중에 제대로 읽어본 책이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이었다-_-;; 이 부분 역시 존재론과 인식론, 전통·근대·탈근대와 같은 단어들, 소은 선생님, 푸코, 들뢰즈라는 이름들만 머리를 두둥실 떠다닌다. 부끄럽지만 과학과 철학에 대한 무지함이 읽어도 읽지 않은 것과 비슷한 상태를 유지하게 해주었다.(하하하...) 하지만 이제 과학과 철학을 공부할 때 어떤 책을 먼저 읽어야 할 지, 책을 접해야 하는 순서를 소개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히 에필로그에서는 참으로 많은 책을 소개받았다.)
책을 읽는 내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쓴 '가로지름'이라는 표현처럼 서로 다른 이질적인 분야라고 생각한 경계들을 넘나들며 사유하고, 그것이 저자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났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내가 앞으로 살면서 얼마나 많은 분야를 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는 데 있어서도 이처럼 유연하게 경계를 긋지 않고 넘나들며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